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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00501
한자 金睟
영어음역 Gim Su
이칭/별칭 자앙(子昻),몽촌(夢村),석릉(石陵),소의(昭懿)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배성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547년연표보기
몰년 1615년연표보기
본관 안동(安東)
대표관직 영중추부사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앙(子昻), 호는 몽촌(夢村)·석릉(石陵). 증조할아버지는 김희수(金希壽)이고, 할아버지는 김로(金魯)이다. 아버지는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지낸 김홍도(金弘度)이며, 어머니는 이계백(李繼伯)의 딸이다. 형은 김첨(金瞻)이고,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창녕성씨(昌寧成氏)이다.

[활동사항]

김수(金睟)는 27세 때인 1573년(선조 6) 알성시 병과에 1등으로 급제한 뒤 예문관검열을 거쳐 홍문관교리로 재직하였다. 1583년(선조 16) 변방의 오랑캐가 침입하여 경원부가 함락되자 이조정랑으로서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종사관이 되었다. 1584년(선조 17) 순무어사를 지냈는데, 당시 유학(幼學) 신급(申岌)이 올린 상소에, 조정에서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인물의 하나로 지적되기도 하였다. 1587년(선조 20) 평안감사를 지내고, 1590년(선조 23)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1591년(선조 24) 정철(鄭澈)의 세자 책봉 문제에 대해 옥당에서 탄핵하는 차자(箚子)를 올리려고 할 때, 부제학으로서 사성(司成) 우성전(禹性傳)의 집으로 의논하러 가서 시간이 지연되어 올리지 못하였다. 대사간 홍여순(洪汝諄)우성전을 탄핵하면서 남인과 북인으로 분리되자 남인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경상우감사로서 진주에 있다가 동래가 함락되자 밀양과 가야를 거쳐 거창으로 도망을 가는 등 방어에 힘쓰지 않았다. 전라감사 이광(李洸)과 충청감사 윤국형(尹國馨)이 근왕병(勤王兵) 을 일으키자, 비로소 1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가하였다. 근왕병이 경기도 용인에서 패하자 경상우도로 돌아가던 중 영남초유사 김성일(金誠一)로부터 패전에 대한 질책을 받았다.

1592년(선조 25) 한성부판윤이 되었고, 경상도관찰사·지중추부사·승문원제조와 우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1596년(선조 29) 호조판서로서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명나라 군대의 군량을 충당하기 위해 군량 징수에 힘썼다. 1604년(선조 37) 경기감사 때 방납(防納)의 폐단을 고칠 것을 건의하였고, 사헌부지평과 판중추부사, 동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1606년(선조 40)에는 호조판서와 오위도총부총관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대에도 호조판서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나, 1613년(광해군 5) 손자인 김비(金秘)가 무고로 옥사할 때 탄핵을 받고 삭직을 당하였다. 일찍이 호조판서로서 임진왜란 때 치적을 올려 수십 년 이래의 호조판서 중에서 으뜸으로 꼽혔다. 말년에는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청백리로 뽑혔다.

[저술 및 작품]

홍문관교리로 재직할 때 선조의 명으로 『십구사략(十九史略)』을 개수하였다. 저서로 『몽촌집(夢村集)』이 있다. 성균관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근묵(槿墨)』에서 그의 필체를 찾아볼 수 있다.

[묘소]

묘소는 지금의 경기도 부천시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지역은 조선시대 구로 지역을 포함하여 부평도호부에 속하였다. 묘역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상단에 김수의 묘로 추정되는 1기가 있고, 하단에 4기의 묘가 있다. 상석과 향로석, 문인석과 망주석, 동자상 등의 석물이 있다. 『안동김씨대동보(安東金氏大同譜)』에는 김수의 묘소가 경기도 부천시 오정면 고강간좌(古康艮座)에 자리하고 있으며,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찬한 신도비와 함께 세워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이 신도비는 찾아볼 수 없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소의(昭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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