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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차맛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3197
영어의미역 Taste of Tea in Jinju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집필자 정헌식

[정의]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 경상남도지방에서 차와 관련된 자연환경, 역사, 차인(茶人)들의 활동, 그리고 도구와 기물 등이 관련되어 이루어진 독특한 생활문화 풍토.

[개설]

한자 ‘茶’는 ‘차’ 또는 ‘다’로 읽히나, 진주지방에서는 ‘차’로 많이 읽히므로 ‘차’로 쓰고자 한다. 차(茶, tea, cha)는 마시는 음료로써, 몸과 마음의 건강과도 관련되고, 자연과도 연관되면서 차생활·차예술·차문화를 이루어왔다. 차문화는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일본이 중심이 되어 쌓아온 동양문화이다. 오랫동안 마셔왔다는 것은 건강에 좋다는 것이며, 누구나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차 맛은 오미(五味)라는 독특한 맛을 지닌 맑고 담백한 기호음료로서, 차 한 잔을 통해 일상생활에 신선한 자극을 준다. 이것이 다른 문화와 구별되는 것이다.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진주지역에서 난 차를 마시며 즐긴 사람들이 있고, 또 그와 얽힌 이야기들이‘진주 차 맛’을 만들었다. 차생활은 차와 사람, 그리고 그 지역의 기후 풍토가 함께 엮어가는 마당놀이이기도 하다. 차는 지역성을 초월한 보편적 식문화(食文化)이다. ‘진주 차 맛’은 지리산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진주시민들은 지리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남강 물을 마시며 살아오고 있다. 진주지역은 예부터 차나무가 있는 지리산이 있고, 어느 지방 누구보다도 차 한 잔을 나누며 차 이야기를 해준 사람이 있었고, 찻그릇을 만들고 귀중한 차기를 보관해오면서 차마시기 운동을 해온 분들이 있었다.

진주지역에서 시작된 차문화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가 한국의 생활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차의 시배지가 지리산인데다 차를 연구하고 차밭을 일구어가며 차도구를 갖추어 차생활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였고, 그와 함께 차 관련 사업을 발전시켰다. 또한 차와 관련된 책을 내어 이론적인 바탕을 다져가며 한국의 차문화운동을 전개시켜왔다.

[진주의 자연과 차]

진주의 자연환경은 지리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진양호에 머물렀다가 남강으로 변하여 진주를 감아 돌아 빠져나가는 형국이다. 그러한 자연의 구조는 지역문화의 상징이 되는데, 그 짜임새는 지리산과 남해를 사이에 두고 그것을 이어주는 영속적 흐름을 이어가는 구조이다.

신라 흥덕왕 3년(828) 12월에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는데 당 문종이 사신을 인덕전으로 불러 마주하고 연회를 베풀어주고 물품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면서, “당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사신 대렴(大廉)이 가지고 온 차나무 씨앗을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는데, 차는 선덕왕[632~647]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 와서 크게 유행하였다”고 한다. 대렴공이 가져온 차 씨는 이미 사전에 왕의 명령을 받은 것으로 시험 재배에 충분한 양을 가져와 지금의 쌍계사 부근에 뿌려졌을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하동군 화개 지리산 골짜기와 산청군 덕산 지리산 자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생 차나무의 원류가 된 것이다.

이처럼 차는 이미 오래 전 신라시대부터 우리가 자고 나면 쉽게 볼 수 있고 자주 가는 친숙한 지리산이 키워오고 있었다. 차는 먼 이국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내가 사는 이 고장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었고,‘진주 차맛’의 뿌리가 되었다.

