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1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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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晋州義巖事蹟碑 |
영어음역 | Jinju Uiam Sajeokbi |
영어의미역 | Memorial Monument for Righteous Rock in Jinju |
이칭/별칭 | 의암사적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명화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0년 1월 31일 - 진주의암사적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3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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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진주의암사적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
성격 | 비|사적비 |
건립시기/연도 | 1722년 |
관련인물 | 논개 |
너비 | 60㎝ |
비신두께 | 15㎝ |
높이 | 145㎝ |
비문찬자 | 정식 |
소재지 주소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500-8 |
소유자 | 경상남도 진주시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
[정의]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기(義妓)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비.
[건립경위]
명암(明庵) 정식[1683~1746]이라는 선비가 진주 사민(士民)들로부터 금품을 모아 논개 의거의 징표로서 1722년(경종 2)에 다듬은 것이다. “비석을 다듬어 놓은 해로부터 18년 뒤인 1740년(영조 16) 가을에 진주 우병사인 남덕하[1588~1742]가 왕의 득명을 받고 이듬해 봄에 비를 세우다”라는 기록을 통해, 비문과 비석을 다듬었으나 미처 세우지 못하고 있다가 1740년이 되어서야 비를 세우고 비각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위치]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500-8, 의암에서 촉석루로 올라가는 길목 암반 위의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 안에 세워져 있다.
[형태]
비의 크기는 가로 60㎝, 세로 145㎝, 두께 15㎝이다.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기와로 된 맞배지붕 건물이며 양쪽에 풍판을 달았다. 비각에는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남덕하의 글씨로 된 현판이 걸려 있다.
[금석문]
비문에는 설화문학의 대가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譚)』에 기록된 내용을 인용하여 정리하고, 논개를 기리는 정식의 시가 함께 새겨져 있다.
어우당 유몽인이 야담에 이르기를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계사년에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성에 들어가 왜적과 싸우다가 성이 짓밟히자 군사는 흩어지고 백성은 모두 죽었다. 논개는 매무새를 곱게 하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앞에 서 있었는데, 아래는 깊은 강물로 바로 떨어지는 데였다. 수많은 왜적들이 보고 좋아라 했지만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는데 오직 왜장 하나가 씩씩하게 다가왔다. 논개가 웃음 지으며 맞이하니 왜장이 꾀이면서 끌어내려 하자 논개가 마침내 왜장을 끌어안고 바로 강물로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
임진왜란에 관기로 왜적을 만나 욕을 보지 않으려고 죽은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논개 하나에 그친 것이 아니지만 그 이름을 많이 잃어 버렸다. 죽음을 집에 돌아가듯이 보고 왜적에게 더럽히지 않으려 했으니 어찌 거룩한 임금의 백성들이 아니겠으며, 끝내 나라를 배반하지도 도적을 따르지도 않았으니 ‘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참으로 애달픈 일이로다” 하였다.
정식은 의암이라는 글씨를 쓴 정대융의 종손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외로이 가파른 저 의암 그 바위 위에 우뚝이 선 저 논개여! (獨肖其岩 特立其女)
저 여인인들 저 바위가 아니더면 죽은 곳을 그 어디에서 찾았으랴 (女非斯岩 焉得死所)
저 바위인들 저 여인이 아니었던들 무엇으로 의롭다 이름 하였으리오 (岩非斯女 焉得義聲)
남강 속에 외로운 의암이여! 만고에 꽃다운 논개의 이름이여! (一江高岩 萬古芳心)
[현황]
2000년 1월 31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진주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아래쪽에 있는 의암과 마주하고 있으며, 암벽에는 “일대장강 천추의열(一帶長江 千秋義烈: 한줄기 강물이 한결같이 흐르듯이 의열도 천추에 영원하다)”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의의와 평가]
의기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금석자료로,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의 상황이나 논개의 순국사적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