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2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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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晋州鎭衛隊 |
영어의미역 | Jinju Guards Corps |
이칭/별칭 | 진영대(鎭營隊)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최정용 |
[정의]
개항기 경상남도 진주 지역에 있었던 대한제국군 소속 지방 군대.
[개설]
조선 말기에 진주에 설치되었던 지방군대인 진주진위대(晋州鎭衛隊)는 러시아식 훈련과 교육을 받은 신식군대로서 대구 주둔 제3연대 소속의 제2대대였다. 진주진위대가 진영에 주둔했던 관계로 진주진위대를 ‘진영대(鎭營隊)’라고도 불렀다. 진주진위대는 1907년 일본군에 의해 해산되기 전까지 대한제국군 진주 지방부대가 주둔하던 군사주둔지인 진영의 지방군대였고, 그 이전에는 진주목 수비부대였던 속오군이 주둔하였다.
[제정배경 및 목적]
조선시대 진주성이 경상우병영의 근거지였다면 성밖에 있는 진영은 진주목을 수비하는 군사기지였다. 1896년 1월초 의병장 노응규(盧應奎)가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봉기해 진주성과 진영을 점령했다. 본래 진주에는 진주성을 수비하는 중군(中軍) 등이 있었고 진영에는 속오군이 있었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신식군대로 군제가 개편되면서 별다른 상비군이 주둔하지 않고 단지 진주관찰사 아래 있던 경무관 휘하의 순검들만이 노응규 부대를 막다가 성을 내주고 말았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대대장 이겸재의 친위대 제5대대를 파견했는데 중앙에서 파견된 친위대는 참령 이겸재가 이끄는 친위대 병력 5백명 외에 대구 주둔 진위대 병력 2백명을 합쳐, 총 700명을 총동원하여 진주로 출동했다. 이들 경군이 진주성과 진영을 점령한 것은 노응규가 진주를 점령한 지 3개월이 지난 4월말이었으며 이미 노응규는 자진해산한 후의 일이었다. 이 사건 이후 경상남도 지방을 방어할 지방군대 설치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그 일환으로 진주진위대가 설치되었다.
[제정경위]
조선 말기에 경상남도 지방을 방어할 지방군대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1899년에 경남지방대를 진주와 가까운 고성군에 설치했다. 이후 1900년 7월에 경남지방대를 다시 진위대란 이름으로 바꾸고, 병영을 통영에 있었던 진남군(鎭南郡)으로 옮겼다가 1902년 1월 9일에 다시 진주군으로 이전하여 진주진위대를 설치하였다.
[변천]
진주진위대는 초기에 대구 주둔 제3연대 소속의 제2대대였다. 그러나 일제의 통감정치가 시행되는 과정에서 대한제국의 군대 규모가 대거 축소되었다. 이에 따라 진주진위대도 중소단위로 축소되어 진위보병 1개 중대 정도만 진영에 주둔하였다가, 1907년 일제의 군대해산령에 의해 해산되었다. 군대해산령이 취해지자 진주진위대는 무장해제를 거부하였다. 일제는 마산 주둔 일본군 병력 중 1개 소대를 진주로 출동시켜 진주의 경찰병력과 함께 해제를 시도하였다. 당시 진주진위대를 해산하는데 앞장선 자는 진주경무서 순검(지금의 진주경찰서 순경)이었던 최지환이었다. 최지환은 진주진위대 중대장이었던 경 정위를 일본군 주둔지로 유인해 감금함으로써 남은 병사의 무장봉기를 봉쇄하고, 진주진위대를 해산시켰다. 그 후 일본군 임시조선파견대 보병 제2연대의 1개 중대가 그 자리에 주둔하다가 1912년에는 일본군 보병 제45연대 소속 수비대가 주둔하였다. 1928년에는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가, 1945년에는 금정초등학교가 들어서는 등 한동안 학교부지로 사용되었다. 1996년부터는 진주백화점 부지가 되어 공사에 들어갔다가 업체의 부도로 우여곡절을 겪는 등 유서 깊었던 진주진위대 자리는 세월의 부침을 거듭해 왔다.
[조직]
조직은 중대장인 정위(지금의 대위계급), 부위, 참위, 특무정교, 정교, 부참교 등 장교와 하사관이 20명이었으며, 상등병, 일등졸, 이등졸 등 사병이 186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