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03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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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尙右兵營 |
영어의미역 | Right Gyeongsang Military Camp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정용 |
[정의]
조선시대 경상우도의 병무를 관할하던 관서.
[제정배경 및 목적]
조선 전기에는 경상도에 3명의 병마절도사(병사)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관찰사가 겸임했다. 그리고 낙동강을 기준삼아 경상도를 동서로 나눈 군사구역으로서 좌도와 우도를 설정해 좌병사의 병영은 울산에 두고 우병사의 병영은 창원의 합포(지금의 마산)에 두었다.
우병영이 있던 합포영이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분탕되면서 병영이 둘만한 자리가 못되기 때문에 이전하자는 의견이 임진왜란 직후부터 제기되었다. 결국 그 대상지로 형세가 험하다고 평가되는 진주의 촉석성이 적임지로 거론되면서 마침내 1602년(선조 35) 진주 이전이 결정되었다. 진주성에 설치된 우병영은 철저히 군사적인 구조로 배치되어 유사시를 대비하고자 하였다.
[제정경위]
당시 우병사였던 이빈의 장계와 그 이듬해 체찰사 이덕형의 계청에 의해 우병영의 진주 이전이 결정되었다.
[관련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조선 태종 때 창원에 설치된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영(兵馬節度營)을 1603년에 촉석성(진주성)으로 옮겼는데 앞에는 남강이 있어 그곳을 우병영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상우병영의 모습은 영조 때 완성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잘 나와 있는데 당시 진주성 내의 여러 시설물들을 볼 수가 있어서 내외성 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변천]
경상우병영이 진주로 이전된 후 우병마절도사(무관 종2품)로 하여금 진주목의 목사(문관 정3품)를 겸임하게 함으로써 진주목사를 따로 발령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우병사를 도와 진주 고을의 일을 전담할 판관(종5품)을 두기로 하였다. 이 때 부터 우병사를 ‘진주병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문명의 고장’인 진주에 무관이 와서 고을을 다스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에 따라 1635년(인조 13)에 병사가 목사를 겸하는 조치를 폐지하고 다시 목사를 파견해 우병영과 진주목의 업무를 분리했다. 그 후 우병영은 그대로 진주성내에 위치하면서 경상우도의 병무 중심지와 영남 서부의 방어 기지로서 조선 말기 까지 존속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성립된 김홍집 내각에 의해 1894년 7월 15일 각도의 병영 혁파와 함께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