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216 |
---|---|
영어의미역 | Ancient Tombs of Jinj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집필자 | 조영제 |
[정의]
진주지역에서 발견되는 선사시대부터 가야 등 고대시대까지의 무덤.
[개설]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의 죽음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선 사회적인 존재로서 죽는 것이므로, 장송의례(葬送儀禮)는 개인적·가족적 차원을 넘어서 한 집단 전체 차원의 사회적인 제도가 된다. 따라서 죽음과 이에 부수된 의례의 결과로 생겨난 무덤에는 당연히 사회적 제도인 의례행위(儀禮行爲)가 반영되어 있다. 특히 고인돌처럼 만들기 어려운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들이 의도하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즉 거대한 무덤을 만드는 행위를 통해 죽은 사람이 가졌던 권위 등을 그 후계자가 계승하고, 그것을 사회구성원들에게 널리 알리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매장이 일반적으로 보편화되는 것은 정착생활, 곧 농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이지만, 분묘의 외형적인 정형화는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이루어진다. 고인돌·석관묘(石棺墓)·토광묘(土壙墓)가 그것이며, 심지어 화장(火葬)이나 어린아이의 무덤인 옹관묘(甕棺墓)까지 등장한다. 고인돌은 죽은 사람이 묻힌 장소 위에 커다란 바위를 덮어 뚜껑돌로 삼은 것이며, 석관묘는 얇은 돌을 이용하여 죽은 사람이 들어갈 관을 만든 것이다. 토광묘는 돌을 이용하지 않고 땅을 판 뒤 죽은 사람을 묻은 것인데, 여기에 나무나 갈대와 같은 풀을 사용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이러한 것들은 삭아서 없어졌으므로 오늘날에는 알 수 없다.
이와 같은 고인돌과 석관묘는 청동기시대 사회의 경제적인 풍요와 이를 바탕으로 관념화되고 있는 죽음의 세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특히 고인돌의 무거운 덮개돌을 목적지까지 운반하는 데에는 당시의 토목기술이 총동원되어야 하며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청동기시대 사회가 한 명의 죽음에 대해 투자하는 기술·노력·재산이 막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구석기시대나 신석기시대 사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회적 에너지이며 관념화된 죽음에 대한 의식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대평면의 매옹(埋甕)]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조사한 신석기시대 상촌리 14호 집터 속에서는 집터의 가장자리에 큰 빗살무늬토기를 세워놓고 여기에 사람을 화장한 뒤 남은 뼈를 모아서 묻어 놓은 것이 발견되었다. 인골은 모두 작은 조각으로만 남아 있어서 상태는 매우 불량하다. 아마 어른의 팔 다리 뼈에 해당하는 뼈 조각으로 생각된다.
이 사람 뼈는 죽은 어른을 노천(露天)에서 화장하고 그 뼈만을 추려서 다시 단지에 담아 집터 안의 벽 속에 모셨던 것이다. 이처럼 토기 속에 사람을 매장하는 풍습은 이웃 나라 일본의 신석기시대에서는 비교적 많이 알려진 것이지만,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매장 풍습으로서는 알려진 바가 없는 아주 진귀한 것이다.
[대평면의 고인돌]
고인돌은 뚜껑돌을 중심으로 원형 또는 정사각형으로 강돌을 깔아서 묘역(墓域)을 만들고 가운데에 매장시설을 설치하였으며, 묘역의 주위에 작은 석관묘 여러 기를 배치해놓았다. 아마 고인돌에 묻힌 사람과 주의의 석관묘에 묻힌 사람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고인돌 가운데 옥방 1지구에서는 예외적으로 환호(環濠) 안쪽에 1기가 발견되었는데, 이 고인돌의 주인공은 당시 사회에서 특수한 신분의 사람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평면의 석관묘]
석관묘는 열을 이루면서 드문드문 분포하고 있는데, 모두 얇은 돌을 이용하여 상자처럼 만든 것들로서 대평유적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 무덤이다. 이러한 무덤에 함께 묻었던 껴묻거리는 붉은간토기·가지무늬토기 등의 토기와 석검(石劍)·석촉(石鏃) 등의 석기, 그리고 천하석제(天河石製) 구슬들이다. 대부분 무덤 안에서 발견되고 있으나 토기들 가운데 어떤 것은 무덤 바깥에 별도로 마련된 공간에서도 발견된다. 그리고 무덤 위에 여러 점의 민무늬토기를 일부러 깨트려서 무덤을 덮어놓은 것도 있다.
