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4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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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地異山行記-南周獻- |
영어의미역 | Record of Sighseeing at Jirisan Mountai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정화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6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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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821년 |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807년 |
성격 | 한문학|유람록 |
작가 | 남주헌(南周獻)[1769~1821] |
[정의]
1807년 의재 남주헌이 경상남도 하동군의 청학동과 지리산 천왕봉을 유람하고 지은 유람록.
[개설]
「지리산행기(地異山行記)」는 남주헌(南周獻)[1769~1821]의 『의재집(宜齋集)』 권11에 수록되어 있다. 남주헌은 함양군수로 재임하던 1807년(순조7) 3월 24일부터 4월 1일까지 9일 동안 지리산[1,915m]을 유람하였는데, 이때 「지리산행기」를 지었다. 동행은 경상도관찰사 윤광안(尹光顔), 진주목사 이낙수(李洛秀), 산청현감 정유순(鄭有淳)이다.
남주헌의 자는 문보(文甫), 호는 의재(宜齋),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남공보(南公輔)의 손자이다. 1798년(정조 22) 사마시에 합격한 후 호조좌랑(戶曹佐郞) 등을 거쳐, 함양·무주·남원·임천(林川)의 수령 등 주로 외직을 역임하면서 치적을 남겼다. 특히 1808년(순조 8) 함양군수로 재직 시 암행어사에 의하여 치적이 보고되어 승차하였고, 1810년(순조 10) 남원현감으로 있으면서 굶주린 백성들의 진휼에 힘쓴 공으로 표창을 받았다.
이후 사간원·사헌부·홍문관·규장각·세자시강원 등의 주요 내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1819년(순조 19)에는 왕세자 관례(冠禮)에 선교관(宣敎官)으로 참여한 공을 인정받아 당상관이 되었다. 그 뒤 형조참의에 임명되고 승지를 거쳐 춘천부사를 끝으로 사직하였다. 문장과 시부(詩賦)에 뛰어났으며, 저술로 『의재집』이 있다.
[구성]
유람 일정에 따른 산문 형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구체적 유람 일정은 동행자가 현직 관원이었기에 각각의 부임지를 들러서 합류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경상남도 함양을 출발하여 산청에서 정유순과 합류하고, 진주에서 이낙수와 관찰사 윤광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 하동→화개→쌍계사(雙磎寺)→불일암(佛日庵)→칠불암을 구경하고, 영신대를 거쳐 천왕봉에 오르고, 백무동과 군자사를 거쳐 관아로 귀가하였다.
[내용]
함양군수로 부임한 이듬해 관찰사의 권유로 유람을 시작하였다. 남주헌은 한양 사람이라 하나, 산청과는 벌써부터 인연을 갖고 있었다. 산청 환아정(換鵝亭)을 여러 차례 올라 보았다고 하였고, 단성의 신안정사(新安精舍) 유생들이 이전에 자신을 원장으로 추대하려 하였음을 상기하고 찾아가 해후하였다.
남주헌 일행은 현직 관료였던 만큼 유람 도중 접하는 현지 실정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였다. 하동읍치에 들러 가구 수를 살피고, 그곳 백성들은 죽순, 왕골, 생선, 소금 등의 수입으로 생계 수단을 삼는다고 하였다.
남주헌 일행의 유람은 현재 발굴된 지리산[1,915m] 유람록 중 가장 화려하면서도 성대한 유람이다. 남주헌의 기록에 의하면, 일행들은 하동 섬진강에서 배를 타고 화개 쌍계사로 향하였는데, 화개에 닿았을 때는 마침 장날이었다. 남주헌 일행은 2척의 배를 묶어 만든 화려한 누각에서 온갖 물산이 교류하는 화개장터를 내려다보았고, 반면 장터에 나온 사람들은 남주헌 일행을 신선인 양 쳐다보았다고 하였다. 남주헌 일행은 요리사, 악공, 짐꾼 등 400여 명과 하인 1,000여 명을 대동하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져 섬진강 가에 배를 정박시키고 뱃전에 등불을 걸었는데, 남주헌은 당시의 상황을 “나룻가에 나열된 수백 개의 횃불로 인해 불빛이 하늘에까지 미치고 그림자가 물속에 잠겼으며, 별빛처럼 총총히 늘어서고 용의 비늘처럼 번득거렸다”는 말로 표현하였다.
남주헌 일행의 화려한 유람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칠불사(七佛寺)를 출발하여 영신대로 향할 때 민가가 나타나지 않자 관찰사의 점심식사를 마련하기 위해 민가 몇 채를 임시로 지었으며, 관찰사의 천왕봉 등정을 위해 지리산 꼭대기에 임시 처소를 마련하였다. 주로 함양군의 백성들을 동원하였고, 이러한 일은 지난 60여 년 동안 세 차례나 있었다고 언급하였다. 남주헌과 같은 날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던 하익범(河益範)[1767~1815]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 의하면, 관찰사의 숙소에는 온돌방, 회의실, 수선실, 부엌 등이 일체 완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남주헌은 문장에 뛰어나고, 또한 한양에서 나고 성장한 인물이었기에 남쪽 지방에서 보는 새로운 물건과 현상을 생동감 있게 잘 묘사하고 있다. 「지리산행기」는 최고의 현직 관료가 유람하는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나아가 19세기 초반 지리산 천왕봉 일대의 상황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또한 유람자의 현실적 기반과 지리산 유람과의 연관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