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2201 |
---|---|
한자 | 晋州-官基總論 |
영어의미역 | Introduction of the Foundation of Government Offices in Jinju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편세영 |
[정의]
진주의 봉황형국을 완성하기 위한 진압과 비보를 자세하게 기술한 작품
[내용]
진주의 진산(鎭山)은 비봉(飛鳳)의 모습이요 안(安)은 금룡(金龍)이니 관기는 그 아래에 있다. 그러기 때문에 무릇 사방에서 배포(排布)를 모두 봉(鳳)에 붙쳐서 이름하였으니 객사(客舍)의 앞에 누(樓)로는 봉명(鳳鳴)이 있고 관(館)으로는 조양(朝陽)이 있으며 마을 이름으로는 죽동(竹洞)이 있고 벌로수(伐老藪)와 옥현(玉峴)이라는 곳에 대를 심었으니 죽실(竹實)은 봉이 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의 이름을 망진(網鎭)이라고 한 것은 봉이 그물을 보면 날아가지 못한다는 것이요 절[寺]을 대롱(大籠), 소롱(小籠)이라고 한 것은 봉이 새장에 들어가서 멈춘다는 것이며 들에 작평(鵲坪)이 잇는 것은 봉이 까치를 보면 날지 않기 때문이다. 또 북적(北寂)·의곡(義谷)·선원(宣院)·수장(水藏)·대사(大寺) 등의 절을 지은 것은 지맥(地脈)이 지나치게 성(盛)한 것을 진압(鎭壓)하려는 것이요 공북(拱北)·현경(玄京)·적지(赤旨)·중안리(中安里)의 네 곳에 조산(造山)을 만든 것과 두골(頭骨)·나평(羅坪)은 섭천리(涉川里)에 있으니 고려 말에 왜가 촉석에 불태울 때에 쌓인 시체가 산과 같았고 두골이 들에 널려 있었기 때문에 평(坪)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셋 조산은 모두 허(虛)한 것을 보충한 것이다.
형옥(刑獄)과 지침(紙砧: 종이 만드는 곳)을 손방(巽方: 동남 간 방)에 둔 것은 또한 수세(水勢)를 막아 진압하려는 것이요 옥봉(玉鳳)의 북각(北角) 모습이 주산(主山)을 쏘아보는 쥐 입무리와 같기 때문에 돌로 개의 모양을 만들어서 이름을 개경(開慶)이라고 한 것은 모두 밀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대평(大坪)과 가방(佳坊)의 두 곳 숲은 손방(巽方)에 물이 흩어지는 것을 근심하여 비보(裨補)한 것이요 개양(開梁)과 청천(菁川)의 두 곳 숲은 청천의 충격(衝擊) 때문에 만든 것이며 가정(柯亭)의 숲은 석갑산(碩甲山)이 명당(明堂)을 충격하기 때문에 봉하여 심은 것이다.
옛적에 성시(盛時)에 있어서는 임수(林藪)를 배양(培養)하여 부근(釜斤: 도끼로 베는 것)을 엄금(嚴禁)하니 산천의 어울림과 숙기(淑氣: 맑은 기운)의 모임으로 인재(人才)가 울흥(蔚興)하고 장상(將相)들이 배출(輩出)되었다. 이것이 어찌 산령(山靈)이 부호(扶護)한 밝은 효험이 아니겠는가? 모두 도선(道詵)[신라의 고승]이 그 형세를 살펴서 잘 진보(鎭補)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그가 말하기를 “숲이 망하면 주(州)가 망하고 누(樓)가 높으면 주가 망할 것이다”라 하였으니 … 숲이란 가정(柯亭)을 이른 것이요, 누란 촉석(矗石)을 이른 것이다. 도선이 말하기를 “용두사(龍頭寺)의 남쪽 비탈에 초정(草亭)을 지을 것이니 다락이 높으면 주가 망할 것이라”라 하였다.
… 반드시 보는 바가 있는 것이다. 그 뒤로 세대가 점점 멀어지고 금방(禁防)이 해이해지니 다만 각처(各處)의 임수를 수축(修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가정(柯亭)의 숲과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나무를 베고 밭으로 만들었고 촉석루도 옛것을 보면 점점 높아가며 주목(州牧)을 혁폐(革廢)하고 병영(兵營)을 이설(移設)하니 인물(人物)이 조잔(凋殘)하고 의관(衣冠)도 예와 같지 않다. 그러니 도선의 말이 속이는 것이 아닌듯하다. 도선의 답산기(踏山記)가 일찍이 우리 고을에 있었으나 난리(亂離)로 잃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