[『한국의 차도』 출판과 차인들의 활동]

다솔사(多率寺)는 지리산에서 발원하여 곤양으로 뻗어난 봉긋한 봉명산(鳳鳴山)의 키 큰 적송 숲 속에 있다. 6세기 초인 신라 지증왕 4년(503) 연기대사(緣起大師)가 창건하여 영악사(靈嶽寺)라 이름 붙인 절로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지만, ‘진주 차맛’의 산실로 유명하다. 다솔사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은거지가 되어 민족독립을 주도하던 곳으로, 그에 관한 많은 일화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1904~1979]은 다솔사 주지로 있었다. 그는 13세에 다솔사에 입문하여 해인사를 거쳐 76세로 서울에서 입적하기까지 60여년에 걸쳐 다솔사에 주석하며 원효교학(元曉敎學)의 복원과 차선삼매(茶禪三昧) 생활로 일관했다.

대웅전(적멸보궁) 뒤편에는 차나무가 무성하게 자라서 큰 차밭을 이루어, 산기슭 암자 봉일암까지 이어져 있다. 현재 동편의 큰방이 한때 그의 차실인 ‘죽로지실(竹爐之室)’로 쓰였고, 그에 딸린 큰 부엌에서 차를 만들었다. 봄날 5월이 되면 찻잎을 데치고 덖는(물기 있는 음식들을 타지 않을 정도로 볶아서 익히는) 손들이 바삐 오가며 부산한 곳으로 변하였다. 옆방은 차 건조실로 이용되었는데, 가마솥에서 다된 차는 마지막으로 따듯하게 데워놓은 방으로 옮겨 널어서 건조시켰다. 그것이 일명 반야로(般若露)라는 차이다. 입구의 대양루는 차생활 강의나 원효사상을 가르치는 강당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서편에 대중공양을 하는 식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다른 건물이 들어섰다. 본래 다솔사 전체의 건축 구도는 좌우 대칭형으로 봉황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대웅전이 머리가 되고, 동서편 건물을 날개로 하고, 대양루 입구는 꼬리가 되어 이루어진 봉황새 모양으로 날개 짓을 하며 봉명산으로 날아오르는 모습이었다.

이 무렵 김법린(金法麟)김범부(金凡父) 등이 다솔사에 머물며 강론을 하면서 은밀히 독립운동을 하였다. 경내 정원에는 만해 한용운[1879~1944]의 회갑연을 기념하여 심은 황금편백 몇 그루가 지금까지도 잘 자라서 차나무와 함께 다솔사의 표상이 되고 있다. 작가 김동리의 『등신불』(1961)도 이 다솔사에서 쓰인 것이다.

지금은 차를 쉽게 접하고 쉽게 마실 수 있지만, 1970년도 이전에는 차에 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를 잘 몰랐고, 혹 지리산 절집 주변에서 비벼 말린 차(일쇄차)를 다려낸 진한 붉은색의 쓴 차를 마셔보는 정도였다. 그런 상황이 되다보니 어쩌다 그와 인연이 닿아 차 한 잔을 마셔볼 때면 신기하기 그지없었고, 두리번거리면서 찻잔을 잡으면 자연스러워야 할 찻자리가 다소 긴장이 되기가 예사였다.

다솔사 효당이 차를 직접 소개하고 강연도 하며 『독서신문』과 잡지에 발표함으로써 비로소 여러 사람들이 차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어서 1973년 초반에 『한국의 차도(韓國의 茶道)』가 발표되자 우리도 훌륭한 차문화를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한 널리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차도』는 효당이 60여년의 수도생활과 함께해온 차생활을 쉽고도 소상하게 쓴, 그러나 달관의 경지가 넘치는 차도 개론서이다. 『한국의 차도』는 한국 차도의 입문서가 되었으며, 이것이 효시가 되어 차책이 차츰 나오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차도』가 보련각(寶蓮閣)에서 출판되기 이전에 일본 동경에 있는 교포 김정주씨의 부탁에 의해 구술한 것을 정서하여 유인물로 만든 것이 차츰 세인들에게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김정주는“일본에는 훌륭한 차문화가 있는데, 부럽거니와 한편 부끄러워 한국에는 차문화가 없는가”하면서 그에 대하여 해소 방안을 모색해달라고 효당에게 간청을 하였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우리의 차에 관한 책을 전혀 볼 수 없었던 한국 사회에 처음으로 『한국차생활사(韓國茶生活史)』라는, 총 24쪽으로 된 유인물로 1966년 12월에 간행되었다. 이어서 2차로 1970년 8월에 간행된 총 28쪽짜리로 개정된 『한국차생활사』가 나왔다.

