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20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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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晋州官衙址 |
영어음역 | Jinjugwana Teo |
영어의미역 | Government Office Site of Jinj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계동 38[진주대로 1110] 일대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의도 |
성격 | 건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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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주소 | 경상남도 진주시 계동 38번지[진주대로 1110] 일대 |
소유자 | 경상남도 진주시 |
[정의]
경상남도 진주시 계동 38번지[진주대로 1110] 일대에 남아 있는 관아터.
[원건물 건립경위]
관아의 건립경위나 시기에 대한 기록은 없다.
[위치]
경상남도 진주시 계동 38번지[진주대로 1110] 일대에 남아 있다. 지금의 한국통신 진주전화국이 있는 일대이다. 이곳은 원래 진주목, 진주군의 관아가 있던 곳이다.
[변천]
1895년(고종 32) 5월 26일에 칙령 제98호에 의거 1413년(태종 13) 이래로 482년간 시행해 오던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府)로 구분하여 그 아래로는 군이라는 명칭으로 통일하였다. 따라서 진주에는 진주부가 설영되어 관찰사를 두고, 진주목은 진주군으로 개칭되어 군수를 두었다. 진주관찰부는 진주성내의 우병영에 설영되고, 우병영은 구 금성초등학교 자리로 옮겼다.
그러나 이러한 23부제의 지방조직은 다음해인 1896년 8월 4일자 칙령 제35호로 폐지되고, 동일자 칙령 제36호로 다시 전국을 13도로 개편하여 각 도에는 관찰사를 두었다. 이에 따라 진주관찰부는 경상남도 관찰부로 개편되었다. 한편, 진주군은 구한 말 현재 50면 298리동을 소관했는데, 1914년에는 행정구역 개편으로 19면 148리동을 소관하게 되었다.
1939년 10월 1일에는 부령 제168호(1939년 9월 30일 공포)에 의하여 진주읍이 진주부로 승격되어 부윤을 두고, 진주군은 진양군으로 개칭되었다. 1968년에는 군청사의 협소로 상봉동 1018-3번지의 임시청사로 옮겼다가 1970년에는 지금의 진주시 상대동 284번지[동진로 155]의 신축청사로 이전하였다. 이와 같이 진주관아의 설치연대는 알 수 없으나 오랜 세월 동안 진주 행정의 근원지가 되었던 곳이다.
[형태]
진주관아에는 원래 목사·군수의 집무청인 상대청(上大廳)과 중대청(中大廳)이 있었다. 상대청내에는 동헌(東軒)과 서헌(西軒)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각각 상방(上房)이 있었다. 중대청에는 낭청방(郞廳房)과 서낭청(西郞廳) 그리고 교방(敎房)이 있었다. 객사(客舍)는 지금의 진주문화방송이 있는 곳에 있었고, 봉명루(鳳鳴樓)는 그 남쪽에 있었다.
이외에 진주성내에 위치하고 있었던 관아로는 관덕당, 공진당, 비장청, 수성중군청, 지곡관청, 수첩군관청, 별무사청, 양무당, 영리청, 진무청, 산성승장청, 서면당, 심약청 등이 있었고, 창고로는 동군창, 서군창, 진휼창, 산성창, 고마창, 양무창, 보군창, 군기고[본영군기작물소장지고], 진주사창, 군기고[본주군기작물소장지고] 등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으나 1983년 7월 20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호로 지정된 영남포정사문루가 복원되어 남아있다.
[현황]
진주관아터는 일제시대 이후 고의적인 훼손으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의의와 평가]
차후 발굴조사와 남아 있는 자료를 통하여 본격적인 진주관아터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