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200 |
---|---|
영어의미역 | Jinju Owangdae Mask Danc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작품/무용과 민속극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집필자 | 정병헌 |
[정의]
진주지역에 전승되어오는 탈놀음.
[개설]
진주 오광대 탈놀음에는 토박이 탈놀음, 솟대쟁이패 오광대, 도동오광대가 있다. 오광대(五廣大)는 그 어원상‘다섯 광대의 놀음’이라는 뜻을 가지는데, 여기서 ‘광대’란‘탈을 쓰고 노는 사람’을 말한다. 또한 다섯이란 수는 오행사상(五行思想)에 근거한 오방(五方) 개념에서 온 것이다. 이는 중앙과 동서남북의 다섯 방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오방신장놀음, 오문둥이놀음에서 잘 나타나는데, 특히 오방신장은 오행사상과 벽사관념이 결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주 시내에서는 음력 정월 보름날 저녁에 오광대를 놀았는데, 봉곡동 타작마당거리와 남강 백사장 등에서 주로 공연되었다. 말년에는 중안동 제3야학 운동장, 상봉동 정상정미소 앞마당, 평안동 삼포극장 등에서도 놀았다고 한다.
[형성과 역사]
진주오광대는 경상남도지역에 산재한 야유(野游) 및 오광대(五廣大) 계통 가면극 중 낙동강 서편에 분포하는 오광대 중의 하나로 1930년대에 인멸되었다가 지난 1998년 재연되었다.
일반적으로 진주오광대는 진주에 살면서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한량들이 모여서 놀았던 토박이 탈놀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탈놀음 연구자들에 따르면 진주지역에는 시내의 토착오광대 이외에 다른 두 종류의 오광대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진주에 본거지를 두고 전국적으로 활동한 유랑 예인집단 솟대쟁이패의 오광대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 진주군 도동면 소재지였던 하대리(지금의 하대동)에 전승되던 도동오광대이다. 솟대쟁이패의 오광대는 유랑광대의 연희로서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탈놀음이고, 반면에 도동오광대는 향인광대가 연희하는 토착적이고 농촌적인 탈놀음이었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오광대들이 끊임없이 교류하고 상호 영향을 주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유랑광대는 흥행을 위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 등을 찾아다녔고, 혹한이나 비수기에는 진주에 돌아와 마을굿에도 참여하고, 정월대보름에 탈놀음을 벌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과 향인광대 사이의 교류는 자연히 빈번하고 친밀했으며, 향인광대가 유랑광대로 나서는가 하면, 유랑광대가 향인광대로 토착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송석하(宋錫夏) 등이 보고하였듯이, 구전자료에 의하면 진주오광대는 110년 전 초계 밤마리(합천군 덕곡면 율리지)의 대광대패가 진주에 와서 공연하는 것을 보고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고, 신반(지금의 의령군 부림면 신반리)의 대광대패에 의해서 창설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근거는 희박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진주오광대는 신라의 탈놀이로부터 전승된 토착탈놀이가 낙동강 유역의 다른 탈놀이들과 유랑광대의 탈놀음의 영향을 받으며 발전되어 19세기 말에 와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진주 고을의 세시풍속적 대동놀이로서 전승되다가 1920년경에 쇠퇴하였으나, 1930년대 민족주의적 향토문화부흥운동과 때를 같이하여 지역의 부인위친계, 제3야학회, 각 신문지국의 후원을 받아 재공연되었다. 이 시기의 공연에는 지역의 지식층과 청장년들, 그리고 기생들도 참여하였다.
바로 이 공연을 영문학자 정인섭(鄭寅燮)이 직접 관람하고, 당시 말뚝이역을 맡았던 강석진(姜錫珍)의 구술로 채록하여 1933년 조선민속학회의 기관지 『조선민속(朝鮮民俗) 제1호』에 보고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탈춤으로서 최초의 채록본이다. 그 후 송석하에 의해 다시 채록되어[박용근(朴龍根) 구술], 1934년 4월 21일부터 30일 사이에 『동아일보』에 실렸다. 1936년 일제의 탄압에 의해서 중단되었다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재연되었고, 1960년 초 재연을 위하여 신길룡(愼吉龍) 주관, 김치권(金致權) 구술, 김준호(金駿鎬) 필사로 연희본인 「오광대 각본」이 다시 만들어졌으나, 재연하지는 못하였다. 그 후 60년 동안 전승이 끊겼다가, 1997년부터 진주시민들이 시민운동의 차원에서 재연작업을 진행하여 1998년 5월 역사적인 재연이 이루어지고, 2003년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기본성격]
우리나라의 탈놀음을 갈래짓는 일에서 학자들마다 견해가 조금씩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탈놀음을 분류하는 몇 가지 방식이 있다.