1, 2차에 걸쳐 차생활에 관한 소박한 ‘소책자’가 나오면서 효당은 자료를 찾고 정리하여 내용을 보완해서 한국 최초의 차책이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것이 1973년에 서울 보련각에서 출판된 308페이지의 『한국의 차도』(최범술 저)이다.

그밖에‘진주 차맛’을 만든 차인들이 많이 있다. 다솔사 뒷산 너머 북천의 황남(篁南) 문영빈(文永彬)[1891~1961]은 독립운동가로서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창립하여 상임감사를 맡았다. 나라가 광복한 후에는 사사로운 개인감정이 국가 창업에 방해를 준다고 하여 일체 정치적 인연을 끊고 고향 북천의 직하고택(稷下古宅)에 머물며 집안일을 도우며 다솔사를 오가며 차생활에 심취하였다. 효당과 청남 오제봉을 비롯하여 광주 무등산 차실 ‘춘설헌(春雪軒)’에서 차를 기르고 그림을 그리며 후학을 가르쳤던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1891~1977] 등 많은 지기들과 정을 나누며 말년을 보냈다. 의재는 효당과 호형호제하던 사이였다.

은초(隱蕉) 정명수(鄭命壽)[1908~2000]는 진양 대평에서 태어나 진주 비봉루(飛鳳樓)에서 서예활동을 하며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성파 하동주로부터 배운 글씨로 국전에도 입선하였으며, 촉석루의 옛 이름 현판인 ‘南將臺(남장대)’를 올리기도 하였다. 진주 곳곳에 걸린 글씨는 지금도 그의 굵직하고 포근한 마음을 전하고 있다. 그는 효당과 차회활동을 같이했다. 차회 때나 귀한 손님이 오실 때는 비봉루 누각에 모시고 차 한 잔을 나누었다. 진주 비봉루는 근대에 지었어도 그 짜임새가 완벽하여 아름다운 건축 조형 덕분에 차실의 표본이 되었다. 차실(茶室)로서 아름답기 그지없었고 보통 사람들이나 예술인들이 찾는 포근한 진주를 대표하는 차실 역할을 하였다.

비봉산 동쪽 작은 골짜기, 가수 남인수씨의 고향 마을 ‘드무실’로 넘어가는 곳에는 의곡사(義谷寺)가 있다. 의곡사는 당나라 무외삼장에게 배운 신라 고승 혜통이 창건하였다는 절집이다. 진주를 찾은 예술인들의 안방이 되기도 했던 의곡사는 곧 이어지는 서예의 대가이자 차인인 청남 오제봉이 주지로 있었던 곳이다.

유당 정현복은 서예가로서, 역시 서예가인 오제봉이 주지로 있는 의곡사를 안방처럼 드나들면서 진주를 오가는 여러 사람들과 자주 어울렸다. 시내에 있기도 하지만, 비봉루와 이웃하고 있는 의곡사는 어차피 노상 손님들로 넘쳐났다. 그들은 정유당·성풍곡·허운전 외에도 소정 변관식, 벽산 정대기, 성파 하동주 등이었고, 산강(山康) 변영만(卞榮晩)이나 의재 허백련의곡사에서 기거하곤 하였다. 예술인·학자들과 교유하는 본부에 의곡사도 한몫을 하면서‘진주 차맛’을 만들었다.

