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00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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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山璹 |
영어음역 | Yang Sansu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장경준 |
[정의]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회원(會元). 기묘명현(己卯名賢) 양팽손(梁彭孫)의 후손이며, 대사성을 지낸 양응정(梁應鼎)의 아들이다.
[생애]
1561(명종 16)에 태어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경서(經書)에만 전심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과 끝까지 항전하다가 진주성전투에서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고 한다.
[활동사항]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주에서 창의(倡義)하여, 김천일(金千鎰)을 맹주(盟主)로 삼고 양산숙은 부장이 되었다. 그 뒤 김천일과 함께 북상하여 수원에 출진하여 활약하다가 강화도로 이진할 무렵, 곽현(郭賢)과 함께 주장의 밀서를 가지고 해로를 통해 의주 행궁(行宮)에 도착하여 선조에게 호남·영남의 정세와 창의활동을 자세히 보고하였다. 이 공으로 공조좌랑에 제수되었다. 돌아올 때 호남·영남에 보내는 교서를 받아 남도에 조명(朝命)을 하달하였다. 적이 남도로 퇴각하자 김천일과 함께 남하하여 진주성에 들어갔으나 침공하려는 왜의 대군 앞에 군사가 부족하자 명나라 장군 유정(劉廷)의 군진에 가서 군원을 강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할 수 없이 단신으로 입성하여 적과 끝까지 항전하다가 김천일과 함께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고 한다.
[학문과 사상]
성혼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천문·지리·병학에도 뛰어났다. 동서분당 때 서인으로 조헌(趙憲)과 함께 이이(李珥)·성혼을 지지하며 동인 이산해(李山海)·유성룡(柳成龍)을 배격하는 소를 올렸다.
[상훈과 추모]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나주의 정렬사(旌烈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