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2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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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明魯勤 |
영어공식명칭 | Myeong Nogeu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선화 |
출생 시기/일시 | 1932년 - 명노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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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39~1945년 - 명노근 광주서정공립심상소학교 입학 및 졸업 |
수학 시기/일시 | 1945~1951년 - 명노근 숭일학교 입학 및 졸업 |
수학 시기/일시 | 1953~1957년 - 명노근 전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입학 및 졸업 |
수학 시기/일시 | 1957~1960년 - 명노근 전남대학교 대학원 영문학 석사 과정 |
활동 시기/일시 | 1961년 - 명노근 광주YMCA 이사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65~1978년 - 명노근 전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전임강사 및 정교수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77년 - 명노근 국제사면위원회 광주지부 이사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78년 6월 - 명노근 외 10명 전남대학교 교수 '우리의 교육지표' 발표 |
활동 시기/일시 | 1978년 - 명노근 전남대학교 교수 해직 |
활동 시기/일시 | 1980년 - 명노근 전남대학교 교수 복직 |
활동 시기/일시 | 1980년 5월 - 명노근 5.18민주화운동 수습대책위원회 위원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2000년 - 명노근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3년 - 전남대학교 선정 제7회 용봉인 영예대상 수상 |
추모 시기/일시 | 2007년 - 명노근선생 기념사업회 설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0년 - 국립5.18민주묘지 안장 |
출생지 |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읍 |
학교|수학지 | 광주대성초등학교 - 광주광역시 남구 서동로2번길 8[서동 111] |
학교|수학지 | 광주숭일중학교 - 광주광역시 북구 모룡대길 40[일곡동 46-24] |
학교|수학지 | 전남대학교 -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로 77[용봉동 300] |
학교|수학지 | 미시간주립대학교 - 미국 미시간주 이스트랜싱 |
묘소 | 국립5.18민주묘지 - 광주광역시 북구 민주로 200[운정동 563] |
성격 | 교육자|민주화운동 관련자 |
성별 | 남 |
본관 | 연안 |
대표 경력 | 전남대학교 교수|국제사면위원회 광주지부 이사|광주YMCA 이사 |
[정의]
전라남도 광주시 출신으로 유신독재와 신군부에 반대하여 민주화운동과 사회운동을 펼친 교육자.
[개설]
명노근(明魯勤)[1932~2000]은 1932년 9월 연안명씨(延安明氏) 명동열과 창녕조씨(昌寧曺氏) 조말례 사이에 5남 5녀 중 4남으로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읍[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 농성동]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죽산안씨(竹山安氏) 안기만과 진주정씨(晉州鄭氏) 정인용의 딸 안성례와 결혼하였다.
1945년 광주서정공립심상소학교[지금의 광주대성초등학교], 1951년 숭일학교[지금의 광주숭일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하는 대신 미군 제5공군 822항공 공병대대 한국인 노무처에 고용인으로 취직하여 영어를 익혔다. 1953년 전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하고 석사과정 중 결혼하였다. 1965년 전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전임강사가 된 뒤로 1978년까지 영어영문학과 교수로서,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2000년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명노근은 전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1977년 국제사면위원회 광주지부 이사를 맡았다. 1978년 6월 전남대학교에서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이 있었다. 명노근은 전남대학교에 근무하였던 김두진[역사교육학과], 홍승기[역사교육학과], 김정수[영어영문학과], 배영남[영어영문학과], 송기숙[국어국문학과], 안진오[철학과], 이방기[법학과], 김현곤[불어불문학과], 이석연[사학과], 이홍길[사학과]과 함께 국민교육헌장에 대해 비판하는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하였다.
국민교육헌장은 1968년 박정희 정부가 국가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교육 이념을 확립하고자 발표한 것이다. 이에 대한 반대는 박정희 정부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다. 중앙정보부는 서명에 참여한 11명의 교수를 체포하였고, 이들은 모두 해직되었다.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교육지표 사건과 관련된 교수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시위와 집회를 전개하였다. 이때, 전남대학교·조선대학교 학생 500여 명이 연행되어 14명이 구속되었고 10명이 제적되었다.
명노근은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으로 해직된 뒤 20대 후반에 활동하였던 광주YMCA에서 활동하다가 10.26사태 이후에는 '광주YMCA 구국기도회' 사건의 주동자로 505보안부대에 연행되기도 하였다.
1980년 3월 명노근은 전남대학교에 복직되었다. 복직 후 전남대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외치며 연일 시위를 하였다. 5월이 되자 전라남도 광주시는 계엄군에 의한 무자비한 시위 진압으로 민주화 열망은 더욱 격렬해졌다.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명노근은 수습대책위원회 위원으로 억울하게 학살된 시민들에 대한 계엄군의 사과와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계엄군과 협상을 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월 27일 계엄군은 옛 전라남도청을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명노근은 서울특별시로 피신하였다가 6월 25일 체포되었다.
명노근은 군사재판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감형되었다가, 1981년 12월 25일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이후 전국해직교수협의회를 조직하여 이끌었고, 5.18기념재단 등 5.18민주화운동 관련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광주YMCA와 끝까지 함께하였다.
[묘소]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2003년 전남대학교에서 제정한 제7회 용봉인 영예대상을 수상하였으며, 2007년에는 명노근의 사상이 담긴 '명노근선생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