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1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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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음역 | Nonga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수업 |
[정의]
진주목 관아의 기녀로서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왜적에게 함락되던 계사년(1593) 6월 29일 촉석루 아래 우뚝한 바위(의암, 義巖)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로 뛰어들어 죽은 순국의 여인.
[사실 기록]
논개의 사실을 맨 먼저 기록한 이는 유몽인(柳夢寅)[1559~1623]이다. 그는 인조반정 후 양주 서산에 숨어 지내다 광해군 복위를 꾀한다는 무고에 얽혀서 아들과 함께 서인 정권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젊어서부터 보고 들은 바를 즐겨 글로 적었고, 모함에 걸려 죽기 세 해 앞에 그것들을 묶어 『어우야담(於于野譚)』(1621)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의 맨 앞 「인륜편」 ‘효열’대목에 논개에 관한 사실이 실렸다.
논개가 순국하던 계사(1593)년 여름에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 다음 임금이 될 세자를 교육하는 관청)에서 문학(정5품)으로 광해군의 교육을 맡고 있다가 그해 가을 광해군을 모시고 쑥대밭이 된 삼남(충청·전라·경상)을 돌아보게 되었다. 광해군은 무군사(撫軍司 : 군사를 어루만지는 관청)를 이끌고 수원과 공주를 거쳐 동짓달에는 전주에 머물면서 왜란으로 고난을 겪은 군사와 백성을 위로하였다. 섣달에는 특히 진주(晋州)와 금산(錦山) 싸움에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사연을 책으로 엮어 시강원에 내리고, 살아남은 가족들을 불러 나라의 면역첩(免役帖 : 부역을 면제한다는 증명서)과 쌀과 콩을 내려 위로하도록 했다.
광해군이 이렇게 현장으로 다니며 직접 목격한 백성들이 겪은 참혹한 사실의 자료를 모으는 책임을 유몽인이 맡았다. 그는 삼도순안어사(충청도·전라도·경상도를 돌아다니며 살피는 임금의 사신)라는 이름을 띠고 왜적이 휩쓸고 간 곳곳을 다니면서 살피고 사실을 적어서 세자에게 드렸다. 그의 문집인 『어우집(於于集)』에는 「세자께서 암행하라 하시어 보성을 지나다가 진사 신여훈을 만나」라는 제목으로 지은 시가 있으니, 삼도순안어사로 남해안을 다니며 백성들의 아픔을 살피고 자료를 모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지난해(임진)에는 대첩(大捷)을 거두어 왜적을 물리쳤고, 올해(계사)에는 성 안에 있던 육만의 군사와 관리와 백성이 모두 목숨을 바쳐 싸운 진주에도 몸소 찾아왔음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
유몽인이 진주를 찾아왔던 동짓달은 논개와 진주성 사람들이 목숨을 바친 지 겨우 너 댓 달이 지난 때였다. 진주성싸움의 참혹한 모습이 살아남은 사람들 머리와 가슴에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 있었을 것이다. 유몽인의 기록은 현장에서 눈으로 보고 적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뜻이다. 유몽인이 한문으로 적은 논개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논개는 진주 관기였다. 만력(萬曆) 계사년에 김천일(金千鎰)이 의병의 장수로 진주성에 들어가 왜적과 맞서 싸웠다. 성이 짓밟히자 군사는 패하고 백성은 모두 죽었다. 논개는 얼굴과 매무새를 아리땁게 꾸미고 촉석루 아래 우뚝한 바위 위에 서 있었으니, 바위 밑은 바로 깊은 강물 가운데로 떨어지는 곳이었다. 여러 왜병들이 바라보고 좋아했지만 모두들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는데, 홀로 한 장수가 나서서 곧바로 다가왔다. 논개가 웃으면서 맞이하니 왜장도 그를 꾀면서 끌어당겼다. 드디어 논개가 그 허리를 끌어안고 물속으로 몸을 던져 함께 죽었다.
임진왜란 때 관기로서 왜적을 만나 욕을 보지 않으려고 죽은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논개 한 사람뿐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이름을 거의 잃어 버렸다. 저들 관기는 음탕한 창녀들이라 곧고 맵다(정렬, 貞烈)고 일컬을 수가 없다지만, 죽는 것을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겨 왜적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았으니, 또한 거룩한 임금의 교화 가운데 살아가는 것의 하나가 아닌가? 차마 나라를 저버리면서 왜적을 따르지 않았으니 충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참으로 서글픈 일이로다.”
