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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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學汝女慶州金氏 |
영어의미역 | Gim Hakyeo's Doughter Gyeongju Gim Clan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고절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난희 |
출생 시기/일시 | 189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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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1년 |
거주|이주지 |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고절리 |
성격 | 효부|열녀 |
성별 | 여 |
본관 | 경주 |
[정의]
일제 강점기 하동의 효부이자 열녀.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수은(樹隱) 김충한(金沖漢)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김학여(金學汝)이다. 남편은 본관이 김해(金海)인 김경수(金京秀)로, 모암(慕庵) 김극일(金克一)[1382~1456]의 13세손이다. 시아버지는 김국욱(金國旭)이다.
[활동 사항]
김학여의 딸 경주 김씨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얌전하고 정숙했으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해 집안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었다. 18세에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고절리에 사는 김경수에게 시집을 갔는데, 혼례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우연히 집을 나가 다른 나라로 가 버렸다. 이후 2년여 동안은 간혹 서신이 있다가 소식이 끊겨서 죽은 줄 알고 20여 년 동안 제사를 지냈다. 본래 집은 가난하였고 빚은 산더미 같았으며, 연로하여 일을 하지 못하는 시어머니와 포대기에서 배고파 우는 1남 1녀의 자식만 있었다.
경주 김씨는 낮에는 품을 팔고 밤에는 베를 짜서 음식과 의복을 봉양하고 빚을 변상하였다. 이윽고 시어머니가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시자, 기일마다 목욕재계하고 지극 정성으로 받들었다. 또한 어려움 속에서도 자녀를 바르게 가르치고, 의지할 데 없는 조카를 친자식처럼 거두었다. 생이별한 한(恨)이 기억에 사무쳤으나 색(色)에 조금도 미동됨이 없이 절조를 지키고 더욱더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였다.
1944년 8월, 뜻밖에도 남편이 돌아왔으나 다음 해에 기이한 병에 걸렸다. 치료를 해도 효과가 없자 경주 김씨는 밤낮으로 남편을 돌보며 하늘에 빌었으나 끝내 남편이 죽었다. 바로 따라 죽으려고 하다가 문득 ‘내가 내 뜻대로 먼저 가 버리면 제사는 누가 지낼 것인가!’ 하고, 원통함을 참고 예를 갖추어 장사 지내고 3년상을 치렀다. 상을 치르고도 남은 슬픔이 항상 가득하여, 늙어서까지 매년 기일에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
[상훈과 추모]
마을 사람들과 사림(士林)에서 김학여의 딸 경주 김씨의 효열을 기리고자 했으나, 세속이 변하여 국가적인 포전도 받지 못하고 기록으로도 남기지 못해 행적이 거의 사라질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효부의 훌륭한 행적이 후대에 전해지지 않을까 두려워한 아들 김용건(金容建)이 1964년 김용호(金龍鎬)에게 비문을 의뢰하여 그 행적을 남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