[민예품을 통한 차생활 교육]

아인(亞人) 박종한(朴鐘漢)[1925~ ]은 진주시 인사동에 재단법인 ‘하천학원’을 설립하여 초대부터 대아중·고등학교 교장을 맡았다. 역사 발전의 원동력은 그 역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 속에 사는 인간 개개인에 있는 것이며, 교육은 인간을 역사적 현실에 적응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창조하는 인간을 만드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역사와 풍토 속에 있는 인간인 민족은 국가 안에 있는 국민으로서 자각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지식 교육에서 탈피하여 사제동행(師弟同行)의 교육을 역설하고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그는 조국의 기본과제를 민성·민족·민본·민생·민복의 다섯 가지로 보고, 이를 타개하는 힘을 민족에 내재하고 있는 힘, 즉 전통에서 얻으려는 새로운 교육 방법인 ‘오민교육(五民敎育)’을 창안하였다.

이러한 참교육·현장교육을 실천하기 위한 준비로 주위에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내팽개친 민속 생활용기에 먼저 주목하였다. 사람들은 귀찮게만 생각하고 있는 집안에서 나뒹구는 물건들을 하나둘씩 모으기 시작했다. 도자기와 미술품은 말할 것도 없고 각종 생활용기를 조심스럽게 모았다. 각종 마제 석기류와 고대 토기류, 고려청자·조선백자 등 도자기류, 산수도·민화·인물화·불화와 같은 그림, 글씨·서적·목물(木物)·석물(石物)은 말할 것도 없고 각종 무기류까지 구비하여갔다. 학교 내에 공간을 마련하여 모아진 재료들을 다섯 분야로 분류하고, 각 실을 만들어 전시하는‘오민박물관’을 세워서 우리 민족의 생활의 우수성을 알리며 교육하였다.

또한, 교장실에는 차례실(茶禮室)을 만들어 차를 마시게 하고 차에 관한 예절을 가르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차생활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특히 학교생활과는 인연이 먼 이른바 ‘문제학생’을 불러 모아 특별 구역을 청소하게 한 다음, 차실에 불러 차 한 잔씩 대접하였다. 맑고 담백한 차 한 잔을 천천히, 그리고 말없이 마시는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생기는 느낌으로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고쳐가도록 하였다. 학생들은 매나 말로써만 훈계하는 일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경험을 통해 불안한 정서는 안정을 찾아갔다. 또한 남해 하천재(荷泉齋) 주변에 차밭을 조성하여 차 산업에도 관심을 보임과 동시에 차생활 및 제차(製茶) 실습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제공하였다.

학생들을 교육하면서 증명해 보일 교육자료가 없었는데,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할 자료가 뒷받침되니 민속자료의 해석에 대한 눈이 요구되었다. 아인은 민속자료와 문화재를 정리하고 분류하면서 민족사관(民族史觀)의 눈이 틔었다. 중국 손문의 삼민주의(三民主義)를 본받아 오민사상을 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완전사회 창조를 위한 ‘오민교육’을 확립하였는데, 이러한 사상을 담은 책을 1975년에 배영사에서 『오민교육』(254쪽)으로 출판했다. 이와 같이 오민교육을 바탕으로 이론 공부를 추진함과 동시에 선사를 추모하며 호국정신을 배양하는 프로그램을 계발하여 실천에 옮겼다.

토우(土偶) 김종희(金鐘禧)[1921~2000]는 대구에서 태어나 성장기 십여년은 일본에서 보내며 그릇 만드는 것을 배웠다. 해방과 더불어 25세 때 귀국하여 합천 해인사 밑 홍류천 변에 가마[江坡陶苑]를 차렸다. 전기도 없는 곳이었으나 물이 있고 나무가 흔하고 흙이 마음에 들어 그곳을 택했다. 그후 계명대학교 도예과에서 15년간 제자를 가르치기도 하며 40여년을 넘도록 그곳에 머물렀다.

