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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노동자대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1342
한자 小作勞動者大會
영어의미역 Demonstration of Tenant Farmers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형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소작쟁의
발생(시작)연도/일시 1922년 9월 4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진주

[정의]

경상남도 진주지역에서 일어났던 소작 농민운동.

[개설]

소작노동자대회는 1922년 9월 4일에 발생한 전국 최초의 소작 농민운동으로서 조선 농민운동단체 조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역사적 배경]

3·1 운동 이후에는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자본주의 발전 속에서 배출되고 있던 노동자층의 민족적·계급적 자각이 확산되어 가고 있었다. 동시에 새로 생긴 교육기관들이 사회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인적자원을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2년 7월 말경에 발표된 “소작인은 단결하라”는 조선노동공제회의 농민선언은 진보적 민족운동가와 좌익운동가들 간의 인식이 결합된 것으로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와 같이 당시 사회문제 가운데 가장 긴급했던 소작문제의 중요성을 지도부가 깨닫기 시작했다.

당시 노동자들보다 실제로 더 심각한 생활의 위협을 받고 있던 소작인층이 1천 2,3백 만으로 이들의 구제를 지주와 당국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소작인층의 자각적인 단결만이 궁극적인 해결을 가져올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로써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들은 농민문제를 민족문제로 인식하고 농민운동을 식민지해방운동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목적]

이러한 추세에 맞춰 진주노동공제회는 소작노동자대회를 개최하기 위하여 사전 준비작업을 착실히 진행하고 있었다. 1922년 2월 진주노동공제회 창립 후 진주지방 농민들의 단결과 계몽사업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진주노동공제회는 소작쟁의가 빈발하고 있던 정세 하에서 1922년 3월에 간부회의를 소집한 후 소작인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일차적으로 조사위원을 선정하고 소작인의 처지와 지주들의 수탈상황을 조사해 나갔다. 또한 진주노동공제회를 중심으로 관내 전체 농민의 조직입회 등을 결의하는 등 조직기반을 정비시켜 나갔다.

진주노동공제회의 이 같은 준비작업에 기초하여 1922년 9월 4일에 소작인조합 활동의 일대 전환을 가져온 소작노동자대회가 전국 최초로 진주지역에서 개최되었다. 소작노동자대회에는 1,000여 명의 군내 각 면 대표들과 소작농들이 참여하였다. 여기서 기존 지정소작료, 즉 정조(定租)의 폐지, 소작료의 경우 생산의 절반(50%) 분배, 지세·부가세의 지주 부담, 소작료의 운반의 경우 지주의 소재지 1리(里) 거리 이내에서는 소작인 부담으로 하고 1리 이상부터는 지주부담으로 할 것 그리고 물품증여 전폐(지주에 대한 무상노역 전폐) 등의 대지주(對地主) 요구사항을 내걸었다.

[경과]

진주노동공제회는 소작노동자대회의 결의안을 실천하기 위한 사업에 착수하였다. 우선 임시소작부의 위원 20명을 50명으로 증원하였다. 증원된 실행위원들이 각 면에 파견되어 소작노동자대회의 취지서와 결의안 등을 농민들에게 배포하였다. 이에 따라 소작노동자대회 개최 이후 2달 만에 10여 곳의 출장소에 농민 8,000명이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임시소작부 위원들은 면 출장소에 3명씩 간부들을 두고 각 리에는 몇 사람의 간사를 두었으며 10~20호에 조사위원을 1명씩 선정하였다.

이와 같이 소작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와 지도역량을 고취한 후 진주노동공제회는 지주들의 수탈상황에 대하여 상세한 조사를 실시하는 한편 지주들에게도 일련의 사항들을 제출했다. 이에 대응하여 일제와 지주 측에서는 조직력과 물리력을 동원하여 이를 저지하고자 하였다. 일제 당국은 진주노동공제회의 간부들이 각 면에 출장을 가서 선전작업을 벌이려하자 일체의 편의를 도모하지 말 것을 면장에게 지시하기도 하였으며, 진주노동공제회 간부들을 검사국으로 소환하여 조사하는 등 진주노동공제회의 활동에 대해서 끊임없는 감시와 방해작업을 벌였다.

한편 지주 측에서는 출장소의 간부에 대하여 소작권을 이동한다든지 허위로 폭행죄를 씌우는 등의 탄압을 가하였고, 진주노동공제회에 가입하는 소작인에게는 단호한 조치를 취한다는 경고문을 발송하고 진주노동공제회의 회원이 된 자에 대해서는 소작지를 박탈하는 등의 방법을 취하였다. 이러한 직접적인 탄압 외에 지주회 같은 단체를 조직하여 진주노동공제회에 대한 회유책을 벌이기도 하였다.

[결과]

지주회는 농민들의 요구를 거의 들어주었고, 이에 응하지 않는 일부 지주에 대해서는 강제적인 공동경작운동을 전개하는 등 농민들의 실력행사들도 많이 나타났다. 이처럼 진주노동공제회는 1920년대 전반기를 통하여 소작운동의 발전을 위하여 활발한 운동을 벌였으나 1925년부터는 일제와 지주의 탄압과 더불어 점차적으로 활동이 침체하게 된다.

[의의와 평가]

소작노동자대회는 조선 농민운동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던 운동이다. 진주 대회를 필두로 전라남도 순천·영광·고흥·광주 등 각지에서도 농민들이 소작인대회를 통하여 자신들의 집약된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해 대지주투쟁을 벌였다. 이를 통해 전국 각지에서 소작인 조직이 결성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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