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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2647
한자 南夢賚
영어음역 Nam Mongroe
이칭/별칭 중준(仲遵),이계(伊溪)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임경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아버지 남해준(南海準)
어머니 안동권씨 권지(權誌)의 딸
아우 남용뢰|남중뢰
아내 아주신씨 신지의(申之義)의 딸
출신지 의성(義城)
성별
생년 1620년연표보기
몰년 1682년연표보기
본관 영양
중준(仲遵)
이계(伊溪)
제향 경상남도 의성군 이산서원
대표관직 정랑|진주목사 겸 진주진병마첨절제사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영양(英陽). 자(字)는 중준(仲遵), 호는 이계(伊溪). 아버지는 신촌(新村) 남해준(南海準)[1598~1667]이고,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 권지(權誌)의 딸이다. 처는 아주신씨(鵝州申氏)로 신지의(申之義)의 딸이다.

[생애]

효종숙종 연간에 활동한 문신이다. 1620년(광해군 12)에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사촌동 월촌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13세에 백일장에서 수석 입상했고, 23세인 1642년(인조 20)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성균관에서 학문을 닦았다. 32세인 1651년(효종 2)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 전적(典籍) 및 병조와 예조의 정랑(正郞), 함양군수, 통례원우통례(通禮院右通禮), 선산부사를 지냈다. 1666년(현종 7)에는 진주목사(晋州牧使)가 되었으나 예제(禮制)의 개혁을 상언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당해 파직되었다.

1659년(효종 10)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을 기년(朞年: 만 1년)으로 할 것인가 3년(만 2년)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이때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582],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와 더불어 서인들의 논거에 반대하는 의논을 폈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때 남인이 실각하자 전라도 흥양으로 유배되었고, 서인들의 공격으로 이듬해 서울로 호송되던 도중에 남원객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죽은 뒤 9년 만에 예제가 자기의 주장대로 고쳐지자 손자 남윤주(南胤冑)가 상언하여 복관되었다

[학문과 사상]

문장이 뛰어났고 성리학과 예학, 사학 등에 조예가 깊었다. 정치적 신념이 투철하여 절의를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저술]

경상남도 고성(固城)과 전라북도 임실(任實)의 군수를 역임하면서 고을 수령으로 저질러서는 안 될 일들을 모아「거관불망기(居官不忘記)」를 지어 자신과 후임관리들을 훈계하였다. 사학(史學)에도 밝아 국조(國祖) 이후 당시까지 역사적인 사실을 「동국통감부(東國通鑑賦)」와 「동국소승(東國小乘)」을 지어서 밝히고, 「기해예송전말(己亥禮訟顚末)」을 지어 숙종 초에 있었던 예론 시비의 근원을 밝히기도 하였다. 위의 글들은 모두 『이계문집(伊溪文集)』에 모아져 있다.

[상훈과 추모]

남몽뢰가 강학하던 서재인 이계당(伊溪堂)은 1651년(효종 2)에 건립되었다가 화재로 소실되었고, 1785년(정조 9)에 중건하여 오늘날까지 경상북도 의성군에 남아 있다. 사후에 유림에서 공을 기려 세운 이산서원은 대원군 때 훼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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