한편 무덤이라는 것은 죽은 사람을 묻어놓은 구조물이기 때문에 당연히 묻힌 사람의 흔적이 남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산성 토양이기 때문에 유기물은 빠른 시일 안에 삭아버린다. 따라서 우리나라 선사시대의 무덤에서 죽은 사람의 흔적을 찾는 일이란 거의 없다. 다만 특수한 환경, 이를테면 조개무지나 조개가루가 포함된 흙 속에 만들어진 유구나 석회암 동굴지대와 같은 곳에서는 사람 뼈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대평면 역시 이러한 특수한 환경을 가진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의 무덤에 죽은 사람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몇몇 무덤 속에는 상태가 썩 좋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 뼈가 남아 있어서 당시 대평에 살았던 사람들의 실체를 어느 정도 알게 해준다. 대평에서 발견된 사람 뼈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사람을 묻을 때 사지를 굽혀서 무덤 속에 안치, 즉 굴장(屈葬)하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외 없이 사람이 죽으면 온몸을 반듯하게 눕혀서 장사를 지낸다. 그러나 대평유적의 예에서 보듯이, 전부는 아니지만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에는 굴장 한 것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여성이 머리가 잘린 채 무덤에 매장된 예의 발견이다. 대개 선사시대에 사람의 머리가 잘리는 예는 전쟁터에서 군인들이나 씨족·부족 사이에 일어난 충돌과정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모두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다. 따라서 대평처럼 목이 잘린 여성의 매장은 씨족이나 부족 사이에 벌어진 충돌이나 전쟁 속에서 죽은 여성을 묻은 것이 아니라 지금은 알 수 없는 어떤 장례의례의 결과물일 가능성이 높다.
셋째, 어린아이도 따로 무덤을 만들어서 매장했다는 것이다. 대평유적에서 확인된 어린아이 뼈는 대략 5살 전후의 어린아이의 것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5살 전후의 어린아이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분명히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대평유적에서 발견된 사람들의 평균 키는 남성이 164㎝, 여성은 149㎝이다. 이러한 청동기시대 대평 사람들의 키는 시기가 약간 늦은 삼천포 늑도 사람들(늑도의 여성은 147㎝, 남성은 161㎝이다)보다는 크며, 삼국시대의 김해 예안리 사람들(예안리의 여성은 150.8㎝, 남성은 164.7㎝이다)보다는 약간 작았음을 알 수 있다.
[가야시대의 옛무덤]
가야는 청동기 대신 철기문화를 받아들이면서 한강 이남 지역에 등장했던 삼한 중 변한(弁韓)이 발전하여 성립되었다는 것은 상식이다. 따라서 가야의 옛무덤을 살피기 전에 먼저 변한의 옛무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순서이다.
변한의 무덤은 4종류가 확인되고 있다. 목관묘(木棺墓)와 목곽묘(木槨墓)가 가장 많으며, 옹관묘는 부차적으로 만들어졌고, 석관묘는 극히 예외적으로 존재한다.
이 중 목관묘는 삼한시대 전기를 대표하는 무덤으로서 대체로 산에서 길게 뻗어 내려온 낮은 대지 위에 자리하고 있다. 길이의 방향은 동-서를 기본으로 한 것이 많고, 대개 시신의 머리를 동쪽으로 두었으며, 대단히 깊게 설치되어 있다. 반면에 목곽묘는 삼한시대 후기에 등장하여 삼국시대까지 아주 많이 만들어졌던 무덤이다. 목관묘와 같이 산기슭 또는 구릉의 끝 부분에 많이 만들어졌으며, 무덤의 길이 방향은 등고선과 일치하는 경향이 보이고 있다. 이러한 목곽묘는 목관묘에 견주어 깊이가 얕아지는 편이다. 특히 목곽의 사용에 따라 무덤의 규모가 커지면서 껴묻거리의 양이 뚜렷하게 증대되며, 이 시기의 말기에는 껴묻거리만 묻어두는 별도의 공간인 부곽(副槨)이 만들어지는 등 주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난다. 옹관묘는 대개 지표면을 얕게 파서 단지 및 껴묻거리를 배치한 뒤 흙으로 덮었는데, 하나의 단지만 사용한 것(단옹식)과 2개의 단지를 사용하여 아가리를 서로 맞물린 것(합구식 옹관)도 있다. 석관묘는 앞 시기인 청동기시대의 매장 전통을 가진 무덤으로서 오랫동안 그 명맥을 유지했으나 크게 유행했던 무덤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이러한 변한의 여러 형태의 무덤은 아직 진주지역에서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앞으로 밝혀야 할 과제다. 따라서 선사시대의 무덤에 이어서 삼한시대의 무덤을 살피고, 최후로 가야시대의 무덤에 대해서 언급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삼한시대의 무덤에 대해서는 생략할 수밖에 없다.
