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27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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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論介 |
영어음역 | Nongae |
이칭/별칭 | 의기 논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수덕 |
성격 | 기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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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주달문 |
어머니 | 허씨 |
출신지 | 장수(長水) |
성별 | 여 |
몰년 | 1593년 |
본관 | 신안(新安) |
추증 | 의기(義妓) |
제향 | 의기사(義妓祠) |
[정의]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순절한 의기(義妓).
[가계]
본관은 신안(新安). 아버지는 주달문이고, 어머니는 허씨이다.
[생애]
전라북도 장수 출신이다. 1593년(선조 26)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 혹은 충청병사 황진(黃進)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는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활동사항]
임진왜란 중이었던 1593년 6월 김천일, 황진, 최경회, 고종후 등 관군과 의병의 결사적인 항전에도 불구하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 ,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600] 등이 이끄는 일본군에게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유몽인의 『어우야담 (於于野談)』 인륜편의 ‘효열’ 대목의 기록에 따르면,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과 백성이 모조리 죽자, 논개는 구국의 일념으로 원수를 갚기로 결심하였다. 논개는 곱게 단장하고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승전연을 베푸는 자리에 나아가 술에 만취해 접근하는 왜장을 남강으로 유인한 뒤, 왜장을 껴안고 남강 물에 투신하여 죽었다. 이때부터 의기 논개가 강물에 떨어졌던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부르게 되었다.
[묘소]
현재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 방지마을에 있다는 묘가 논개의 실묘라고 구전으로 전해지지만 역사적인 근거는 없다.
[상훈과 추모]
진주성이 왜적에게 짓밟힐 때 진주목 관기로서 적장을 유인하여 남강 물에 빠져 순국한 사실은 성민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유포되기 시작하였다. 논개의 순국 사실이 문헌이나 금석문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620년경부터로 추정된다. 당시 관기로 사회의 멸시를 받던 기녀의 신분이지만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 논개의 충절어린 죽음에 감동한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어우야담』에 논개를 진주의 관기라고 채록한 것이 남아 있는 최초의 기록이다.
진주 사민들이 논개의 애국적 행위를 기리고 전하기 위해 논개가 왜장을 안고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은 것도 이 무렵이다. 진주성민들은 성이 함락된 날이면 강변에 제단을 차리고 의혼을 위로하는 한편 국가적인 추모제가 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했다. 이같은 요청을 받은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은 1721년(경종 1)에 기녀의 신분으로 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논개의 의열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했고, 이때 거론된 구체적인 포상 방법은 봉작(封爵)을 내려주고 사당(祠堂)을 건립해 주는 것이었다.
최진한의 건의를 받은 비변사는 보다 확실한 인증 자료의 제시를 요구하기에 이르러 이에 최진한은 관민 합동으로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를 건립하고 그 인본을 제출하여 자손의 급복(給復)에 대한 특전을 허락 받았다. 이는 진주 성민들의 숙원이었던 논개에 대한 봉작과 건사사액(建祠賜額)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논개의 순국 사실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계기가 됐으며 논개를 공식적으로 ‘의기(義妓)’라 지칭하는 계기가 됐다.
논개의 자손에 대한 급복의 특전이 베풀어진 20년 뒤에 의혼을 봉안하는 사당이 건립됐다. 1740년(영조 16)경에 경사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의기사(義妓祠)가 의암(義岩) 부근에 세워지고, 논개에 대한 추모제가 매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치러짐으로써 국가의 공식적인 절차가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1868년(고종 5)에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의 노력으로 매년 6월에 300여 명의 기녀가 모여 가무를 곁들여 3일 간 치제하는 추모 행사인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기도 했다. 그러나 의암별제는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의식 절차만이 교방가요(敎坊歌謠)에 전해지고 있었는데 지난 2000년부터 의암별제가 부활돼 진주성을 중심으로 3일 간 열리고 있다.
[의의와 평가]
논개의 사실을 최초로 기록한 유몽인의 『어우야담』은 임진왜란 후 쑥대밭이 된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을 돌아본 뒤 저술된 한국 최초의 야담집이다. 논개가 순국하던 1593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광해군의 교육을 맡고 있다가 그해 가을 광해군을 모시고 수원, 전주, 진주 등 현장으로 다니며 직접 목격한 백성들의 참혹상을 기록하고 그 자료를 수집하게 된다. 또한, 유몽인은 삼도순안어사(三都巡安御使)로 왜적이 휩쓸고 간 곳곳을 살피고 사실을 기록하여 세자에게 전했다. 이처럼 유몽인의 기록은 현장에서 눈으로 보고 적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논개에 대한 유몽인의 기록 또한 이런 점에서 사실로서의 가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