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1595 |
---|---|
한자 | 倭寇-侵入 |
영어의미역 | Invasion of Japanese Pirate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문옥상 |
[정의]
고려 말에 일본인 해적집단인 왜구가 남해안에 출몰하여 인명 살상과 재물을 약탈한 사건.
[개설]
고려 말에 이르러 진주가 위치하였던 남해안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왜구의 출몰이었다. 기록에는 고려시대를 통하여 약 500회의 왜구 침략이 있었고, 진주의 인근 해역에만도 31회나 침입하여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다고 한다. 진주에서는 이와 같은 잦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1379년(우왕 5) 토성이던 진주성을 석성으로 수축하였다.
[시대적 배경]
고려는 14세기 중엽에 들어오면서 외환과 내환이 겹쳐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된다. 권문세가와 신진사대부의 알력, 친원파와 친명파의 대립. 공민왕의 반원정치와 왕권강화 및 개혁시도 실패 등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어 사회가 크게 동요하게 하였다. 반면 중세 일본은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가 무너지고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가 등장한 후 남북조시대가 시작되어 분란이 끊임없었고 이에 편승한 무사들의 영지 확대 획책으로 농지를 잃은 농민과 몰락한 무사들, 곤궁에 처한 중소지주층이 왜구라는 해적집단으로 변하여 약탈을 일삼게 되었다.
[경과]
왜구의 고려 침입은 충정왕 2년(1350) 2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공민왕과 우왕 때에는 최고조로 창궐하여 그 피해가 극에 달하였다. 왜구들의 침략 규모도 적게는 20여 척 내외에서 많게는 500여 척의 배에 2,000명을 이루는 경우도 있었다.
[결과]
왜구의 침입과 약탈은 고려 사회를 더욱 혼란시켰으며 고려 멸망의 한 계기가 되었다. 왜구는 고려의 재정을 파탄시켰으니, 농어촌은 극도로 피폐 되었고 교통·통신은 마비되었다. 특히 조운의 불통으로 고려의 재정이 파멸에 직면하였으며 육운(陸運)이 나타났으나 결국은 경제적 파탄을 가져와 멸망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편, 왜구의 침입은 국방에 대한 대책을 서두르게 되어 수군을 창설하고 사수서(司水署)를 설치하여 해안을 굳게 방비하게 되었으며 또한 왜구의 토벌을 위해 화통도감(火筒都監)을 두어 무기를 개발하고 화포를 만들어 왜구 격퇴에 이용하였으나 근본적인 대책은 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