가야시대의 무덤은 가장 이른 시기에 목곽묘가 사용되다가 5세기에 들어서면 수혈식석곽묘가 유행하면서 거대한 봉분을 가진 지배자급의 무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실제 각 지역에 있었던 가야소국의 지배자들의 무덤은 거대한 봉분을 만들고, 내부에 수혈식 석곽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가 6세기 이후가 되면서 동쪽에서는 신라, 서쪽에서는 백제의 힘이 서서히 가야지역에 침투해 들어오면서 가야의 무덤도 이러한 지역의 영향을 받아서 새로운 형태의 무덤이 만들어진다. 즉 신라의 영향 아래에서는 횡구식 석실묘(橫口式石室墓), 백제로부터는 횡혈식 석실묘(橫穴式石室墓)라는, 전혀 비가야적인 무덤이 만들어지게 된다. 다만 진주지역은 신라보다는 백제와 가깝기 때문에 주로 횡혈식 석실묘가 발견되고 있다.
[우수리 고분군]
명석면의 우수리 고분군은 남강의 지류인 덕유천과 나불천이 합류하는 곳의 서쪽에 위치한다. 고분군은 길게 형성된 우수골을 중심으로 서쪽과 동쪽의 야산과 북쪽에 있는 속칭 노루목산의 사면에 입지하고 있다.
이 고분군은 일찍이 경상대학교 박물관의 지표조사에서 알려지게 되었으며, 1997년 가을 진주-단성간 국도 확·포장공사 구간 안에 노루목산의 고분군의 일부가 포함되면서 경남고고학연구소에 의해 조사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8기의 목곽묘와 6기의 수혈식 석실묘가 조사되었다. 목곽묘는 대체로 소형인데, 이 가운데 2기에는 바닥에 작은 돌을 한 벌 깔아서 시신의 받침(시상, 屍床)을 마련한 흔적이 있다. 껴묻거리는 아예 없거나 1~2점의 무개식 삼각투창 고배(無蓋式三角透窓高杯)나 단경호·장경호·발형기대·광구소호와 같은 토기와 도끼, 또는 낫과 같은 철기 몇 점에 지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18호분에서는 다소 많은 토기와 철기가 발견되어서 주목된다.
수혈식 석곽묘 또한 규모가 작은 것들이며, 껴묻거리 역시 일단장방형투창 고배(一段長方形透窓高杯)와 수평구연호(水平口緣壺)·발형기대(鉢形器臺)와 같은 몇 점의 토기와 도끼·창·낫 등의 철기만 발견되고 있다. 그 가운데 16호분은 주구(周溝)를 돌렸을 뿐만 아니라 껴묻거리도 다른 무덤에 견주어 많다. 그리고 16호분에서는 우수리 고분 가운데에서는 유일하게 대도(大刀)가 묻혀 있었다. 무덤의 규모와 껴묻거리의 양과 질을 감안할 때 이 무덤에 묻힌 사람은 어느 시기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 속에서 약간 신분이 높았을 가능성이 있다.
무덤이 만들어진 시기는 무덤의 형태와 출토된 토기를 볼 때, 목곽묘는 대개 5세기 후반, 수혈식 석곽묘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대일 것으로 생각된다.
[수정봉 옥봉 고분군]
수정봉·옥봉 고분군은 비봉산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은 구릉 위의 야산 정상부에 열을 이루면서 7기의 무덤들로 이루어졌다. 이 구릉은 진주 합동버스주차장 동북쪽에 있는데, 지금은 집이 빈틈없이 들어 차 있거나 경작지로 바뀌었고, 진주고분이라는 이름으로 옥봉고분군에 남아 있는 2기만이 경상남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이 구릉의 정상부는 아래로 남강을 굽어보면서 강 주변에 형성된 넓은 평야지대(지금은 시가지로 바뀐 곳)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곳으로서 다른 지역의 가야시대 수장 무덤들이 만들어져 있는 위치와 같다. 7기의 무덤 가운데 일제강점기 때인 1910년 세키노[關野貞]가 조사한 유구는 3기이며, 나머지 4기의 무덤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정확한 유구의 지칭 없이 막연히 ‘진주고분 발견 유물’이라면서 여러 점의 토기와 귀걸이·목걸이 등이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소개되어 있는데, 이들 자료 가운데 일부가 해당 고분군에서 출토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수정봉 2호분과 옥봉 7호분에서 출토된 유물이 일본 동경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 일본 연구자들에 의해 알려지고 이들 자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아래에서는 최근에 공개된 자료와 『조선고적도보』에 실려 있는 사진 등을 토대로 간략하게 소개한다.
