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0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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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慕齋實記 |
영어의미역 | Records of Mojae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가좌동 900[진주대로 501] 경상대학교 문천각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한갑진 |
성격 | 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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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인물 | 정용균(鄭龍均) |
편자 | 정상태(鄭相泰) |
권수 | 2권 |
책수 | 1책 |
판종 | 필사체영인판(筆寫體影印版) |
세로 | 27㎝ |
장정법 | 선장(線裝) |
행수 | 10행 |
한 행의 자수 | 20자 |
소장처 | 경상대학교 문천각 |
소장처 주소 | 경상남도 진주시 가좌동 900번지[진주대로 501] |
[정의]
조선 말기의 효자 정용균(鄭龍均)[1838~1871]의 실기(實記)를 기록하여 편찬한 문집.
[개설]
정용균의 자는 윤원(允元)이며, 호는 모재(慕齋)로서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침착하고 진중하여 학문하기 좋아하여 성현을 본받고자 하였다. 정용균은 특히 어버이를 섬김에 효를 다하였다. ‘모친이 학질을 앓아 병이 깊어 해를 넘기자 새벽마다 하늘에 빌었는데, 하늘이 감복하여 홀연히 매가 날아와 메추리를 떨어뜨리기를 세 번이나 하였고, 이를 고아서 모친을 봉양하니 그 병이 완쾌되었다’고 전한다.
그가 34세에 병을 얻어 죽게 되자 마을 사람들이 장계(狀啓)를 올렸고, 1882년(고종 19) 사헌부 감찰로 추증(追贈), 정려(旌閭)되었다. 『모재실기』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편찬/발간경위]
정용균이 죽은 후, 그의 증손인 정상태(鄭相泰)가 그의 시, 연보, 효행의 사실 등을 기록한 전(傳)과 정려교지(旌閭敎旨)를 모아 엮었다.
[구성]
『모재실기』는 2권 1책으로, 1권에는 진산(晋山) 하겸진(河謙鎭)의 권두서가 있으며, 연보가 실려 있다. 그리고 시골에서의 열두 달을 읊은 시 「전가사시십이월음(田家四時十二月吟)」 및 10수의 시가 있다.
2권에는 부록으로 만장(晩章), 제문(祭文)과 정용균의 효행을 포상하여 정려를 세워 달라고 암행어사에게 건의한 마을 사람들의 연판장, 효자 정려를 결정하는 예조입안(禮曹立案)과 교지, 정려기(旌閭記), 유사(遺事), 행장(行狀), 묘갈명(墓碣銘), 묘지명(墓誌銘), 「정효자전(鄭孝子傳)」이 실려 있다. 또한 말미에는 증손인 정상태의 발문(跋文)이 있다.
[의의와 평가]
『모재실기』에는 향촌에서 효자에 대한 인식과 이를 정려할 것을 중앙정부에 건의하는 연서장계 및 예조입안, 교지 등 문서가 실려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