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06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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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盧應奎 |
영어음역 | No Eunggyu |
이칭/별칭 | 경오(景五),성오(聖五),신암(愼菴)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문옥상 |
[정의]
조선 말기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성오(聖五)·경오(景五), 호는 신암(愼菴). 아버지는 노이선(盧以善)이며, 어머니는 팔계정씨이다.
[생애]
1861년(철종 12) 거창에서 노이선의 차남으로 태어나 안의에서 성장하였다. 기호(畿湖) 유림의 거장 성재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송병선(宋秉璿)·최익현(崔益鉉)·송근수(宋近洙) 등을 사사하였다.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이듬해 1월 의병을 일으켜 진주의진(晋州義陣)의 창의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3월 고종황제의 명을 받아 의병을 해산하고 상경하여 1902년 규장각주사,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동궁시종관을 역임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듬해 11월 벼슬을 버리고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체포되어 1907년 향년 47세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활동사항]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1896년 1월 용추암 승려 서재기(徐再起) 등과 동지를 규합하여 진주성에 잠입하여 성을 점거하였다. 이에 진주 군민들도 적극 호응하여 진주 출신 정한용(鄭漢鎔)을 본주의병장으로 추대하여 협력토록 하였다.
이로써 노응규는 진주의진의 의병장이 되어 나라의 원수에 대한 보복과 친일세력의 척결, 위정척사, 국권회복을 명분으로 봉기하여 관군으로 편성된 의병 진압군을 수차례 물리치기도 하였고, 부산 점거를 위하여 김해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듬해 11월 의병을 일으켜 충북 황간지역에서 투쟁하다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묘소]
충청남도 서천군 종천면 종천리 고량산에 노응규의 묘가 있다. 노응규의 묘가 출생지나 성장지, 혹은 세거지도 아닌 이곳에 소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