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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방직 광주공장 노동조합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836
한자 全南紡織光州工場勞動組合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광주광역시 북구 경양로 9[임동 100-3]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연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60년 6월연표보기 - 전남방직 광주공장 노동조합 새 집행부 결성
전개 시기/일시 1960년 10월 3일 - 전남방직 광주공장 노동조합 서울 본사로 상경 투쟁
전개 시기/일시 1960년 10월 9일 - 전남방직 광주공장 노동조합 광주로 내려와 노동쟁의 계속 진행
전개 시기/일시 1960년 10월 20일 - 전남방직 광주공장 노동조합 전라남도청 사회과에 노동쟁의 접수
전개 시기/일시 1960년 11월 8일 - 전남방직 광주공장 노동조합 상임집행위원회 개최
발생|시작 장소 전방 광주공장 - 광주광역시 북구 경양로 9[임동 100-3]지도보기

[정의]

1960년 전남방직 광주공장 노동자들이 단체협약 체결 문제를 두고 벌인 노동쟁의.

[역사적 배경]

전남방직 광주공장에서는 1960년 4.19혁명 이후 활발한 노동쟁의가 이루어졌다. 이는 1950년대 임금인상, 노동시간 단축, 근로조건 개선 등을 중심으로 노동쟁의를 전개했던 경험과 4.19혁명 이후 급증한 노동자 투쟁의 분위기가 맞물린 결과였다. 전남방직 노동조합은 1960년 6월, 1일 노동시간을 9시간으로 하고 임금의 56%를 인상하는 등의 내용을 합의한 뒤, 얼마 후에 새로운 노동조합 집행부를 결성하였다. 이는 당시 전국적으로 벌어졌던 '어용노조 규탄 데모'와 직접 연관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다만, 이전의 집행부가 조합원들로부터 불신임을 받았던 것에 비해, 새로 결성된 집행부는 10월부터 적극적으로 노동쟁의를 진행해 나갔다.

[경과]

1960년 10월 3일, 전남방직 광주공장 노동조합은 새로 결성된 집행부를 포함한 133명이 모여 '한국전쟁 이전 전남방직이 국영에서 민영으로 불하될 때 장기근속자들에게 약속한 공로주(功勞株) 1할의 배당을 이행할 것', '한국전쟁 당시 지급되지 않은 1개월의 임금을 지불할 것' 등을 주장하며 서울 본사로 상경 투쟁을 벌였다. 이에 전남방직은 지급되지 않은 1개월의 임금 지불만 수용하고, 나머지 요구들에 대해서는 법적 근거가 없다며 거절하였다. 그리고 항의하는 노동자들을 공권력을 동원해 강제 해산시켰다.

서울로 상경 투쟁을 벌였던 120여 명의 노동자들은 10월 9일 광주로 내려와 노동쟁의를 계속하였다. 이들은 경영상황 공개, 인사문제 사전 통고, 퇴직수당 대상 확대, 군복무 후 복직 보장, 특근수당 증액, 휴일 및 여성노동자의 생리휴가 확대, 8시간 노동제 실시, 작업복 2벌 지급, 중식 제공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근로조건 개선과 단체협약 체결을 요구하였다. 10월 20일에는 전라남도청 사회과에 노동쟁의를 접수하였으며, 이후 1주일 동안 파업을 단행하였다. 11월 8일에는 상임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11월 10일까지 단체협약 체결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3일 간의 선전기간을 두고 투쟁태세를 강화하자고 결의하기도 하였다.

[결과]

여러 차례의 노동쟁의 끝에 단체협약이 체결되었으며, 전남방직은 노동조합에 약 1천만 환을 지급하였다. 노동조합 측은 이를 대의원대회를 통해 분배하였으며, 그 가운데 5%는 4월혁명 희생자 위로금으로 기탁했으며, 광주서림국민학교[지금의 광주서림초등학교]에 쌀과 문구류를 기증하기도 하였다.

전남방직은 1961년 4월 일신방직과 전남방직으로 분할되었으며, 전남방직은 1970년 상호명을 전방(全紡)으로 바꾸었다. 전방과 일신방직 두 회사 모두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동공단에 2007년[일신방직]과 2011년[전방] 공장을 준공하여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섬유산업의 쇠퇴와 경영환경의 변화로 2017년 전방 임동 공장이 가동 중단되었고, 2020년에는 일신방직 임동 공장도 가동 중단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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