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1125 |
---|---|
한자 | 北面 |
영어음역 | Buk-mye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북면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정섭 |
[정의]
조선시대 진주목 진주성의 북쪽지역으로 옛 행정구역 또는 행정지명 중 하나.
[형성]
조선 전기에는 자연촌락의 성장과 중앙집권화의 진행에 의해 중앙권력이 군현의 하부단위인 촌락에까지 개입하게 되면서 면리제라는 촌락운영체계가 형성되었다. 경국대전에 5호(戶)를 묶어 1통(統)으로, 5통을 묶어 1리(里)로 한다고 규정하고, 몇 개의 리를 묶어 면(面)으로 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읍치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동·서·남·북의 4개 면으로 나누는 형태였다.
그러나 양란 등 사회적 변동과 농업생산력의 발전으로 면은 방위면의 체제를 벗어나 좀 더 작은 단위로 세분화되었고 숙종대의 오가통사목(五家統事目)에서는 변화된 촌락질서를 인정하고 리를 통폐합하였다. 이 때 리는 명칭만 그러하고 실제로 면과 다름없는 형태였고 그 명칭도 리와 면과 혼용되어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변천]
고려 태조 23년(940) 3월에 강주(康州)를 진주(晋州)로 개칭하면서 처음으로 지금의 진주라는 지명이 등장하게 된다. 이후 성종 2년(983)년에 전국을 12목(牧)으로 개편하면서 진주는 그 중 하나인 진주목이 되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태조 1년(1392)에 진주를 진양(晋陽)으로 개칭하고, 현비의 내향이라 하여 목(牧)에서 그 격을 높여서 진양대도호부(晋陽大都護府)로 삼았다. 태종 2년에(1402) 12월에는 다시 진주라고 하고 진양대도호부를 진주목으로 내려 고쳤다.
조선 전기 때의 진주목의 방리(坊里)는 4면(面) 111리(里) 482촌(村)이었고, 진주목의 4면은 동면, 서면, 남면, 북면이며 북면은 이 중 하나의 면이다.
조선 중기 이후의 진주목의 방리는 인조 10년(1632)의 성여신 등이 기록한 진양지(晋陽誌)에 따르면 종래의 4면 111리에서 4면 62리로 통폐합하였고 숙종 1년(1675)의 오가통사목의 시행 등으로 다시 방리의 변화가 나타나는데, 영조 4년(1765)의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4면 69리로, 순조 32년(1832)의 경상도읍지에는 4면 71리로 진주목의 방리가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철종 12년(1861)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와 고종 1년(1864)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리가 면으로 개편되어 진주목의 방면(坊面)은 70개 면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고종 32년(1895) 5월 26일에 전문 6조로 된 칙령 제98호에 의거 태종이래 482년 동안 시행해 오던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개 부(府)로 구분하고 이전의 목(牧), 도호부(都護府), 현(縣)의 행정단위를 통틀어 군(郡)으로 개편하면서 진주는 진주목에서 진주군으로 개칭되게 되었고 전통적인 조선의 읍치 행정구역도 사라지고 북면도 개편되어 사라지게 된다.
[행정구역상의 구분]
현재 명석면, 집현면, 미천면, 대곡면과 산청군 일부지역 등에 해당된다.
조선 전기의 북서면은 동물곡리, 비라곡리, 신당리, 사죽리, 독천리, 설매곡리, 월배곡리, 잉옥곡리, 미곡리, 모태곡리, 정곡리, 성태동리, 명석리로 구성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이전의 리(里)가 통합되고 그 명칭도 리와 면(面)이 혼재되고 있다. 또한 진주의 속현들도 분리하게 되었다. 따라서, 북면은 그 명칭은 남아 있으나 실제로는 명석면, 집현면, 미천면, 대곡면으로 통폐합되었다. 이전과 비교하면 명석리, 성태동리, 오산리, 가을동리가 합하여 명석면으로, 모태곡리, 정곡리, 신당리, 사죽리, 동물곡리가 합하여 집현면으로, 퇴천리, 안간역, 미곡리, 잉옥곡리, 월배곡리가 합하여 미천면으로 그리고 대곡리, 오곡리, 사죽리, 설매곡리가 합하여 대곡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