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213 |
---|---|
영어공식명칭 | Jinju Bull Fighting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집필자 | 강병주 |
[정의]
두 소를 마주 세워 싸우게 하고 이를 즐기는, 진주지역에 전래된 전통 민속놀이.
[기록으로 만나는 진주 소싸움]
진주 소싸움에 관하여는 여러 곳에 그 기록이 전해지고 사진자료들도 많이 남아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12권 〈소싸움〉항목에서는 “경상남도 지방에서 주로 성행하였으며…… 경상남도 진주에서는 남강의 모랫벌에서 소싸움을 해왔으나…… ”라고 적고 있다. 같은 책 제21권의 〈진주시〉 항목의 민속에는 “소싸움은 팔월 추석 중에 남강의 백사장에서 벌어졌다. 이 소싸움의 유래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신라가 백제와 싸워 이긴 전승 기념잔치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곳에서 농우(農牛)를 많이 잡아먹어서 소들을 위령하기 위하여 시작하였다는 설과, 고려 말엽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겼다는 설 등이 구전되고 있다. 요즘도 추석이나 개천예술제 때 공설운동장 혹은 남강 고수부지에서 소싸움대회가 개최되고 있다.”고 적고 있다.
또, 『조선의 민속놀이』(북한 간행)에 실린 〈소싸움놀이〉에서는“경상남도 일대에서는 지금으로부터 오래지 않은 시기까지도 줄다리기와 더불어 소싸움이 큰 연중행사로 되어 왔었다. 매년 음력 8월 보름을 전후로 이곳 주민들은 소싸움을 붙이고 그것을 구경하며 즐겼다. 벌써 음력 7월 보름쯤부터 동구 밖 풀밭에서 소싸움이 시작되며 8월 보름에는 소싸움판이 크게 벌어진다. 이 날은 구경꾼들로 들끓으며 소의 장식도 역시 대단하였다. 이 날 소 임자는 소를 깨끗하게 씻어준 다음 가지각색 천으로 정성들여 꼰 고삐를 메우고 소머리에는 갖가지 아름다운 천으로 정성들여 꼰 고삐를 메우고 소머리에는 각가지 아름다운 천으로 장식을 해주며 소 목에는 번쩍거리는 쇠방울을 단다. 소 임자는 깨끗한 무명옷을 입고 머리에는 붉은 수건을 옆으로 비껴 동이며 오른편 허리에다는 무릎까지 닿도록 각색 실로 수놓은 주머니를 차고 소를 몰아 들어온다. (중략) 진주에서 소싸움 장소는 남강 모래판에서 하였는데, 이전에는 아무러한 설비도 없었으나 점차 관람자가 많아져서 강둑과 강변에 꼭 들어차므로 질상서(秩廂序)를 유지하기 위하여 100미터쯤 되게 사방에 줄을 둘러 쳤다. 소싸움에 앞서 소싸움판을 주관하는 도감(都監)이 선발되는데, 대개는 다년간 경험이 있는 연노자가 뽑혔다. 싸움에 붙일 짝소는 년령, 체구를 고려하여 비슷한 것끼리 고르고 싸움은 약한 소들부터 시킨다.(중략) 진주에서 그렇게 성황을 이루던 소싸움은 3·1운동을 계기로 일제경찰의 탄압을 받아 하지 못하게 되였다. 일제는 인민들이 많이 모이면 진보적인 단체들이 그 기회를 이용할 수 있다고 하여 금지해 버렸다. 그러나 인민들의 반항에 못 이겨 몇 해 후에는 다시 소싸움을 부득이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가 소싸움을 다시 승인한 뒷궁리에는 조선 농민들이 잘 먹여 키운 소를 더 많이 빼앗아 내려는 검은 뱃속이 있었기 때문이였다.”고 기록하였다.
『조선도읍대관』〈진주읍〉편에서는 첫머리에 1934년 1월 20일의 날짜가 찍힌 진주우편국에서 사용한 스탬프인장이 실려 있는데, 인장의 그림 구성이 진주의 명소인 촉석루를 배경으로 한, 남강에서의 소싸움 모습이 새겨져 있어 근대에도 진주의 소싸움은 대표적인 지역의 민속놀이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우리나라 지방지의 효시인 『경남일보』 1909년 11월 23일자의 〈사조(詞藻)〉라는 대목에서 『경남일보』 주필이던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선생이 진양잡영(晋陽雜詠)」이라는 소제목으로 진양(진주)을 노래한 것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진양잡영
農家八月濁醪香(농가팔월탁료향)
秋穀垂花滿地黃(추곡수화만지황)
千古英雄爭戰地(천고영웅쟁전지)
至今留作鬪牛場(지금유작투우장)
농가의 8월에는 술향기 번져나고
가을 곡식 드리운 꽃은 땅에 가득 누렇네
천고의 영웅들 나라 지킨 이 땅인데
지금에 이르러 투우장이 되었구나
秋草休耕牧子閒(추초휴경목자한)
健牛生力奮如山(건우생력분여산)
紛紛角觗爭衝突(분분각저쟁충돌)
絶勝齊軍破墨還(절승재군파묵환)
가을 풀 우거지고 밭갈이 쉬었기로 목동들은 한가한데
억센 소 힘이 솟아 그 분기 산 같구나
엉킨 뿔시름 다투어 충돌하니
제(齊) 나라 군사는 절묘한 승리로 묵적(墨翟)군을 파하고 돌아오는 듯
그리고 말미에 “評曰 當地鬪牛之戱가 甚盛야 十百其羣이 大開衝突면 其騰躍咆哮之狀이 誠一壯觀也러라”고 적고 있다.