6·25 당시 효당은 국회의원을 그만두고 해인사에 있었다. 효당의 토우에서 도자기 제작도 하고 있어 자주 찾아갔다. 차를 마시고 싶은데 그릇이 없었다. 효당이 만들어보라는 대로 그릇을 만들어본 것이 차기(茶器) 제작 동기가 되었으나 모델이 없었다. 결국 우리 그릇의 형태로서 택한 것이 간장종지 같은 것에 키를 높인 잔과, 약탕관을 본뜬 차관 등을 만들었다. 그때의 차기는 두툼한 것이 특징이었다. 그렇게 그릇을 만들어 해인사에 보내주어 차와 인연을 깊게 맺었다.

차기는 절대로 차를 마시는 도공이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 그는, 차를 마시다보면 차의 정신에 몰입하게 되고 그 정신이 차기에 생명을 불어넣게 된다는 것이다. 차는 검소(儉素)한 덕을 가진 사람에게 적합한 것, 검(儉)은 사치의 반대말이기에 그릇에 사치 기운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 따라서 잘난 표식도 없어야 하고 오직 검소하고 질박한 것이 차기의 참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공인(工人) 스스로가 만들고 사용하면서 본인이 즐길 수 있어야 하고, 내 가까운 사람에게 내 즐거움을 나눠줄 수 있어야 함을 신조로 삼았다. 그는 좋은 차기를 만들어 싼 가격으로 변함없이 공급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진주차인회의 결성과 활동]

예부터 진주지역에는 도자기 가마가 많이 있었는데, 특별히 막사발을 굽는 가마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발은 흔하여 사람들은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다. 다솔사 효당을 통하여 차를 알게 되고 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막사발은 차 마시기에 좋은 도구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드물게 잘 만들어진 것을 모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중에 어떤 것은 조형이 완벽하여 예술품으로 손색이 없는 귀한 찻사발[茶碗]이 되었고 값도 엄청나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전통차를 마시는 습관을 길이 보전하고 차인들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진주지역의 교육계 인사와 사업가 몇 분(유당·아천·태정·다농·경해·무전 등)이 모여 차 모임을 만들자고 발의를 하였다. 아인이 발기하고 조직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고문 격으로 효당이 있었고, 비봉루의 은초 정명수도 찻 자리를 제공하였다. 회장은 태정박물관 관장을 지낸 김창문씨(작고), 총무는 사업가 무전 최규진씨가 맡았다. 처음에는 회장으로 학력이 높은 분이 맡아주었으면 했으나 차인회는 다른 모임과는 달리 지위와 학력을 떠나 순수 소박해야 한다는 뜻을 세워 열성적인 회원을 우선으로 임원진을 추대하였다. 이렇게 해서 전국 최초로 진주차례회(晋州茶禮會)라는 이름으로 1969년 10월 진주에서 차회(茶會)가 결성되었다.

진주차례회가 발족되어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차나무 보급에 앞장선 경상대학교 임학과 김재생 교수와의 인연을 통하여 1970년 4월 1일 일본 나고야 차도회 오모도센케[表千家] 차도사장(茶道師匠) 요시다[吉田]씨 일행 다섯 분을 초청하여 한일 차문화 교례회를 가졌으며, 대아고등학교 교장실, 다솔사, 남해 하천재에서 차회를 열기도 하였다. 한일 간에 이와 같은 차문화 교류를 빈번히 갖자고 요시다가 제안 하면서 차 공원(tea park) 같은 것을 세운다면 재미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차 마시는 법은 그때까지도 일정한 모양새를 갖추지는 못하여 그 방법을 고민하고 있는 터였다. 일본과의 차문화 교류도 그런 고민의 풀이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진주차례회는 1977년에 진주차도회로, 1979년 진주차인회로 개칭하여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현대생활에 차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전국을 상대할 수 있는 단체가 요구되었다. 이에 효당을 중심으로 한 전국 규모의 차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차도회(韓國茶道會)가 1977년 1월 16일 다솔사에서 발족을 보게 되어 차문화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진주 차맛’의 전국적 확산]

1977년 1월 16일 다솔사에서 한국차도회가 발족되었다.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갖는 전국 규모의 차모임이었다. 진주차인회 회원들을 비롯하여 차생활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과 요구가 증폭되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으므로 차도회와 같은 모임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보급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들이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의견이 모아져 한국차도회 결성의 발단이 되었다.

