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09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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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民俗工藝 |
영어음역 | minsok gongye |
영어의미역 | folkcraft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성석 |
[정의]
각 지역마다 전승되어 온 전통적 기법과 그 고장 산물을 이용하여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조형예술.
[개설]
민속공예를 통해서 만들어진 물건을 민속공예품 또는 민예품(民藝品)이라 한다. 가장 오래 된 형태는 원시공예(原始工藝)이다. 유적에서 출토되는 구석기는 공구적(工具的) 성격이 짙어 이것을 공예라 부르기는 어려우며, 참다운 공예는 신석기시대에 토기가 등장하면서부터라 할 수 있다.
원시공예의 주체는 석기·토기, 이어서 목기가 있고 간혹 철기도 출토되고 있으며, 편물(編物)·피혁품·수피가공품(樹皮加工品) 등도 발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공예품으로는 금속기(金屬器)·직물·염직물·유리 등이 있으며, 녹로(轆轤) 기타 공구가 학문의 발달과 함께 다양하게 나타나고, 정주생활(定住生活)에 따라 기물(器物)의 종류가 풍부해졌다. 한편 신분제도에 의한 직제가 시작되어 여러 종류의 공장(工匠)이 나타나고 공예품과 조세(租稅)가 관련을 갖게 되지만, 일용품은 원시공예를 계승하여 여전히 자가 제품이 많이 차지하였다.
중세에도 고대공예의 성격이 계승되었으며, 종교의식에 속하는 제기(祭器) 등이 발달하였다. 중세 말기가 되면서 전문직에 의한 횡적(橫的) 조직이 강화되어 공동체적인 계(契)가 출현하고 민예품도 상품으로 시중에 유통되기도 하였다. 사회적으로는 개인의 자아의식이 높아지고 회화·조각 등이 그 지위를 굳히게 되며 다기(茶器)와 같은 관상용 민예품이 나타난다. 민속공예가 확실한 형태를 취하기 시작한 것은 중세 후반부터라 할 수 있다.
근세에 이르자 미술공예가 일어나 귀족공예와도 같은 부유층을 위한 귀족적 공예가 시작되는 한편, 경제의 발달과 함께 상품적 성격이 강해지고, 도자기·금속공예·목공·피혁 등 전문제품이 급격히 증가하였으나, 직물·편물 등은 여전히 자가 제품이 많았다. 이리하여 직업의 분화가 현저해지고 대중의 생활이 복잡해짐에 따라 대중 자체의 생활문화를 구축하면서 오늘날의 민예품으로 이어진다.
즉 민속공예품은 서민적 문화유산인 고(古)민예품과, 고민예품의 장점을 현대생활에 연장·적응시킨 신작민예품으로 나눌 수 있다. 농·어민이 여가를 이용하여 자기 손으로 생활도구나 장식품을 만들어 자기 집에서 쓰고 남는 것을 싼 값에 팔거나 물물교환을 하던 것이 민속공예의 원형이며, 여기에서 파생하여 각 장인(匠人)의 손으로 이루어지던 물건을 고민예품이라 할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 그 소박한 미(美)가 많은 사람들의 기호에 맞게 되자, 민속공예는 일반화하여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었고, 각기 그 전통에 바탕을 둔 신작민예품이 양산되었다.
[진주의 민속공예]
1. 목공예(소목장)
경상남도지방의 진주나 충무는 예부터 상, 장, 농 등의 가구 또는 나전칠기로 유명하여 궁실에서 쓰이는 함이나 장 같은 가구류를 이곳에서 만들어 진상하였다고 한다. 이 지방에서 생산되는 괴목, 오동, 가죽나무, 흑시목 등 좋은 재목이 풍부하고 장인들의 솜씨가 뛰어나므로 진주지방에서 만들어지는 목공예품은 다른 지방보다 뛰어나다. 옛날부터 살림살이나 의류를 넣어두기 위해 만든 상자나 궤짝 종류가 발달하여 장롱, 찬장, 지함 등이 만들어지고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가구도 여러 가지 형태로 변천되면서 공예품으로서의 전통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사에서부터 조선시대의 각종 자료에 보이고 있으며, 조선시대에 제작된 전통가구 유품은 지금도 많이 전하고 있다.