이 기록에서 보다시피 유몽인의 기록은 두 단락이다. 앞 단락은 논개의 죽음을 사실로써 간추려 적었고, 뒤 단락은 유몽인이 스스로의 생각과 느낌을 덧붙여 적었다. 그런데 논개의 사실을 적은 앞 단락의 내용은 죽음의 순간만을 서술하고 있으며, 논개의 일생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논개의 죽음이 남달리 눈부셔서 그것이 그의 일생 모두를 가려버린 것일 수도 있지만, 자취도 없이 사라질 하찮은 일생을 눈부신 죽음이 건져 올린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몹시 간추려진 탓에 앞뒤 사정에 궁금한 구석이 적지 않아서, 지난 4백여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논개의 죽음을 놓고 나름대로 상상을 펴나갔다.
[죽음에 관한 기록]
○ 전 진주 별장 윤적보(尹啇輔) 등의 진정서(등장, 等狀, 1721)
“진주성이 짓밟히던 날 장수와 벼슬아치, 수령과 장군, 이렇게 피로써 싸우던 서른 남은 사람들이 모두 꿋꿋이 버티다가 의롭게 죽은 다음에 오직 한 사람 논개라는 기생이 남아서 문득 나라를 위하고 도적을 죽일 수 있는 계책을 떠올렸습니다. 고운 옷을 입고 홀로 강 언덕 우뚝한 돌 위에 앉아 거문고를 타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데, 성 위의 왜적 가운데서 우두머리 하나가 보고 아름답게 여겨 곧바로 논개 앉아 있는 곳으로 내려왔습니다. 논개가 슬쩍 맞이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 왜장이 즐거운 생각에 빠져 마음 놓고 서 있는 사이에 논개가 왜적을 와락 끌어안고 강물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바위는 강 언덕과 떨어져 있는데, 위는 두 사람이 상을 놓고 둘러앉을 만하고 아래는 곧 깊디깊은 물결 속입니다. 죽음이 갑자기 찾아왔으니 그 왜적이 비록 용기와 힘이 있는 도적이라 한들 마음먹고 떨어지는 그 앙화를 어찌 벗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이 기록은 논개의 죽음이 있고 128년이 지난 뒤에 진주 사람들이 적은 것이다. 그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진주에서 근무하던 최진한(崔鎭漢)[1652~1740]이 비변사에 올린 장계(狀啓) 안에 실려 있다. 논개의 죽음이 유몽인의 기록에 견주어 한결 자세하게 그려졌다. “나라를 위하고 도적을 죽일 수 있는 계책을 떠올려” 그런 죽음을 택했다는 것과 왜장이 논개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 까닭을 새롭게 밝혀놓았다. 무엇보다도 논개가 왜장을 꾀어내려고 “거문고를 타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데” 하는 대목은 유몽인의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것이다. 이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논개의 죽음을 이야기할 적이면 이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 박태무(朴泰茂)[1677~1756]의 『의기전(義妓傳)』(1740)
“성이 무너져 다시 어찌 할 바가 없이 되자, 논개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나라 일이 이에 이르러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니 헛되이 죽어서는 도움이 없는데 어찌 구덩이에 빠져 죽기를 고집하겠는가?” 하면서 매무새를 꾸미고 고운 옷을 입고서 의암에 올라 거문고를 켜며 노래를 부르니, 왜장이 좋아라 하며 달려왔다. 드디어 반가운 듯이 맞이하여 함께 춤추다가 춤이 무르익자 적을 끌어안고 강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 기록은 윤적보 같은 진주 사람들의 것보다 20년이 뒤지고, 논개의 죽음에서는 147년쯤 지나서 적혔다. 여기서는 거문고를 켜고 노래를 부르는데다 새로이“반가운 듯이 맞이하여 함께 춤추다가 춤이 무르익자”적을 끌어안고 강에 뛰어들어 죽었다고 했다. 함께 춤추었다는 이 덧보탬 또한 뒷날 사람들이 거듭 되풀이하여 빠뜨리지 않는 화소가 되었다.