효당 최범술을 회장으로 하여 탄생한 한국차도회는 그 본부를 다솔사에 두고, 그 지회는 서울지구·부산지구·대구지구·광주지구·대전지구·진주지구를 두었다. 각 지회에서는 지회장을 두고 실제적인 일을 주관해 나가는 상임이사·재무이사 등으로 하고 간사는 본 다솔사에서 효당을 모시고 실제로 일을 하는 데 도뭄을 줄 수 있는 약간 명으로 구성하였다. 그 후로 차생활 문화운동은 1980년에 접어들면서 전국 단위 규모가 되었다.

효당이 사망한 이후 전국적으로 차에 관한 관심을 확산시키게 하는 중심에는 언제나 아인이 있었으며, 진주차도회가 한국차인회 창립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서울 오류동 별장에서 진주 3인을 포함해서 13인이 한국차인회(韓國茶人會)를 발기하였다. 이어서 서울 무역회관에서 창립행사를 가지고 회장에 차나무 연구가인 식물학자 이덕봉 서울대 교수를 선임하고, 부회장에 아인과 명원 김미희 여사, 그리고 고문에 박동선씨가 추대되었다. 아인은 지회장 겸 진주차인회 회장을 맡았다. 그 후로 아인은 차회 고문으로서 주요 업무에 조언하였다. 마침내 1979년 1월 20일 한국차인회(사단법인 한국차인연합회, Korea Traditional Tea Culture Association)가 정식으로 창립되었다. 설립 목적은 국내외 차인들의 모임인 단위 단체를 육성하고 국민 차생활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국민정신을 함양하는 데 두었다.

한국차인회가 창립된 지도 이십여 년이나 흘러 그동안 한국의 차문화운동에 지대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 현재 전국에 대략 140개가 넘는 차회 단체가 생겨나게 되었으며, 그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차를 즐기게 되고 차생산량도 증가하고 질도 높아졌다. 그리고 차생활에 필요한 도구에 대한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도자기·목공예·금속공예 산업이 차문화와 함께 발전하였다. 차와 관련된 많은 서적들이 출판되었고, 중국·일본 등 외국과 차문화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차인연합회는 1980년 4월에, 조선 후기 「동차송(東茶頌)」, 『차신전(茶神傳)』을 지어 한국 차문화사에 담론의 재료를 풍부하게 해주신 초의선사(艸衣禪師)[1786~1866]를 기리기 위해 해남 대흥사 일지암(一枝菴)을 복원하였다. 초의선사의 제자 되는 응송 박영희가 노환으로 몸이 불편하여 아인을 비롯한 해남차인회 등 차인들이 돕고 부축하며 일지암의 위치를 찾아냈고, 오늘날의 그 장소에 여러 사람들의 헌금과 노고로 복원사업을 일구어냈다.

1981년 5월 25일 진주 촉석루에서 진주차인회 주관으로 민족의 차문화 전통을 계승하고 새로운 차문화를 창조하려는 뜻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매년 이 날을 ‘차의 날’로 정한다고 선포하였다. 이는 민족의 차문화 전통을 계승하고 새로운 차문화를 창조하려는 뜻에서 입춘에서 1백일째쯤 햇차가 나오는 이 날을 차의 날로 선정하여 지정한 것이다. 이 날 행사는‘차의 날’제정 선언을 마치고, 차 시배지역인 하동 쌍계사 입구로 자리를 옮겨 대렴(大廉) 공의 추원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가졌다.