특히 진주의 소목은 대목에 대비되어 집안에 소용되는 가구나 기타 나무를 이용한 물품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을 제작하는 사람을 소목장이라 한다. 소목에 주로 사용되는 나무는 전통가구의 특징과 용도를 감안하여 널리 쓰인 것이 기목(느티나무), 가죽나무, 흑시(먹감나무), 오동나무, 대추나무, 소나무, 돌배나무, 소태나무, 살구나무, 은행나무 등이다. 이 목재들은 나무의 특성에 따라서 뼈대목(돌배나무, 가죽, 기목, 소나무, 살구나무), 판목(기목, 소나무, 오동나무), 무늬목(기목, 먹감)으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진주의 목공예품들은 우리나라 전래의 전통을 계승한 진주의 목공예는 나무가 지닌 자연적 색상과 무늬 등을 접목하고 상감기법 등으로 제작한 조각 공예품과 전통문양을 현대인의 기호에 알맞게 제작한 생활 공예품으로 장인들의 목공예 솜씨의 진수를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진주에는 고 정돈산[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 : 1939~1992]씨가 대구 출신 박도희의 공방에서 기능을 30년 간 익혀서 1991년 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인정받고 세 명의 전수생을 길러내었다. 지금은 그의 아들인 정권석 씨와 김병수, 정진호가 이수자로 활동 중이다.
오늘날 진주의 목공예의 우수성은 경남도 공예품 경진대회에서 입증되고 있다. 생산제품으로는 기목장농, 이(삼)층장, 반닫이, 애기장, 경상, 소반, 문갑, 찻상, 장기판, 괴목 등이 있으며 용도는 장식 및 생활용품이 주를 이룬다. 현재 15개 이상의 사업장에서 제작, 판매하고 있다.
2. 도자기
도자기는 예로부터 우리생활의 일부분으로서 함께 하였으며, 현재는 도자기 제품의 대중화를 위해 전통기술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감각을 가미하여 자완, 분청자기, 반상기, 찬기세트, 다기세트 등 실용적인 생활용품을 보급하고 있으며 고유의 전통기술의 계승과 국제화에도 기여하고 있다. 5개의 사업체에서 진주 도자기를 구매할 수 있다.
3. 금속공예
1) 장도장(粧刀匠), 은장도
우리나라에서는 장도(粧刀)를 남녀 구별 없이 호신과 장식 겸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오랜 전통이다. 허리띠나 옷고름에 노리개와 함께 달아 차고 다니기 때문에 패도(佩刀) 라고도 하고 장도(粧刀)중에서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것을 낭도(囊刀)라고 한다. 이 칼을 만드는 장인을 장도장(粧刀匠)이라 한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경공장(京工匠)으로서 상의원 (尙衣院)에 소속된 6명의 장인이 왕실용의 장도(粧刀)를 전담하여 제작하였고 일반 백성 사이에 널리 사용되었던 민수용은 울산, 울진, 영주, 곡성 등지에 분포되었던 사장(私匠)들에 의하여 충당되었다. 장도장(粧刀匠)도 본래 도자장(刀子匠)으로 분류되었으나 근래에는 환도(還刀)등 일반 도검류를 만드는 장인과 구분 하여 장도장(粧刀匠)이라 일컫는다. 기능보유자인 임차출은 장도의 명산지인 울산(蔚山) 병영(兵營) 출신으로 형인 장도장 임인출(林仁出)의 공방에서 어릴 때부터 기능을 익혀 그곳에서 장도를 제작하다가 진주로 이사하여 공방을 차리고 주로 은장도를 만들고 있다. 그는 장도의 도신(刀身)을 벼르는 기법과 전통적인 문양을 은조각하는 솜씨가 능한 보기 드문 민속공예 기능의 전승자라 할 수 있다.
장도장은 현재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0호로, 고려시대부터 전승되었으며 진주시의 대표적인 금속공예품이다. 주로 부녀자들의 소장품으로 사용되어 왔다. 칼날은 정성을 쏟아 수없이 불에 달구어 단단하게 하고 칼자국과 칼집은 금, 은 , 옥 등으로 장식을 더하였다. 은장도는 지금에 와서 단순한 장식용으로만 사용되지만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규방부인에게는 정절을, 고관에게는 음식의 독으로부터 목숨을 지켜주던 도구였다.
