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18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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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晋州傳松臺山城 |
영어음역 | Jeon Songdaesanseong |
영어의미역 | Songdaesanseong Fortress (Conjecture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대곡리 산 34-1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안성현 |
[정의]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대곡리에 있는 산성.
[개설]
송대산(일명 죽방산, 해발 311.5m) 정상부 및 송대산 북쪽의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산성이다. 2005년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시행한 지표조사에 의하면, 진주 전 송대산성은 석축의 테뫼식 산성으로, 평면 형태는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쌓았기 때문에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긴 부정형이고, 산성의 총 둘레는 4㎞에 달한다. 또한 성 내부에서 건물지 2개소, 현대 건물지 및 축대 1개소, 그리고 추정망루지 1개소 등이 확인되었으며, 유물은 왜도(倭刀: 왜검, 일본도) 1점과 소량의 기와편들이 수습되었다.
한편,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송대산석성(松臺山石城)은 주 동쪽 35리에 있다. 높고 험하며, 둘레가 706보(4,236척)인데, 안에 샘이 2개 있고, 또 군창이 있다.”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松臺山城 土築周四千七十三尺 今頹圮(송대산성 토축주사천칠십삼척 금퇴비: 송대산성은 토축으로 그 둘레가 4,073척이며 지금은 쇠퇴하여 무너졌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두 문헌에 의하면 송대산성을 토축과 석성이라고 상반되게 기록하고 있는 데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기록상의 차이가 다른 성을 두고 기록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오기인지, 또는 시기를 달리하는 성이 존재한 것인지 현재로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명칭유래]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송대산성(松臺山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 산성이 전 송대산성(傳 松臺山城)으로 전해져 올 뿐이다.
[건립경위]
전체적인 구조와 향해 있는 방향으로 보아 진주 전 송대산성은 진주의 동쪽에서 의령을 지나 넘어오는 왜적을 방어할 목적으로 건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진주 전 송대산성의 정확한 축조 시기는 발굴조사가 이루어져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2005년 지표조사에서 확인된 성벽의 축조 기법과 출토 유물 등으로 대략적인 건립 시기를 추측할 수 있다. 성벽은 조잡하지만 편축식으로 축조되었고, 허튼 쌓기를 한 점과 성벽의 폭이 210~270㎝ 정도인 점을 감안하여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쌓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한편, 지표조사 채집유물 중 기와편의 문양은 무문, 장판의 어골문을 중첩·타날한 것과, 삼각집선문과 어골문 및 삼각집선문이 혼용·시문된 것이 있다. 출토된 기와들의 두께는 1.5~2.5㎝ 정도로서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유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성벽 외부에서 출토된 왜도는 임진왜란 당시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산성 내부에서는 건물지 2개소, 현대 건물지 및 축대와 망루지를 확인하였고, 성 내부에서 확인된 건물지 1과 축대는 축조 기법으로 보아 진주 전 송대산성 성벽과 동일한 시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36.8m×8m 정도의 대형 건물지와 건물의 축대 등으로 보아 상당수의 인원이 상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진주 전 송대산성은 진주의 북쪽 방어를 수행하는, 상당히 중요한 거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진주 전 송대산성이 문헌기록에 나타나는 송대산성과 동일한 것이라고 가정할 때 진주 전 송대산성은 세종 이전에 왜적을 방어와 전략적 요충지로 축조되어 임진왜란 때까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위치적으로 진주 전 송대산성은 남강변이 훤히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그 건립 목적이 차단과 관련된 관방용은 물론 남강을 이용한 통로의 확보용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위치]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대곡리 산 34-1번지 일대에 있는 송대산 정상부 및 송대산 북쪽의 봉우리 정상부에 위치하며, 산성 아래의 남강변이 훤히 조망되는 남강의 중류에 인접하여 자리하고 있다.
[형태]
진주 전 송대산성은 송대산의 북쪽 봉우리 8부와 정상부를 두르는 테뫼식 석축 산성으로 둘레는 4㎞ 정도이며, 북쪽의 남강 지류와 같은 방향으로 길게 축조하였다.