○ 안민영(安玟英)[1816~?]의 『금옥총부(金玉叢部)』(1881)
“논개와 함께 이 바위에 올라 술을 마시고 즐기다가, 술이 반쯤 취하자 논개가 왜장에게 춤을 추자고 청하니 왜장은 기꺼이 일어나 함께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 논개가 왜장의 허리를 끌어안고 소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것은 박태무의 글보다 140년이나 더 뒤늦은 것이니까 논개의 죽음에서는 288년이나 지난 다음의 기록이다. 이제 여기서는“바위에 올라 술을 마시고 즐기다가 술이 반쯤 취하자”논개가 왜장에게 춤을 추자고 청하니 왜장은 기꺼이 일어나 함께 춤을 추었다고 한다. 진주성싸움의 참혹함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논개와 왜장이 함께 어우러진 거기에만 마을을 쓰고 상상해나간 결과“술을 마시고 즐기는”데까지 왔다.
○ 사공수(司空燧)[1846~1925]의 『한양오백년가(漢陽五百年歌)』(1913)
“잇 마참 왜장드리 쵹셕루에 모여안 논의 인물 듯고 슐먹고 츔을 출”(이때 마침 왜장들이 촉석루에 모여 앉아 논개의 인물 듣고 술 먹고 춤을 출 적에)
이것은 안민영의 글보다 32년이 더 늦어서 논개의 죽음에서는 320년이나 지난 뒤의 기록이다. 여기서는 술을 먹고 춤을 추는 자리를 바위(의암) 위가 아니라 “왜장들이 모여 앉은 촉석루”로 바꾸었다. 왜장들이 모여 앉아 술을 먹고 춤을 추었으니 완전히 흥겨운 잔치를 벌인 것이 되었다. 이로부터 전라북도 유림에서 펴낸 『호남삼강록』(1903)과 통감부 시절 민간에서 펴낸 『초등대한역사』(1908)를 비롯하여 1950년대 뒤로 나타나는 여러 기록들이 이것을 받아들여 되풀이했다.
○장수교육청 ‘의암주논개낭생장지사적불망비(義巖朱論介娘生長地事蹟不忘碑)’(1960)
“계사년 유월 왜적이 침입하여 진주성이 무너져 여러 장수가 싸우다 죽으니 성 안이 물고기 회를 친 듯하였다. 칠월 칠일 촉석루와 남강 위에 왜적이 승전 잔치를 열자 논개는 의분이 끓어올라 스스로 기생처럼 꾸미고 왜장 입화종무가 몹시 취하여 미친 것 같음을 틈타 일을 꾀했다. 준비한 열 손가락의 반지와 가슴 가득한 열기로 남강 깊은 물에 치마를 둘러쓰고 떨어져서……”
이것은 논개의 죽음에서 367년이나 지난 다음의 기록인데, “칠월 칠일 촉석루와 남강 위에 왜적이 승전 잔치를 열자” 논개의 의분이 끓어올랐다고 했다. 이제는 잔치 자리가 촉석루와 남강 위에까지 벌어졌고, 날짜마저 한 주간이나 지난 칠월 칠석 명절로 바뀌었다. 그리고 장수지역에서는 이것을 거듭 되풀이하면서 사실인 듯이 받아들이고 있다.
[새남]
논개는 이승에 이름과 죽음밖에 남긴 것이 없지만, 진주 사람들은 논개를 죽음으로만 마냥 묻어두지 않았다. 해마다 6월 29일이면 남강 가에 제단을 차리고 제사를 올리며 새남(죽은 사람의 넋이 극락으로 가도록 하는 굿)을 빌었다(오두인의 『의암기』). 그러면서 틈나는 대로 조정에 논개를 버려두지 말라고 아우성하며 졸라서 마침내 147년 만에 영조 임금으로부터 “사당을 세워 포상하라”는 허락을 받아냈다. 이리하여 논개는 의기(義妓)라는 이름으로 새남을 얻고 사당에 번듯이 자리 잡아 영원히 살아 있다. 기록에 나타나는 새남의 자취를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1) 오두인(吳斗寅)[1624~1689]의 『의암기(義巖記)』(1651)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로 떨어졌던 그 바위는 논개보다 먼저‘의암(의로운 바위)’이라는 이름으로 새남을 얻었다. 바위 얼굴에 커다랗게 새겨 넣은 ‘의암(義巖)’이라는 두 글자는 오늘도 뚜렷한데, 경상우도 재상간심관(災傷看審官 : 병자호란으로 백성이 입은 재해와 상처를 살피는 관리)으로 진주에 내려왔던 오두인이 『의암기』를 지었으니 글씨는 그보다 앞서 새긴 것이다. 그런데 근래 진주에서 펴낸 『진양속지(晋陽續誌)』(1932)에는 임진왜란 때 함경도 의병장이었던 정문부(鄭文孚)[1565~1624]의 둘째아들 정대륭(鄭大隆)이 그 글씨를 썼다고 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바위에 새겨 넣은 글씨는 정대륭 형제가 진주에 옮겨온 1625년에서 오두인이 『의암기』를 쓴 1651년 사이에 쓴 셈이다.
