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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 항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733
한자 對蒙抗爭
영어공식명칭 Anti-Mongol Struggl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노성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255년연표보기 - 몽골군 6차 침입(전라도 광주 점거)
종결 시기/일시 1256년 8월연표보기 - 몽골군 철수
발생|시작 장소 전라도 무등산

[정의]

1255년 몽골군의 6차 침입 당시 광주 무등산에 주둔한 차라대(車羅大)의 몽골군이 전라도 일대를 약탈하자 몽골군에 항쟁한 사건.

[개설]

몽골군은 1255년(고종 42) 6차 침입 시 차라대를 앞세워 평안도·황해도·경기도를 거쳐 전라도를 비롯한 광주까지 점거하였다. 담양에 주둔했던 차라대의 군대는 주둔지를 나주로 옮겼다가 무등산 정상으로 옮긴 이후 전라도 일대를 약탈하였다.

[역사적 배경]

13세기 초 중국 대륙의 정세는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족이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면서 금(金)을 정복하여 북중국을 점령하는 등 급박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이때 금의 예하에 있던 거란족의 일부가 몽골에 쫓겨 고려로 침입해 왔다. 고려는 거란족을 반격하여 평양 동쪽의 강동성(江東城)[고려 시대 평양 동쪽, 지금의 강동에 있던 성]에서 포위하였고, 거란족을 추격해 온 몽골 및 두만강 연안의 동진국의 군대와 연합하여 거란족을 토벌하였다. 이후 몽골은 자신들이 거란족을 몰아내 준 은인이라고 내세우면서 지나친 공물을 요구해 왔다.

[경과]

몽골은 고려에 왔던 몽골 사신 일행이 귀국하던 길에 국경지대에서 피살되자 이를 구실로 1231년(고종 18) 고려를 침략하였다. 힘겹게 의주를 점령한 몽골군은 귀주성에서 박서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길을 돌려 개경을 포위하였다. 이에 고려는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몽골군도 큰 소득 없이 물러갔다.

당시 고려의 집권자인 최우(崔瑀)는 몽골의 무리한 조공 요구와 간섭에 반발하여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장기 항전을 위한 방비를 강화하였다. 이에 몽골이 다시 침입해 왔으나 처인성[지금의 경기도 용인]에서 장수 살리타가 김윤후(金允侯)에게 사살되자 퇴각하였다. 이후에도 몽골군의 침략은 4번이나 더 이어지면서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고,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몽골군이 광주까지 들어온 것은 6차 침입 때였다. 몽골 장군 차라대는 1255년(고종 42) 가을, 평안도·황해도·경기도를 짓밟은 후 전라도 광주를 비롯하여 영광·나주·담양 등 전라도 남부 지역까지 점거하였다. 몽골군의 적장 차라대와 고려 왕족인 영령공 왕준(王綧)은 담양에, 고려의 무신이었다가 몽골군의 앞잡이가 된 홍복원(洪福源)은 광주에 주둔하였다. 담양에 주둔했던 차라대는 주둔지를 나주로 옮겼다가 무등산 정상으로 옮겼다. 이후 몽골군은 무등산을 근거지로 삼고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 일대에서 약탈을 자행하였다.

[결과]

몽골군의 무등산 주둔 기간은 길지 않았다. 차라대의 군대가 1255년(고종 42) 가을에 모습을 드러낸 후 다음 해인 1256년(고종 43) 8월에 강화도로 철수하였고, 9월에 몽골로 철수하였다.

[의의와 평가]

몽골군이 손쉽게 전라도 일대를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지역민들의 몽골군에 대한 항쟁이 미미하였기 때문이었다. 광주·전라도인들의 몽골군에 대한 항쟁이 미미하였던 것은 고려 무신정권(武臣政權)과 집권층의 가렴주구(苛斂誅求)[가혹하게 세금을 거두거나 백성의 재물을 억지로 빼앗음]와 수탈이 다른 지역에 비해 극심하였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고려사』에는 “장성 입암산성의 성 안 장정들이 모두 투항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심지어는 무신정권의 가렴주구 때문에 “몽골군이 오는 것을 오히려 기뻐할 정도였다”고 하였다. 당시 최씨 무신정권에 대한 전라도 주민들의 불만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 주는 내용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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