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00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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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命允 |
영어음역 | Yi Myeongyun |
이칭/별칭 | 안호(安湖),치백(致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편세영 |
[개설]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치백(致伯), 호는 안호(安湖). 정종의 열째아들 덕천군(德泉君)의 13대손이며, 이집(李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기항(李基恒)이고, 아버지는 이완길(李完吉)이며, 어머니는 박세현(朴世炫)의 딸이다.
[생애]
경상도 진주 출생으로, 1838년(헌종 4) 문과에 급제하여 승무원 부정자가 된 이후 휘릉(徽陵) 별검,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정언을 지냈다. 철종 대에는 홍문관의 부수찬·부교리를 거쳐 1858년(철종 9) 교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향리에 머물렀다.
1862년, 중앙 관인 출신인데도 도결(都結)과 통환(統還)의 부세를 부과 받은 것에 불만을 느끼던 차에, 민란을 주도하던 몰락한 양반 지식인 유계춘(柳繼春)과 접촉하고 부당한 부세에 대한 사족들의 항의 의견을 모으기 위한 도회(都會)를 준비하였다.
그 후 유계춘이 일반농민·소상인들을 모아 봉기단계로 들어감에 따라 관계를 끊었지만, 초군(樵軍)들이 집단 시위를 시작하자 진주목사에게 그들의 의견을 전달하여 도결을 혁파하는 증서를 발급하게 하였다. 관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인해 초군들의 지지를 받았을 뿐 아니라 배후 조종자로 소문이 나 있었으므로 사태를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었고, 목사에게서도 치하를 들었다.
그러나 안핵사 박규수(朴珪壽)의 보고로 전라도 강진현(康津縣)의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그 내용은, 첫째 초군(樵軍)이 진주 읍내에 진입할 때 그도 읍내에 들어갔고, 둘째 초군이 읍내에 들어갈 때 일반 양반들에게 닥치는 대로 폭행을 가해 도로에 내왕조차 할 수가 없었으나 그에게만은 일제히 길을 열어주어 경의를 표했고, 셋째 초군들이 일반 양반이나 이서(吏胥)들의 가옥은 습격해 파괴했으나 그의 집만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피무사실(被誣事實)」을 짓는 등 억울함을 호소한 끝에 이듬해 특사령(特赦令)이 내려졌으나, 특사가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