(2) 최진한(崔鎭漢)[1652~1740]의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1722)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진한은 논개의 새남에 남달리 애쓴 분이다. 진주 사람들의 진정서를 받아 장계(狀啓)를 올리고, 조정에서 사실을 믿기 어렵다며 외면하자 진주 사람들의 뜻을 모아 의암사적비를 세웠다. 그리고 정식(鄭栻)[1683~1746]이 지은 비문을 붙여서 다시 장계를 올렸다. 그제야 경종 임금은 우부승지 박희진(朴熙晋)을 시켜 “관기 가운데 이처럼 뛰어난 절의가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칭찬할 만하다. 자손을 찾아가서 별도로 부역을 면제시켜 주고 이제까지 하지 못했던 나라의 특별한 은전을 보이도록 하라.”는 교지를 내렸다(1722). 임금의 뜻을 받들어 논개의 자손을 찾아 올리라는 공문을 관내에 띄웠으나 “본디 자손이 없었다.”는 회답을 보내왔을 뿐이었다.
(3) 남덕하(南德夏)[1688~1742]의 의기사(義妓祠)(1740)
최진한의 도움으로 논개는 경종의‘칭찬’을 듣고 “자손에게 나라의 은전을 내리는” 자리까지 살아났다. 그러나 “본디 자손이 없었으니” 논개의 새남을 바라며 130년을 싸워온 진주 사람들에게는 얻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내 병마절도사 남덕하의 계청(啓請)은 영조로부터 “사당을 세워 포상하라.”는 비답을 받았다(1740). 왕의 뜻을 받들어 남덕하는 의기사를 세워 논개의 위패를 모시고, 곁들여 최진한이 세운 의암사적비에다 ‘의기 논개의 문’이라는 비각을 세워서(1741) 새롭게 꾸몄다. 이리하여 순국한 지 꼬박 147년이 되어서 논개는 진주 사람들 눈앞에 새남으로 일어섰고, 해마다 봄과 가을이면 나라에서 바치는 제사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럴 즈음에 박태무(朴泰茂)[1677~1756]는 『의기전(義妓傳)』을 짓고, 진주 사람들은 ‘의기 논개의 문’ 아래 바위 벼랑에 “한 줄기 강물이 한 결 같이 흐르듯이 의롭고 매움도 천주에 영원하다(一帶長江 千秋義烈 )”이라는 글자를 커다랗게 새겨(1766) 논개의 새남을 기렸다.
[남편과 신분]
진주 사람들의 굽힐 줄 모르는 아우성으로 관기 논개가 의기로 새남받아 세상에 우뚝 일어서자 뜻밖의 일들이 잇달아 벌어졌다. 첫손 꼽힐 일은 남편과 후손이 나타난 것이다. 논개의 신위가 의기사에 모셔지고 여섯 해를 지난 1746년 겨울 강물이 잦아진 남강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의 구리도장이 나타났다. 진주성이 떨어지던 그 날 촉석루에서 남강으로 뛰어내린 절도사 최경회[1532~1593]가 가슴에 품었던 것임을 짐작한 조정에서는 그의 충절을 새롭게 깨닫는 기회가 되어 그때까지 시호를 내리지 않은 것을 뉘우친 의정부에서 좌참찬(정2품) 권적(權樀)[1675~1755]에게 시장(諡狀 : 임금께 시호를 내려달라고 청하는 행장)을 쓰게 했다(1750). 권적의 시장 끄트머리에 “또 그의 천첩도 공이 죽던 날 아리따운 옷에다 매무새를 꾸미고 남강 가운데 바위에서 적장을 꾀어 끌어안고 함께 떨어져 죽었다. 이제까지도 사람들이 그 바위를 ‘의암’이라 부르니 또한 맵다[烈] 하지 않으랴.” 하였다. 의기사에 모셔지고 꼭 십년이 지난 때에 최경회 절도사가 논개의 남편으로 나타난 셈이다. 