[소싸움의 유래]
기록을 통하여 살펴보면, 소싸움은 멀리는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고려시대에도 성행하였으며 조선시대까지도 우리 민족 고유의 민속놀이로 성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소싸움이라는 것이 많은 구경꾼을 동원하여 넓은 백사장이나 공지에서 행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동네 아이들끼리 소꼴 먹이러 가서는 심심풀이로 소싸움을 붙이는 경우도 있어 농경을 주로 하던 전통시대에 있어서 소싸움은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전통 민속놀이였다.
[진주 소싸움의 어제와 오늘]
오늘날 전국 제일의 명성을 얻고 있는 진주 소싸움은 남강의 백사장을 중심으로 시행되어 규모나 역사성에 있어서 가장 유명하였다. 이러한 진주 소싸움이 오늘날 행해지는 소싸움의 형태를 갖추게 되는 기원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진주 소싸움에 대하여는 1925년에 진양군수였던 산정정도(山丁正道)가 「경남 진주투우에 관하여」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이 글의 목차를 살펴보면 1. 연혁 2. 한 차례 중단과 최근의 부활 3. 투우용 소 4. 투우상황 5. 투우가 소 개량에 미치는 영향 6. 스모와 투우의 관계 등으로 발표되었다. 한편, 이 글의 〈연혁조〉에서는 진주 소싸움의 발생 내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884년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진주성 내의 부호인 김선여(金善汝)와 성외의 부농인 오작지(吳作之) 등 두 사람은 소를 매우 사랑하여 항상 우량소를 사육하여 쌍방에게 과시하고 서로 우열을 다투어오다가 우연히 양인의 합의하에 투우를 공개적으로 이루었는데 성내의 주민들은 김선여의 소에게, 성외의 주민들은 오작지의 소에게 서로 성원을 보내게 되어, 결국 성내와 성외의 승패를 가르는 일이 되어 이 투우가 성황을 이루게 되었고, 이것이 바탕이 되어 차츰 투우가 성대해지고 매년 음력 4월 8일(초파일), 7월 15일(칠석날), 8월 15일~17일(추석절) 정례적으로 행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8월 15일에서 17일까지 3일간 계속되는 경우는 첫째 날인 15일은 진주성 읍내에서, 16일은 진주 인접 면인 도동면에서, 17일은 그 인접 면인 금산면에서 각기 행하는 것으로 정해졌는데, 이 날은 인근 향리로부터 구경꾼이 수만 명 운집하여 지방에서 농민의 오락으로 으뜸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897년경에 진주에 사는 사람들이 뜻을 모아 우승 소에게 상금을 수여하기로 하였고, 당시 군수도 투우가 소 개량에 유익하다고 판단하여 우승 소에 대하여 농구나 식기 또는 상금을 시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으로 민중의 집회를 금지하여 많은 군중이 운집하는 투우도 일본 경찰에 의하여 중단되었다가 1923년 8월에 조선총독부가 축우 장려의 정책과 지방 인사들의 열망으로 다시 열리게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925년에는 야마모토[山本源一]가 「진주명물 투우」라는 글에서 “조선의 유명한 진주 소싸움은 남강의 모래사장에서…… 여러 면에서 이름난 황소나 거친 황소를 뽑아서 출전시키고, 관람자도 먼 거리를 마다않고 몰려들어 투우장을 10겹 20겹으로 둘러서 그 수가 7천~8천명을 넘고, 오후 2시경부터 투우가 시작되어 힘찬 황소가 울음소리와 함께 뿔과 뿔을 부딪치며 싸우는 소리가 낭자하다. 수십 분 또는 몇 분의 짧은 시간에 도망가는 것으로 승부를 결정짓는다.”고 적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면, 오늘날 행해지고 있는 진주 소싸움의 시작과 당시에 진주에서 행해지던 소싸움의 상황과 규모 등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1897년에 시작된 진주 소싸움은 2004년 현재 108회 전국투우대회를 개최하였으며, 경과를 살펴보면 1961년 9월경에 진주투우협회가 결성된 것으로 전해지고 1965년 재건국민운동진주시촉진회에서 주관하여‘재건민속경기대회’라는 이름으로 진주에서 투우대회를 개최하였으며, 1969년에는 전국중추민속제투우대회를 남강댐 밑에서 개최하였다. 이어서 1970년 2월 15일에는 한국투우협회가 창립되어 진주에서는 진주투우협회와 한국투우협회가 양립하여 오다가 2002년 9월 4일 양 투우협회의 합의로 통합하여 ‘한국진주투우협회’라는 이름으로 새 출발을 하였다.