이처럼 1천여년의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단절되어가던 차문화를 복원하고 재건하기 위한 움직임에는 많은 사람들이 애를 썼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오늘날의 한국 차생활 문화운동이 더욱 더 구체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게 된 것이다. 진주는 우리나라 차시배지가 지리산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이론과 실천이 뒷받침되어 현대 차생활문화의 발원지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다솔사 효당, 오민박물관의 아인, 진주차인회 회원들이 이루어낸 ‘진주 차맛’은 바로 진주지역 사람들의 풍류(風流)와 멋에서 나왔고, 그러한 차에 대한 열의와 정성은 확대되어 현대 한국차정신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진주 차맛’의 의의와 기대]

차생활은 부분과 전체를 연결하며 지금, 바로, 여기서 실천되기를 바라는 생활철학이다. 차생활 세계는 인간세계·사물세계·자연세계 모두를 아우르는 일종의 종합예술이다.

차 자체가 일상생활에 적용되면서 차문화 관련 산업의 뒷받침이 필요하게 되었다. 차의 사회로 확산되면서 품질 좋은 차와 차기·찻상·찻장·쇠주전자·보자기 등과 차생활을 위해 만들어진 도예·목공예·금속공예·섬유공예는 또 다른 독특한 차문화 작품을 이루게 된다.

물론 찻잎으로 녹차·가루차(말차)·황차·발효차·홍차를 만들지만, 그것을 산업화하여 차음료·차음식·건강식품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그리고 차회 모임에서 감상되는 서예나 그림, 그리고 꽃은 차의 예술이 다른 예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차실’이라는, 차를 마시는 공간은 차의 정원과 어울려야 한다. 차실의 조형에 대한 탐구는 내부적으로 오늘날의 건축구조에 대한 고정관념을 반성하게 하고, 외부적으로는 조경학과 더불어 도시조형·자연경관의 조화를 바란다.

그리고 지리산과 남해에 이르는 해상과 산악권의 도로망을 이용하는 강우지역의 차문화 관광벨트를 조성하고, 차밭-도자기 공방-차도구 공방-차실-찻집과 연계하여 진주지역의 자연과 정신, 그리고 산물을 결합시켜 문화상품을 창안해나갈 수도 있다.

진주성진양호, 그리고 인사동 골동품거리를 포함해서 축제 한마당인 개천예술제와 연계하여 진주만의 특색 있는 입체상품시장을 만들어 부가가치를 높여가야 한다.

가정의 문화란 그 집 어른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가정의 문화가 결국 국가 문화의 기강이 되므로, 학교생활관 교육과 함께 차생활 교육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차생활은 가정과 학교, 직장 생활의 바쁜 와중에서 몸과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를 위해 차회 결성, 차 관련 책자의 발간, 차문화원의 활용 등 차문화의 사회화 사업을 펴가면서 시민과 사회에 끊임없이 신선한 자극을 주어 건강한 시민, 품격 있는 사회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진주의 물은 지리산의 맑은 정기이다. 이 맑은 정기는 영원히 남강을 통하여 흘러내려야 한다. 진주시민과 이웃지역은 그 물을 먹고 살아가야 한다. 만약 그 물길이 오염되거나 차단된다면 시민들의 건강을 잃게 된다. 따라서 차생활을 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자연환경이 오염되지 않도록 감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진주 차맛’을 이루는 차문화를 통하여 진주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동참할 뿐만 아니라 진주가 국제도시로 발전하는 데도 기여할 것이다. 도시 경관과 건축물도 지리산-남강-진주-남해라는 거대한 조형에 순응하고 있는지, 과연 산과 숲, 그리고 물로 둘러싸인 문화예술의 도시로 변모해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국내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도 즐겨 찾는 아름다운 도시 진주, 숲의 도시, 물의 도시, 차의 도시 진주로 만들어 가야 한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신나는 도시여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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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2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1) 촉석루 현판‘南將臺(남장대)’(촉석루의 옛 이름)를 올리기도 하였다 ->촉석루의 옛 이름 현판인 ‘남장대(南將臺)’를 올리기도 하였다 2) 산강이나 의재 허백련도 의곡사에서 기거하곤 하였다 ->산강(山康) 변영만(卞榮晩)이나 의재 허백련도 의곡사에서 기거하곤 하였다 〇 인명 태깅 처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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