먼저 탈놀음이 굿으로부터 극으로 발전되어온 연행물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제의적 성격이 강한 굿탈놀음(이를 서낭굿탈놀이라고도 하는데, 하회별신굿·강릉관노탈놀이 등이 대표적이다)과 연극적 성격이 강한 극탈놀음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에 의하면 진주오광대는 극탈놀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진주오광대에도 여전히 굿의 흔적이 있어서 제의식적 춤이라고 보아야 할 오방신장놀음과 같은 마당이 있다.
또한 탈놀음을 그 놀이 주체를 기준으로 전문유랑예인들이 행하던 떠돌이 극탈놀음과 각 지역의 토박이 예인들이 행하던 토박이 극탈놀음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때 진주오광대는 이 두 가지 유형을 모두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진주오광대는 진주 시내의 토박이 오광대와 도동오광대, 그리고 솟대쟁이패의 오광대를 포괄하기 때문이다. 진주의 솟대쟁이패는 의령 신반의 대광대패와 더불어 경상도지역을 대표하는 전문예인집단이었다. 그들은 고려나 조선의 나례에서 행해졌던 잡희를 전승하여 나름대로 광대들의 놀이 형태를 발전시켰다.
솟대쟁이패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송순갑(宋淳甲)에 의하면, 솟대쟁이패는 솟대타기를 중심으로 풍물·요술(얼른)·대접돌리기(버나)·땅재주(살판)·병신굿(병신놀이)을 공연하는 이외에 오광대 탈놀음을 공연하였다. 마지막으로 극탈놀음을 산대도감계통극[산대도감계통극으로는 산대놀이(경기지방: 양주별산대놀이·송파산대놀이)와 해서탈춤(봉산탈춤·강령탈춤·은율탈춤) 이 있다]과 비산대도감계통극으로 구분할 때, 영남지방의 야유(野游) 및 오광대는 비산대도감계통극으로 분류된다.
도동오광대의 마지막 전승자인 배또문준(현 진주오광대 기능보유자)에 의하면 도동오광대는 세시풍속적 놀이로서 정월대보름에 서낭제와 지신밟기에 이어서 놀아졌다고 한다. 음력 정초에 풍물을 시작하여, 당산굿·정자굿·동사굿·집돌금(지신밟기)을 하고 나서, 음력 정월 보름날 오후에 동사 앞 논바닥에서 풍물의 마지막 행사인 파짓굿을 치고 술을 나누어 마시고 일단 해산하여 각자 집으로 가서 저녁을 먹고 와서 그 자리에 횃불을 밝히고 오후 8시경부터 자정이 넘도록 오광대를 놀았다고 한다.
[구성과 줄거리]
진주오광대의 대본으로는 가장 먼저 채록한 정인섭본(1928), 민속학자 송석하가 직접 놀음을 보고 채록한 송석하본(1934), 최상수(崔常壽)본(1958), 그리고 진주오광대 재연을 위해서 마지막 연희자들의 구술을 통해서 채록한 리명길(李命吉)본(1961)의 네 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 장에서의 놀이 줄거리에 대한 설명은‘진주오광대탈놀음’을 재연하기 위해 1997년 새로 구성되어 경상남도의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진주오광대 연희에 기반이 되었던 복원연희본에 의거하였다. 복원연희본은 송석하본을 기본으로 삼고, 최상수본과 리명길본을 참고하였는데, 특히 리명길본에서 마지막 구술자들이 기록한 재담을 많이 채용하였다.