이것은 시장의 자료를 뒷받침한 최경회의 현손(손자의 손자) 최급(崔汲)에게서 말미암았음에 틀림없겠고, 157년 동안 진주에서 그처럼 찾아도 없던 자손이 왜 이제야 나타났는지 알 길 없지만, 임금께 올린 의정부의 기록이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조선의 유학자들에게는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 호남 유림이 펴낸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1799), 장수현감 정주석(鄭冑錫)이 세운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1846),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의 『교방가보(敎坊歌譜)』(1872), 장수현의 『장수현읍지(長水縣邑誌)』(1872), 전라북도 유림의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1903), 송병선(宋秉璿)[1836~1905]의 『충의공신도비명(忠毅公神道碑銘)』 같은 데에서 거듭 되풀이하여 최경회 절도사를 논개의 남편으로 못박았다. 그리고 20세기에 나타난 여러 기록들은 거의가 그대로 뒤집을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논개가 최경회와 그런 연분을 맺을 수 있는 말미가 쉽게 잡히지 않아서 그랬던지 장지연(張志淵)[1864~1920]은 『일사유사(逸士遺事)』(1922)에서 최경회와 함께 계사년 진주성에서 순국한 충청도 병마절도사 황진(黃進)[?~1593]을 논개의 남편이라 했다. 그러자 박종화(朴鍾和)[1901~1981]의 「논개와 계월향」(1946), 정한숙(鄭漢淑)[1922~1979]의 「논개」(1973) 같은 소설에서도 절도사 황진을 논개의 남편으로 받아들였다.
아무튼 논개가 다락같이 높은 사대부의 아내로 떠오르자 사람들은 이제 논개를 기녀로 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논개의 신분은 『어우야담』(1621)부터 ‘진주 관기’였고, 최진한의 장계를 받아들인 경종의 교지(1722)에서 ‘의기’로 바뀌었으나, 남편 최경회에게는 언제나 ‘천첩’(권적의 「시장」, 1750), ‘소방(=작은 방. 정현석의 『교방가보』, 1872), ‘첩’(송변선의 『충의공신도비명』, 1903)일 뿐이었다. 그런데 장지연이 『일사유사』(1922)에서 “양갓집 딸이니 재주와 인물이 빼어났으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자 집이 가난하고 의지할 데가 없어 마침내 기녀 명부에 이름을 올리는 데로 떨어졌다.” 하자, 무엇보다도 20세기의 모든 소설과 평전 같은 문학작품들이 이것을 되풀이하며 허구로 사실과 사건들을 만들어나갔다.
[고향과 무덤]
남편과 후손이 나타나고 신분까지 드높아지니까 고향도 나타나고 마침내 무덤까지 나타났다. 논개의 고향을 맨 먼저 내세운 기록은 『호남절의록』(1799)의 「충의공최일휴당사실(忠毅公崔日休堂事實)」 끝자락이다. “기녀 논개는 장수 사람인데 공(최경회)이 좋아했으므로 따라서 진주에 들어갔다.” 이렇게 논개를 장수 사람이라 하자, 장수현감 정주석은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를 세웠다(1846). 이어 『장수현읍지』(1872)에서는‘임현내면 풍천’을 논개의 고향이라 했고, 이를 받아들인 황현(黃玹)[1855~1910]은 정주석의 『생장향수명비』에 붙여 지은 한시 「의기논개비」에서 “풍천나루 어구에는 물이 더욱 향기로워 옷 빨고 얼굴 씻어 의랑에게 절하노라.”고 노래했다. 이래서 『장수지(長水誌)』(1925)와 『조선호남지(朝鮮湖南誌)』(1953)에서는 그대로 ‘임현내 풍천’이라 했으나, 정비석의 「진주기 논개」(1982)에서 풍천을 ‘계내면 월강리 풍천마을’이라 했다. 그런데 박종화의 「논개와 계월향」(1946)에서는‘장수면 연사리’, 진주의 의기창렬회가 세운 ‘의랑 논개의 비’(1954) 뒤쪽 「논개의 사연」에는 ‘내계면 대곡 주촌리’, 장수교육감의 ‘의암주논개랑생장지사적불망비’(1960)에는 ‘계내면 대곡리 주촌마을’, 장수향교에서 펴낸 『벽계승람(碧溪勝覽)』(1975)에는 ‘계내면 대곡리 주촌마을’, 전병순의 『논개』(1979)에서는 ‘계내면 대곡리 궐촌마을’이라 하여 조금씩 엇갈렸다. 그러다가 1980년대로 넘어와 지방자치시대를 맞으면서 전라북도와 장수군이 ‘계내면 대곡리 주촌마을’을 논개의 고향으로 확정하고 나랏돈까지 받아서 굉장한 사적지로 꾸미고 있다.