한국진주투우협회에서는 진주 소싸움의 역사와 함께해온 남강둔치인 진주성 서장대 밑에 소싸움 경기장을 설치하여 매년 봄 진주시에서 열리는 논개제 때와 가을에 열리는 개천예술제 때 전국투우대회를 개최하여 200두 이상의 싸움소가 출전하고, 대회기간 내내 수천의 관중이 운집하여 장관을 이루고 있다. 2004년부터는 격주제로 상설투우대회를 개최하여 전통민속을 사랑하고 투우를 즐기는 이들에게 많은 호응을 받고 있다.
[소싸움 기술]
진주 소싸움은 한국진주투우협회에서 주관하여 치르고 있으며 진주시에서는 전통소싸움경기에 관한 법률(2002. 8. 26.)과 전통소싸움경기에 관한 법률시행령·시행규칙(2003. 2. 27.)이 제정됨에 따라 상설 진주소싸움경기장 건립 계획을 수립한 바 있다. 즉 진주시 판문동 477번지[판문오동길 99-7] 일대에 이미 설치된 민속경기장을 중심으로 전천후 경기장을 세우기로 하고 추진 중에 있어 경기장이 완공되고 나면 명실상부한 민속소싸움의 명소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2004년 1월에는 진주 소싸움 캐릭터인‘맹우’의 저작권 등록을 출연하였다. 경기는 한국진주소싸움대회의 규정(총 7조 21개항)에 의하여 치러지고 있으며, 갑종 741㎏ 이상, 을종 650㎏ 이상, 병종 580㎏ 이상으로 규정하여 중량별로 경기를 치르도록 하고 있다. 체급에 따라 주로 사용하는 싸움소의 기술이 다르기는 하지만 기술의 대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들치기 : 머리를 상대 소의 목에 걸쳐서 공격하는 기술로 순발력과 노련미와 체력을 동시에 필요로 하는 기술이다.
○ 목치기 : 상대 소와 대치하다가 뿔로 목을 치는 기술로 서로 탐색과 신경전을 펼칠 때 이어지는 공격기술이다.
○ 머리치기 : 정면에서 서로 머리를 부딪치는 기술로, 소싸움 기술의 기본이며 싸우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기술이다.
○ 밀치기 : 서로 머리를 맞대고 밀어붙이는 기술로 소싸움 기술의 기본이며 튼튼한 체력을 바탕으로 상대방의 움직임을 보고 밀어붙여야 하므로 동물적 감각이 동시에 요구되는 기술이다.
○ 뿔걸이 : 상대 소의 뿔을 뿔로 걸어 누르거나 들어 올리는 기술로 힘과 기술이 동시에 필요한 적극적인 공격기술이다.
○ 연타 : 뿔치기 등으로 상대 소를 흩트려 놓은 다음 자세를 가다듬기 전에 계속 머리치기로 공격하는 기술로 승률이 높다.
○ 옆치기(배치기) : 상대소의 옆으로 돌아 옆구리 쪽 배를 공격하는 기술로 성공하면 경기가 마무리 될 정도로 결정적인 공격기술이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
2011.07.13 |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 1) 경남일보 주필이던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선생이 진양잡영(晋陽雜詠)이라는 소제목으로 ->『경남일보』 주필이던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선생이 「진양잡영(晋陽雜詠)」이라는 소제목으로 2) 農家八月濁醪香(농가팔월독소향) ->農家八月濁醪香(농가팔월탁료향) 3) 紛紛角觗爭衝突(분분각지쟁충돌) ->紛紛角觗爭衝突(분분각저쟁충돌) 4) 절승한 제군들은 목군을 파하고 오네 ->제(齊) 나라 군사는 절묘한 승리로 묵적(墨翟)의 군대를 파하고 돌아오네 〇 지명과 인명 태깅하였음 |
2011.07.13 |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 4) 절승한 제군들은 목군을 파하고 오네 ->제(齊) 나라 군대가 절묘한 승리로 묵적(墨翟) 군을 파하고 돌아오는 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