진주오광대는 모두 다섯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마당은 오방신장놀음이다. 염불타령에 따라서 중앙 황제장군, 동방 청제장군, 남방 적제장군, 서방 백제장군, 북방 흑제장군이 각기 자기 방위를 가리키는 색깔의 오색 철릭을 입고 호수를 단 갓을 쓰고 차례로 춤을 추며 등장한다. 음악이 굿거리로 넘어가면 무언으로 벽사의 춤을 추다가 차례로 퇴장한다. 다섯 신장은 공간적으로 동(청제)·서(백제)·남(적제)·북(흑제)·중앙(황제), 곧 우주 전체를 뜻하고, 시간적으로 봄(청제)·여름(적제)·가을(백제)·겨울(흑제)·태양(황제), 곧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을 뜻한다. 우주 전체와 영원을 다스리는 신장들이 내려와 춤을 추면서 땅 위의 모든 잡귀와 잡신을 누르고 몰아내는 마당이다. 동시에 이 마당은 탈놀이판을 정화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둘째마당은 문둥놀음이다. 요란한 장단과 함께 관중 속에서 오방색의 탈을 쓴 다섯 문둥광대가 느닷없이 나타나면서 자빠지기도 하고 구르기도 하며 야단스러운 춤을 춘다. 춤을 끝내고 투전놀음을 하는데, 어딩이가 무시르미를 업고 들어와서 판돈을 훔쳐 달아났다가 잡혀 와서 혼이 나고 마침내 돈을 얻어서 물러나면 문둥광대들이 흥겨운 춤을 춘다. 이 마당은 다섯 문둥이, 반신불수인 어딩이, 천연두 환자인 무시르미의 병신놀이를 통해서 불구와 질병 때문에 소외당하고 심성이 뒤틀린 최하층민들의 애환을 나타낸다. 인류학적 해석에 따르면, 여기서 등장하는 불구자들과 환자는 모두 지신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마당은 동방 청탈, 남방 적탈, 서방 백탈, 북방 흑탈, 중앙 황탈, 곧 오방지신이 나타나서 갖가지 병신춤을 추고 놀면서 무서운 질병의 신을 몰아내고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지켜주는 내용으로 해석될 수 있다.
셋째마당은 말뚝이놀음인데, 말뚝이가 문둥광대들을 쫒아내고 나면, 염불타령 장단에 맞추어 생원·차생원·옹생원이 차례대로 등장하여 말뚝이와 재담을 주고받는데, 말뚝이가 생원님을 찾아서 평양과 서울 등지로 돌아다니다가 진주에 내려와 팔선녀를 모았으니 술 마시고 놀고 가겠다고 한다. 춤을 한바탕 질펀하게 추고 나서 재담을 주고받는 장면은 우리나라 탈춤의 공통분모 중 하나인 말뚝이놀음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한없이 유식한 하인 말뚝이가 무식한 주인 생원님과 주인의 친구인 옹생원·차생원을 골려먹는 놀이로서 신분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사회제도의 모순을 보여주는 마당이다. 특히 양반과 말뚝이의 대결을 통해서 특권계급의 몰락과 노비의 해방을 갈구하는 내용을 함의한다.
넷째마당은 중놀음인데, 팔선녀와 양반들이 춤을 추고 있는 동안 노장이 상좌를 데리고 나타난다. 노장은 상좌를 시켜 두 미인을 호려서 춤추고 놀다가 사랑에 빠져서 가사 장삼을 벗어던진다. 생원이 말뚝이를 시켜 노장을 잡아들이게 하니, 노장은 곤욕을 치르게 된다. 산 속에서 수도하던 스님이 속세에 내려왔다가 양반들이 팔선녀와 어울려 노는 것을 보고 세상 재미에 넋을 빼앗기는 놀이로서, 타락한 중의 모습을 비판하고, 수도자의 삶과 세속인의 삶을 대조하여 참다운 삶이 어떤 것인지를 묻는 마당이다. 당시 불교의 타락을 비판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다섯째마당은 할미놀음인데, 허리를 내놓고 담뱃대를 문 할미광대가 재담을 하며 나타나고, 집 나갔다 돌아오던 생원님을 만나지만 색시를 둘씩이나 데려온 사실을 알고는 풍파가 일어난다. 말다툼을 하다가 영감에게 차여 할미가 죽자, 놀라 제정신으로 돌아온 영감이 백방으로 애를 쓰다가 마침내 무당의 굿으로 할미가 살아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한바탕 즐거운 춤판을 벌인다. 무책임한 남편 때문에 여인의 삶과 가정이 어떻게 우여곡절을 겪는가를 보여주는 마당으로 당시 가부장제에 희생당했던 여성의 운명을 잘 그려내고 있다.
[탈]
진주오광대의 탈로는, 1930년대 송석하가 수집한 탈 17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960년대 최상수가 수집한 탈 13점이 국립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탈은 오방신장 6점(지제), 문둥이 5점(박제), 어딩이 1점(지제), 무시르미 1점(지제), 노장 1점(지제), 할미 1점(지제), 순사 겸 소무 2점(지제) 등이다. 국립민속박물관에 보관된 탈 13점은 오방신장 5점(목제), 문둥이 5점(목제), 옹생원 1점(목제), 차생원 1점(목제), 노장 1점(목제) 등이다. 이 탈들은 1996년 고려대 전경욱 교수에 의해서 발견되어 학계에 알려졌다.