이럴 즈음인 1976년 여름 “논개의 무덤을 찾았다”는 기사가 지방 언론에 떠들썩했다.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산31번지에 임자 없이 버려진 두 무덤이 최경회와 논개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이런 소문은 장수군과 함양군에 빠르게 퍼지고 장수군 쪽에서 논개의 무덤을 모셔와야 한다는 주장이 나돌자, 함양군에서는 그 무덤에 얽힌 설화를 바탕으로 『의랑 논개』를 펴내(1977) 사실화에 힘썼다. 두 무덤 주변을 가다듬고, 아래 무덤 앞에는 ‘유인 신안주씨 논개의 묘(孺人新安朱氏論介之墓)’라는 상석(床石 : 무덤 앞에 제물을 차리려고 만들어 놓은 네모 난 돌판)을 놓아 논개의 무덤으로 확정하고, 무덤 동쪽 계곡 길가에는 논개의 주검을 여기까지 모시고 온 의병을 기리는 의암논개반장의병추모비(義巖論介返葬義兵追慕碑)를 세웠다(1989). 게다가 부산 경성대학교 향토문화연구소에 부탁하여 『논개 사적의 역사적 의미』(1996)를 펴내고, 경상남도에 문화재 지정신청서를 내기까지 했다(1998).
[왜장의 정체]
논개에게 죽임을 당한 왜장은 누구일까? 그것은 조선 선비들에게 크게 소중한 물음이 아니었던지 한문 기록에는 ‘왜장(倭將)’, ‘적장(賊將)’, ‘적장(敵將)’, ‘왜추(倭酋)’, ‘적수(賊帥)’ 또는 그저 ‘왜(倭)’, ‘적(賊)’일 뿐이었다. 그런데 일찍이 백성들의 이야기(『임진록』)나 노래(민요)에서는 ‘청정’, ‘평수길’, ‘석종노’라 하고, ‘왜놈 청정’, ‘왜놈 천지’, ‘왜장 청장’이라 했는데, 20세기 초의 지식인 사공수의 『한양오백년가』에서는 ‘성죵노와 나복’ 둘이라 하기도 해서 한결같지 않았다.
그런데 1960년대에 논개의 평전과 소설들이 나타나면서 왜장의 정체는 새로운 관심사가 되었다. 한때 배호길의 『진주 촉석루와 주논개』(1965)에서 왜장을 ‘석종노’라 하고, 그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부대의 부대장(副隊長)이라고 하자 정부에서 펴낸 『토향지(土鄕誌)』와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박종화의 『논개와 계월향』(1946)에서 일본 가부키[歌舞伎]의 주인공으로 이름난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가 그 왜장이라 하자, 전병순의 「논개」, 정비석의 「진주기 논개」, 정동주의 「논개」 같은 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진주시의 『진주시사(晋州市史)』, 진단학회(震檀學會)의 『한국사』, 이홍직(李弘稙)의 『국사대사전』 같은 데에서 받아들여 정설처럼 굳어지고 있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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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1 | 2011년 한자(문) 재검토 작업 | 1) “一帶長江 千秋義烈(일대장강 천추의열, 한 줄기 강물이 한 결 같이 흐르듯이 의롭고 매움도 천주에 영원하다)”이라는 글자를 ->“한 줄기 강물이 한 결 같이 흐르듯이 의롭고 매움도 천주에 영원하다(一帶長江 千秋義烈)”이라는 글자를 2) 최경회의 현손(손자의 손자) 급(汲)에게서 말미암았음에 ->최경회의 현손(손자의 손자) 최급(崔汲)에게서 말미암았음에 〇 인명 표기 바로 하고 태깅 처리하였음 3)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 〇 지명 표기로 태깅 처리하였음 4) ‘첩’(송변준의 『충의공신도비명』, 1903)일 뿐이었다. ->‘첩’(송병선의 『충의공신도비명』, 1903)일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