조사된 무덤은 수정봉 2호분과 3호분, 옥봉 7호분의 3기이며, 모두 횡혈식 석실묘들이다. 이 중 수정봉 2호분은 길이 4.73~5.32m, 너비 0.7~1.76m, 높이 2.3m의 평면 세장방형의 현실과 전벽의 중앙에 덧붙여서 길이 3.03m, 너비 0.8m, 높이 1.27m의 선도로 이루어진 무덤이다. 그리고 수정봉 3호분은 길이 약 5.32m, 너비 0.68~1.78m, 높이 2.3m의 평면 세장방형의 현실과 전벽의 중앙에 덧붙여서 길이는 알 수 없으나 너비 0.8~1.2m, 높이 1.44m의 선도로 이루어진 무덤이다.
여기에서 발견된 껴묻거리는 투구조각·큰칼·작은칼·기꽂이·말재갈·말발걸이·도끼·관고리·관못·띠고리·따비 등의 철기와 유개고배·대부장경호(臺附長頸壺)·통형기대(筒形器臺)·발형기대(鉢形器臺)·동완형토기(銅盌形土器)·탁잔형토기(托盞形土器) 등의 토기들이다.
수정봉·옥봉 고분군에는 7기의 거대한 무덤들이 산의 능선을 따라서 열을 이루면서 축조되었는데, 이것은 이 지역이 어떤 특정한 집단의 묘역으로 설정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한다. 이들 집단은 당연히 이 지역을 지배했던 수장들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이들 무덤이 이 지역 수장의 묘였을 근거는 유물에서도 나타나는데, 기꽂이와 동완(銅盌) 등이 그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기꽂이는 지금까지 사용처를 알 수 없는 철기로서, 형태에 바탕해서 사행상철기(蛇行狀鐵器)라고 불리어왔다. 그런데 최근 일본의 기옥현(埼玉縣)에서 말 모양 토제품[馬形埴輪]이 발견되어 이것이 고구려고분벽화에 묘사되어 있는 기꽂이였음이 분명해졌다. 각 지역 수장의 무덤인 경주의 금관총이나 금령총, 양산 부부총, 합천 옥전 M3호분 등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유물이 발견된 수정봉 2호분이나 옥봉 7호분은 이 지역 수장의 무덤임이 분명하다.
아울러 동완도 당시로서는 귀중한 유물로서, 대개 각 지역의 왕이나 수장의 무덤에서 1점씩 발견되었다. 예를 들면 공주의 무령왕릉을 필두로 경주의 황남대총·천마총·금관총 등과 고령 지산동 44호분, 합천 옥전 M3호분 등에서 발견된 동완이 대표적이다.
그러면 이 지역의 수장묘들인 수정봉·옥봉 고분군이 언제 만들어졌는가? 필자는 수정봉 3호분에서 발견된 장경호와 기대는 6세기 전반대에 진주와 이 부근을 대표하는 토기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함께 발견된 장경호와 기대는 지산동 45호분 단계의 대가야 계통 토기이기 때문에, 이것 역시 6세기 전반대에 포함시킬 수 있으며, 수정봉 2호분과 옥봉 7호분에서 발견된 자료 역시 수정봉 3호분과 거의 같은 시기인 6세기 전반대로 추정된다.
[가좌동 고분군]
가좌동 고분군은 개양역 앞 해발 52m 정도의 낮은 산 위에 분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의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와 1977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발간한 『문화유적총람』, 1985년 창원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간한 『가야문화권유적 정밀 지표조사 보고서』 등에 이미 소개되어 있는 유적이다. 그러다가 1988년 9월 유적 주변에 민묘를 만들면서 1기의 고분이 드러나자 경상대학교 박물관에서 수습·조사하였다. 이때의 조사 내용은 아래와 같다.
유구는 모두 4기가 조사되었는데, 형태는 전부 수혈식 석곽묘였다. 이 중 1호분은 직경 9~10m, 높이 1.5m가량의 작은 봉분을 가졌으며, 내부에는 길이 4.9m, 너비 0.9m, 깊이 1.0m의 수혈식석곽이 축조되어 있었다. 함께 발견된 유물은 고성식의 일단장방형투창 유개고배를 비롯하여 단경호·광구호·대부장경호·대부직구호·통형기대·개·컵형토기 등의 토기와 큰칼·작은칼·창·끌·말재갈·도끼·화살촉 등의 철기, 구슬들로 이루어진 목걸이, 가락바퀴 등이었다.
이러한 무덤에서 발견된 자료를 보아 이 유구들이 대개 6세기 전반대에 만들어졌다는 것과 유물의 양과 질, 유구의 규모 등에서 볼 때 어떤 수장들의 무덤이 아니라 일반인이거나 그보다 신분이 약간 높은 사람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이 고분군의 더 자세한 성격 규명은 이 지역의 규모가 큰 다른 고분들이 조사된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