오방신장의 탈은 마분지로 된 종이탈로서 가로 27㎝, 세로 74㎝의 크기인데, 얼굴과 긴 턱수염이 함께 연결된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양 눈과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가도록 색칠하였고, 눈동자를 검게 칠하였다. 눈과 눈썹 사이에 구멍을 뚫어서 사람이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하였다. 콧수염과 턱수염을 길게 그려 넣었고 양쪽 귀를 크고 길게 재단하였다. 코는 마분지를 접어서 돌출하도록 붙였고, 입은 구멍을 냈다. 가산오광대의 탈과 재료와 모양에서 유사하다.(그림 6 오방신장탈)
문둥이탈은 종이탈로 입이 매우 크고 길게 구멍을 뚫었고, 두 개의 이빨이 매우 길어 아랫입술을 뚫고 나가 있다. 코는 각이 지고 투박하게 표현하였고, 양쪽 눈은 동그랗게 구멍을 내고 그 주위를 도드라지게 표현하여 해학적인 모습이다.(그림 7 문둥이탈)
할미탈도 종이탈로 가로 23㎝, 세로 28㎝인데, 머리·눈썹·주름을 검은색으로 그렸고, 입은 구멍을 뚫었다.(그림 8 할미탈)
소무탈은 가로 21㎝, 세로 26.5㎝인데, 탈의 바탕은 계란색이고, 머리·눈썹·눈·수염은 검은색으로 그렸다. 입은 구멍을 뚫었고, 눈 아래 구멍이 있어 밖을 내다볼 수 있게 하였다.(그림 9 소무탈)
어딩이탈은 종이탈로서, 가로 22㎝, 세로 32.5㎝이다. 탈의 바탕은 검붉은색이고, 머리·눈썹·눈을 그렸다. 송곳니가 크게 드러나 보인다. 입 안을 빨간색으로 칠했고 수염이 풍성하다.(그림 10 어딩이탈)
상좌탈은 가로 22㎝, 세로 26㎝인데, 탈의 바탕은 계란색이며, 머리와 수염은 검은 점을 찍어 표현하였고, 눈과 눈썹은 검게 그렸다. 역시 눈썹과 눈 사이에 구멍을 뚫어서 밖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그림 11 상좌탈)
복원된 진주오광대의 탈은 송석하가 수집한 탈들을 실측하고 촬영하여 재현하였고, 나머지 탈들은 송석하가 남긴 진주오광대 사진(그림 12)을 기반으로 남아 있는 탈들과 인근 가산오광대 탈들의 이미지를 참조하여 제작하였다.
[진주오광대의 장단과 춤]
송석하의 기록에 의하면, 진주오광대 탈놀음은 반주음악을 삼현육각(피리 2개, 대금, 해금, 장구, 북 등)으로 연주하고 필요에 따라 꽹과리·징 등의 풍물악기를 사용하는데, 이는 꽹과리 위주의 풍물악기를 주로 사용하는 여타의 오광대나 야유와 다른 점이다. 이러한 반주악기로 미루어 진주의 교방예술이 민중예술인 진주오광대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진주오광대의 셋째마당 말뚝이놀음에 등장하는 팔선녀의 춤이 진주의 교방춤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에서도 짐작된다.
진주오광대에서는 굿거리장단이 가장 많이 사용되지만, 염불타령·굿거리·세마치·덧뵈기·무정적궁이장단 등이 사용된다. 무정적궁이장단은 타령과 유사하다. 한편 배또문준에 의하면 도동오광대에서는 반주 악기로 주로 풍물 악기를 사용하였고, 굿거리장단을 많이 치는데, 느린 굿거리를‘저정작구’라고 표현하였다. 잦은 굿거리는 ‘정작쿵작’이라고 부른다. 이 장단에 맞추어 주로 덧배기춤을 춘다.
진주오광대에는 오방신장의 진춤·문둥이춤·말뚝이춤·양반춤·팔선녀춤·할미춤 등이 등장하는데, 이 모든 춤은 기본적으로 덧배기춤(덧뵈기춤·덧베기춤·덧백이춤·떨배기춤 등으로 혼용됨)을 바탕으로 한다. 덧배기춤은 어떤 특징적 춤의 명칭이 아닌 경상남도 지방 춤의 대명사로 사용되고 있으며, 오광대에서 덧배기춤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춤을 오광대에서 그대로 차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덧배기춤은 한국춤의 유형 중에서 가장 고형(古形)의 것으로 전통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된다.
