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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3160
한자 河澈
영어음역 Ha Cheol
이칭/별칭 백응(伯應),설총(雪聰),설창(雪牕)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수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선비
아버지 하홍달(河弘達)
성별
생년 1635년연표보기
몰년 1705년연표보기
본관 진주(晋州)
백응(伯應)
설총(雪聰)|설창(雪牕)
추증 사헌부대사헌

[정의]

조선 후기의 선비.

[가계]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백응(伯應), 호는 설총(雪聰) 또는 설창(雪牕). 조선 중기 진주지역의 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가 큰아버지이고, 하홍달(河弘達)이 부친이다.

[생애]

어려서부터 백부 하홍도 밑에서 수학하였다. 천성이 총명하여 겸재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17세 때 연이어 부모상을 당해 극진한 예로써 장사와 제사를 받들고, 상복을 벗고 말하기를 "부모가 계시지 않는데 무슨 마음으로 과거 공부를 하겠는가. 과거보는 곳은 예의와 양보가 있는 곳이 아니니 군자가 마땅히 들어갈 곳이 못된다." 하고는 고향에서 경서 공부에 몰두했다.

평생 하홍도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는데, 하홍도가 중풍에 걸려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자 곁에서 시중을 들고, 손님이 오면 하루 종일 모시고 서 있기도 했다. 하홍도가 세상을 떠나자 서원을 건립하고 비석을 세우는 일을 몸소 했으며, 유고가 불에 타 문집을 만들 수 없는 처지였는데도 사방으로 수습해 마침내 하홍도의 문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학문에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활쏘기 등 무예에도 남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었으나, 벼슬보다는 학문 정진에 더 뜻을 두었다. 정승 최석정, 관찰사 민창도 등이 모두 조정에 천거를 했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다. 만년에 작은 정자를 짓고 수양하는 곳으로 삼았으니, 당시 사람들이 높여 말하기를 ‘설창선생’이라고 했다.

[저술]

문집으로 『설창문집(雪牕文集)』 2권 1책이 있다.

[작품]

서예에도 뛰어나서 『동현실록(東賢實錄)』 등 여러 문헌에 그의 서법이 절묘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주풍화루(晋州風化樓), 비봉관(飛鳳館), 진양아문(晋陽衙門), 관덕당(觀德堂), 동장대(東將臺), 서장대(西將臺), 남장대(南將臺), 북장대(北將臺), 덕천서원 정문 시정문(時靜門) 등의 현판 글씨가 있다.

[상훈과 추모]

1745년(영조 21) 학문과 덕행으로 사헌부대사헌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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