성벽은 조잡하게나마 편축식으로 쌓았기 때문에 성벽 내부에 평탄한 대지(회곽도)가 조성되어 있다. 또한 성벽이 축조될 부분보다 넓게 풍화암반을 굴착하여 어느 정도 수평을 맞춘 뒤 성벽을 쌓은 형태이다. 적심은 채석 당시의 파편과 할석으로 채웠다. 현재 잔존 높이는 5단에 1m 정도이며, 성벽의 폭은 부분적으로 다소 차이를 보이지만 대체적으로 2.1~3m 정도이다.
내벽은 20~30㎝ 정도의 부정형 할석을 이용하여 수직에 가깝게 쌓았으며, 내벽 바깥(성 내부)은 사질 점토로 다졌다. 다짐층은 상부에는 30㎝ 정도의 표토층이 퇴적되어 있고, 표토층 아래에 4층, 60㎝ 정도로 수평하게 다졌다. 다짐층의 폭은 2.9m 정도이고, 다짐층과 내벽 사이에 20~35㎝ 정도의 할석이 무질서하게 쌓여져 있다. 다짐층이 할석들을 덮고 있어서 성벽과 동일한 시기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이 할석들은 내벽을 보강하기 위하여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황]
전 진주 전 송대산성의 성벽은 대부분 붕괴가 심하여 정확한 축조 양상을 파악하기 힘든 상태이다. 북벽과 남벽, 그리고 서벽은 붕괴가 특히 심한데다가 그 가운데 남서쪽 성벽은 토석 혼축으로 보일 정도로 잔존 상태가 아주 불량하다.
남동쪽 모서리부분에서 확인되는 외벽의 하부는 붕괴된 성 돌로 인하여 축조 양상을 파악하기 힘든 상태이며, 현재 노출된 외벽은 20~60×15~40×30~50㎝ 정도의 (장)방형 및 부정형 할석을 이용하여 조잡하게나마 수평줄눈을 맞추었고, 품(品)자 쌓기를 하였으나 부분적으로 일자쌓기를 한 곳도 보인다.
건물지 1은 송대산 정상부에서 동쪽으로 80m 정도에 위치한다. 규모는 장축 36.8m, 단축 8m이며 방향은 N-20-E이다. 평면의 형태는 말각 장방형이며, 기단의 붕괴가 심한 상태여서 정확한 축조 양상을 파악하기 힘들다. 현재 확인된 기단은 30~50×20~30㎝ 정도의 (장)방형 및 부정형 할석을 이용하여 허튼 쌓기를 하였으며, 성벽의 축조 기법과 동일한 양상을 보인다. 기단의 규모는 3~4단, 70㎝, 기단의 폭은 1.8m 정도이다. 또한 건물지 남쪽으로 기단이 붕괴된 것으로 보이는 부분 3곳이 확인되었는데 이 함몰부가 건물의 출입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보이는 송대산성의 둘레 길이는 비슷하지만 축성 재료나 거리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2005년 정밀지표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 전 송대산성은 진주성에서 동북쪽으로 13㎞ 정도 떨어져 위치하고 있는 석축성이라는 점에서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에 부합한다. 따라서 진주 전 송대산성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보이는 송대산성일 가능성이 높고 이러한 가정이 맞다면 진주 전 송대산성의 초축 시기는 세종 이전으로 소급되며, 지표조사에서 채집된 유물상과도 부합된다.
[의의와 평가]
비록 언제 처음 쌓았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아 지표조사와 문헌상의 기록으로 건립시기를 추측할 뿐이지만, 산성 안에서 출토되는 기와 등의 유물들은 조선시대에 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조선시대 관방사(關防史) 연구에 필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진주 전 송대산성에 대한 차후 정밀 발굴조사를 통하여 기록에 나타난 송대산성의 위치를 밝혀야 할 필요가 있으며, 이것은 진주시 대곡면 일대의 지역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2002년 10월 24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24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