덧배기춤은 무릎 굴신과 어깨춤이 다른 춤에 비해서 강조되는데, 무릎으로부터 멋을 말아 올려 어깨로 물결치듯 풀어내는 듯한 형태로서 남성적인 포용력과 관대함이 춤 안에 배여 있다. 발디딤은 발 앞쪽부터 먼저 디디며, 팔놀림은 일자 사위를 주로 많이 사용하고, 팔을 어깨 아래로 내리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덧배기춤에는 반드시 배김새가 있는데, 이는 춤을 추어 나가다가 한 번씩 크게 배겨주는 것인데, 군무일 경우에는 다 함께 배기는 동작에서 일체감과 해탈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일반적인 굿거리춤에 비해서 강하고 활기차며 악귀를 물리치는 구나무(驅儺舞)의 성격을 띠고 있다.
[재연과정과 현황]
진주오광대는 우리나라 탈놀음 중에서 최초로 그 대본이 채록된 탈놀음이자 최초로 연구 대상이 되었던 가면극이다. 초기의 관심을 반영하듯이 채록본이 4개, 남아 있는 30여개의 탈, 생존하는 연희자의 증언과 전수 기량 등 재연의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던 탈놀음이었다.
이에 1997년 5월‘진주탈춤 한마당 학술심포지움’에서 진주오광대 복원의 가능성과 필연성이 제기되었고, 1997년 9월 정병훈(경상대학교 철학과 교수)과 강동옥(현 민예총 진주지부장)이 주동이 되어 대학 탈패 출신을 중심으로, 연극인·악사·농민·교사·교수·공무원·회사원·간호사·유치원교사·주부·대학생 등 각종 직업의 40여명을 재연준비 회원으로 모집하였다. 1998년 1월 김수업(당시 경상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이 중심이 되어 진주시민들이 진주오광대 복원사업회를 발족시켰고, 8백여 명의 진주시민들이 3천만원 이상의 성금을 모았는데, 진주시도 이 재연사업에 2천3백만원을 지원하였다.
생존 연희자 배또문준의 지도로 재연작업을 한 끝에 1년 뒤인 1998년 5월 23일 제3회 진주탈춤한마당에서 단절된 지 60년 만에 재연에 성공하였다. 진주오광대 재연사업에는 국악인 김수악(진주검무 기능보유자)을 비롯한 탈춤 관련 전문가, 민속학자들의 자문과 도움이 있었다. 진주오광대를 재연하기 위해서는 재담과 탈·의상·음악·춤·연희 등이 모두 원형에 가깝게 재현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재담은 배또문준이 기억하는 부분은 그대로 살리고,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은 1928년의 정인섭본과 1934년 채록된 송석하본을 기반으로 삼았다. 부족한 부분은 최상수본과 더불어 가장 최근의 채록본인 이명길본을 참조하였다. 탈은 1934년 송석하 선생이 수집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해 놓은 것을 박물관 측의 허락을 받아서 정밀 실측하고, 전경욱 교수 등 학계 전문가들과 전문 탈제작자들의 자문을 거쳐서 황병권 회원이 제작하였다. 의상은 한국 전통의상 전문가인 박윤미(당시 경상대 의류학과 박사과정)가 채록본에 나타난 의상에 대한 기술을 토대로 하여, 한국복식사가인 김영숙(문화재 전문위원)의 고증과 자문을 받아서 제작하였다. 음악은 배또문준이 기억하는 장단을 토대로 하여, 김상철(KBS국악관현악단)·이중수(선유물풍연구소)·최오성(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 등이 김수악(진주검무보유자)·정영만(남해안별신굿보유자)의 자문을 받아서 정리하였다. 춤은 배또문준의 춤사위를 기본으로 하여, 김미숙(경상대 무용과 교수)·김수악의 자문을 받아서 재연하였다. 특히 김수악은 셋째과장(양반말뚝이놀음)의 팔선녀 춤을 구성하였다. 연희는 배또문준의 연희 동작을 기본으로 하여, 채희완(부산대 무용과 교수)·정승천(극단 어화둥둥 대표)의 자문과 지도를 받았다.
이후 2000년에 진주오광대 복원사업회(이사장 김장하, 회장 정병훈, 사무국장 강동옥)를 진주오광대 보존회로 개칭하고, 진주오광대의 전승과 보급에 노력해온 결과 2003년에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었다. 기능보유자로 배또문준, 기능보유자 후보로 강동옥·하계윤, 전수조교로 남성진이 지정되어 있다.
현재 진주시 전통예술회관에 연습실을 두고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매년 정기공연을 비롯하여 수차례의 초청공연 등을 통해 탈춤문화의 보급과 창조적 전승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