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0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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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河惺 |
영어음역 | Ha Seong |
이칭/별칭 | 자경(子敬),죽헌(竹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백태남 |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진주. 자는 자경(子敬), 호는 죽헌(竹軒). 아버지는 하위보(河魏寶)이며, 어머니는 참의를 지낸 이륜(李倫)의 딸이다. 뒤에 영모정(永慕亭) 하진보(河晋寶)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1571년(선조 4) 태어나 최영경(崔永慶)에게서 학문을 익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남도 창녕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곽재우(郭再祐)를 찾아가 군무를 도와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아우 하념(河恬)이 왜군에게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가자 각지로 다니면서 아우의 구출을 호소하여 19년 만에 송환시켰다.
1603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후에 장수현감을 지내면서 어지러운 민심을 수습하고 세금을 경감시켜 생업에 정착시키는 등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다. 1614년(광해군 6) 인목대비 폐모론이 일어나자 가까웠던 지기 정온(鄭蘊)과 함께 적극 반대하였으며, 이후 북인들의 횡포가 극에 달하자 1622년에는 당시 권신 이이첨(李爾瞻)과 정인홍(鄭仁弘)을 단죄하여 국정을 바로잡을 것을 상소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나라의 위급함을 구하려 하였으나 상주에 이르렀을 때 화의가 성립되자 중도에서 해산하였다. 만년에 후학 교육에 힘쓰다 1640년 별세하였다.
[학문과 사상]
성리학에 정통하였고, 후진의 교육에 힘썼다.
[저서]
『죽헌문집(竹軒文集)』4권이 있다.
[상훈과 추모]
임진왜란 후 장수현감으로서 선정을 베풀어 선조로부터 백마 한 필과 안장을 하사받았다. 진주의 인물로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인물조(人物條)」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