진주의 장도장은 1969년 울산(울산병영은 예로부터 철의 생산지로 무기를 많이 제작했다)에서 진주에 온 임차출(경상남도 무형문화재)로부터 계승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능보유자 임차출에게서 장남인 임장식으로 대를 이으면서 장인의 길을 걷고 있는데 제작 기법도 전통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은장도, 목장도, 오동장도 등 장도의 수십 가지 종류를 제작하는 기능을 보유하고 전승하고 있으며, 장도의 생명인 칼날을 벼르는 솜씨와 전통적인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2) 연관(煙菅)
연관장이란 장죽(長竹: 긴 담뱃대) 만드는 기능을 말한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약 550년 전부터 문산읍 상문리(文山邑 象文里)에 담뱃대를 만드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는데 지금도 이곳을 담뱃대 만드는 사람이 모여 살았다하여 댓방골이라 부르고 있다. 담뱃대는 꼭지 반지름, 몸통, 물치의 크기에 따라 소죽(小竹), 중소죽(中小竹), 중죽(中竹), 대죽(大竹)으로 나누며, 재료에 따라 민죽(民竹), 회문죽(回紋竹), 양정죽(兩政竹), 오동죽(烏銅竹)으로 나뉜다. 담뱃대는 무엇보다 쇠를 녹이는 것과 재화를 배합시키는 두 가지가 중요하다. 니켈에 주석을 섞어 녹일 때와 오동죽(烏銅竹)을 만들 때 금, 은, 구리 등을 배합하여 토관 (土管)에 넣어 구슬 빛이 날 때까지 녹일 때 신중을 기해야 하는데 상감기법(象嵌技法)을 사용하여 우아함과 세련미를 갖추고 있으며 닦으면 닦을수록 빛이 난다.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8호인 연관은 장죽(長竹, 긴 담뱃대)을 말하는데 꼭지 반지름, 몸통, 물체의 크기에 따라 소, 중소, 중, 대중으로 나뉘며, 무늬와 재료에 따라 민죽, 회문죽, 양정죽, 오동죽 등으로 나뉜다. 기능보유자인 윤태섭(尹泰燮)씨는 17세 때인 1948년부터 부친 윤삼조(尹三祚)[사망]로부터 기술을 익혀 지금까지 2대째 가업으로 이어오고 있다.
3) 장석(粧錫)
가구에 따라 보강조치를 덧 대놓은 금속제품인 장석은 목조가구의 기능적 역할과 보강조치에 따라 장식적인 효과를 유도하여 가구의 전체적 조형미를 좀 더 짜임새 있게 하고 힘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강점기까지 이곳 진주지역은 물산이 풍부하여 진주를 중심으로 한 사족이나 부농이 많았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 때문에 전통가구나 한옥 와가 등이 많아 장석의 수요가 많았으며 오늘날에도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전통가구제작 수공업체가 있는 것도 이러한 전통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진주에는 소목장으로 국가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였던 정돈산(사망)이 운영했던 고전공방이 있어 이 지역의 소목공예는 전국적으로 우수한 가구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수요에 의하여 정한열의 장석은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되고 각종 가구제작에 따른 다양한 장석과 자물쇠를 생산해 내므로 해서 다양한 제작경험을 충분히 쌓았으며 이미 장석제작에 입문한 지가 35년을 넘고 있어 그 제작 기능이 탁월하며 기계화 되어가는 와중에 전통제작 기법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으며 장석 제작의 우수성은 각종 경진대회 전승공예전에서 수상한 경력으로도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또한 진주의 현재 여건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소목가구 생산업체가 있으며 진주시향토민속관이 장석전문 전시관으로 자리 잡고 있어 장석제장이 그 기능을 전승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거기다 정한열이 장석 제작에 입문한 이후로 오직 장석제작에만 전념하는 끈기를 보이고 있어 전통장인 정신을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으며 장석제작에 대한 자긍심 또한 강하다.
2005년 1월 정한열[1949~ ]은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 31호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장석 제작의 기능이 우수함은 물론이고 다양한 제작경험을 통하여 장석제작의 다양한 분야를 모두 능통하게 재현하고 있는 것이 정한열 장석 제작 기능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장석의 재료에는 철장석, 주석이 있고 장석 제작기법에는 단금 기법, 판금 기법, 조금 기법, 땜 기법, 주조 기법이 있다.
4. 그 밖의 공예용품
진주 특산물 중 대표적인 실크, 진주 지역산업 생산품 중 대표적인 한지, 지점토, 닥종이, 알 등을 이용하여 자연스럽고 독특한 분위기의 다양한 작품을 제작하여 주로 장식용이나 생활소품으로 활용되고 있다.
진주지역의 공예용품은 진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관광상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적극적인 마케팅으로 그 활로가 점점 넓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