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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122
한자 李麟佐-亂
영어의미역 Rebellion of Yi Injwa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해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728년 3월 15일연표보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28년 6월연표보기
성격 반란 사건
관련 인물/단체 이인좌|이명근|김중원|정만욱|조영하|서명창|신경섭|김석후|김성준|서선원|서상항|강여주

[정의]

조선 후기 이인좌(李麟佐) 등의 소론을 중심으로 일어난 정권 탈취 사건. 경상남도 하동군의 여러 관리가 진압 공신으로 등재되었다.

[역사적 배경]

조선 경종(景宗) 연간에 소론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노론과의 대립에서 일단 승리하였으나, 노론이 지지한 영조(英祖)가 즉위하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소론의 과격파들은 영조숙종(肅宗)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죽음에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여기에 남인들도 일부 가담하였다. 한편 이들의 거병에는 유민(流民)의 증가, 도적의 치성(熾盛), 기층 민중의 저항적 분위기가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경과]

이인좌의 난은 1728년(영조 4)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함으로써 촉발되었다. 이인좌를 대원수로 한 반군은 청주를 거쳐 한양으로 북상하였으나 24일에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 격파되었고, 청주성에 남은 세력도 상당성에서 박민웅(朴敏雄) 등의 창의군에 의해 무너졌다. 영남에서는 정온의 4세손인 정희량(鄭希亮)이 거병하여 안음·거창·합천·함양을 점령하였으나 경상도관찰사가 지휘하는 관군에 의해 토벌되었다.

[결과]

정희량의 난이 진압된 후 하동에서는 이명근(李命根)이 정희량의 반군과 연결되어 괘서에 동참하였다는 경상우병사 이여적의 장계가 조정에 이르렀다. 이명근은 1728년 6월 국청에 잡혀와 국문을 당하였고, 이듬해 반군에 동참하였음을 자복하였으며 형장을 맞아 죽음을 당하였다. 한편, 1930년에 간행된 『하동지속수(河東誌續修)』에는 무신의 난 진압 후 양무공신(揚武功臣) 녹권에 참여한 인물로 김중원(金重元)·정만욱(鄭萬旭)·조영하(曺永河)·서명창(徐命昌)·신경섭(申景涉)·김석후(金碩垕)·김성준(金聖駿)·서선원(徐善遠)·서상항(徐尙恒)·강여주(姜汝柱) 같은 하동 지역의 인물이 재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는 소론 정권이 앞장섰으나 주모자의 대부분이 소론이었기 때문에 이후 노론의 권력 장악이 가속화하였고 소론은 재기 불능 상태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정부에서는 지방 세력을 억누르는 정책을 강화하였고 토착 세력에 대한 수령들의 권한이 커졌다. 한편 영조 즉위 초부터 주창되어 온 탕평책의 실시는 그 명분을 더욱 굳힐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왕권의 강화와 정국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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