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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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晋州-妓生-文化 |
영어의미역 | Jinju Gisaeng and Culture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강동욱 |
[정의]
절개와 풍류를 지닌 진주 기생들의 생활 모습과 그로 인해 형성된 문화상.
[개관]
진주의 논개(論介), 평양의 계월향(桂月香)으로 인해 ‘남 진주, 북 평양’란 말이 회자될 정도로 진주의 풍류와 멋은 그 명성이 높았다. 그리하여 조선 기녀하면 “일강계(一江界), 이평양(二平壤), 삼진주(三晋州)”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었다.
1910년 1월 7일자 『경남일보』에 위암 장지연(張志淵)은 진주의 정경과 문화를 노래한 「진양잡영(晋陽雜詠)」 14수를 연재하면서 “풍부한 물산(풍산, 豊産), 아름답고 요염한 기녀(연기, 娟妓), 무성한 대나무(죽승, 竹蠅)를 진양삼절(晋陽三節)”이라고 했다.
일찍이 이능화(李能和)는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서 “지방에 따라 나름의 특색이 있었는데, 평양기생이 그 숫자나 기예에서 가장 으뜸이었고, 다음이 진주기생으로 나와 있다. 의절 논개 말고도 역대 진주기생으로는 승이교(勝二喬)·계향(桂香)[또는 난향(蘭香)]·매화(梅花), 그리고 진양의 옥선(玉仙) 등이 빼어난 명기(名妓)들이었다”고 소개한 바 있다.
진주에는 기생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하고 있는데, 『조선해어화사』 등에 ‘진주기생’에 대한 기록들이 보인다.
[고려가요 월정화의 주인공 ‘월정화’]
월정화(月精花)는 기록상 나타나는 진주의 최초 기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진주 사록(司錄) 벼슬에 있던 위제만(魏齊萬)을 유혹해 그의 부인을 결국 울화병으로 죽게 만든 장본인이다. 사록은 당시 진주 행정의 실무 책임자라고 보면 된다.
『고려사』권71권 악지에 “월정화는 진주 기녀이다. 사록 위제만이 그에게 매혹되었다. 그래서 그의 부인이 울분으로 병이 나서 그만 죽었다. 진주 고을 사람들이 그를 불쌍히 여겨 그 부인이 살았을 때 서로 친애하지 않았던 사실을 들어 사록이 여색에 미친 듯이 미혹됨을 풍자한 것이다(月精花 晋州妓也 司錄魏齊萬惑之 令夫人憂恚而死 邑人追言 夫人在時 不相親愛 以刺其狂惑也)”라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진주 사람들이 「월정화」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노래는 전하지 않는다.
진주 사람들이 위제만의 부인을 추모하고 위제만의 허랑방탕한 생활을 풍자하기 위해 불렀다는 「월정화」라는 고려가요의 내용은 알 길이 없으나, 「진주난봉가」의 내용과 흡사한 측면이 많을 것이라고 추측은 해볼 수 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월정화의 이야기가 「진주난봉가」의 설화적 배경과 유사한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고려사』의 ‘월정화’이야기는 이후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임하필기(林下筆記)』 등 조선시대 기록들에도 나타난다.
[진주 출신 재상 강혼과 기녀의 로맨스]
옛날 경상우도의 중심지였던 진주지방에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선비와 기녀’이야기가 있다. 「강혼의 로맨스」라는 전설이다.
목계(木溪) 강혼(姜渾)[1464~1519]은 젊은 시절 한때 아리따운 관기와 깊은 사랑을 불태운 일이 있다. 강혼이 기녀와의 사랑에 빠져 있을 무렵, 공교롭게도 진주목사가 부임해왔다. 새로 온 목사가 기녀들을 일일이 점고하는데, 강혼의 연인이 목사의 눈에 들어 수청을 들게 되었다. 강혼은 사랑하는 기녀를 속절없이 빼앗기게 되었다. 더욱이 관기였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강혼은 북받쳐 오르는 분함과 연정을 주체할 수 없어 수청을 들러 가는 기녀의 소맷자락을 부여잡고 한 수의 시를 소매에 써주었다. 강혼의 행동에 놀란 기녀는 저고리를 갈아입을 생각마저 잊어버리고 엉겁결에 신관 목사의 방으로 들어갔다. 쫓기듯 들어서는 기녀의 소맷자락에 쓰인 시를 발견한 목사는 그 연유를 물었다. 시의 작자가 누구냐고 다그치는 것이었다. 기녀는 밝히지 않을 수 없었고, 급기야는 잡아들이라는 호통이 떨어졌다. 강혼이 붙들려 왔다. 수청 기녀는 말할 것도 없고 아전들은 큰 변이 일어났다며 몸둘 바를 몰라 하는데, 사또는 뜻밖에도 주안상을 준비케 하고 백면서생 강혼을 따뜻하게 맞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사또는 기생의 소맷자락에 쓰인 시를 보고 그의 글재주와 호기에 마음이 끌려 한 잔 술은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수청을 들 뻔한 기생도 되돌려 주고자 작정한 것이다.
강혼은 1464년(세조 10) 진주 월아산 아래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진주, 자는 사호(士浩), 호는 목계(木溪)이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성종 14년(1483)에 생원시에 장원을 하고, 성종 17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춘추관 등에서 벼슬을 했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 풀려나 문장과 시로써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도승지가 되었다. 영의정 유순의 주선으로 반정(反正)에 참여하게 되어 그 공으로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奮義靖國功臣) 3등에 진천군(晋川君)에 봉해졌다. 그 뒤 좌승지를 거쳐 대제학, 공조판서가 되었고, 중종 7년(1512)에 한성부 판윤이 되었으며, 뒤이어 우찬성 판충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시문에 뛰어나 김일손(金馹孫)에 버금갈 정도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진주사람 강혼은 시문에 능통했으며 대제학까지 지낸 학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제학까지 지낸 학자인 강혼에게 ‘기생과의 로맨스’라는 이야기가 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야기의 근원 역시 그의 문집에 있다. 우선 후손이 쓴 가장(家狀)에 그 기록이 있다. “그 후 목사가 진주에 부임을 해서 좋아하는 기생에게 수청을 들라 하니 장난삼아 시 한 편을 기생의 옷에 써주었다. 목사가 보고 크게 놀라 실용적인 학문을 권하였다(其後 方伯入本州 以所眄妓薦枕 卽戱題一絶於妓 方伯見之 大異 遂勖以實學)”라는 글이다. 강혼이 이때 기생의 소매에 써준 시 역시 「증주기(贈州妓)」라는 제목으로 문집에 실려 있다.
高牙大纛三軍帥 목사는 삼군을 통솔하는 장군 같은데
黃卷靑燈一布衣 나는 한낱 글 읽는 선비에 불과 하네
方寸分明涇渭在 마음속에는 좋고 싫음이 분명할 텐데
不知丹粉爲誰施 몸 단장은 진정 누구를 위해 할까
강혼은 사랑하는 기녀가 마음속으로는 자기를 좋아하지만, 목사의 권세에 못 이겨 억지로 수청 들러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한 편의 시를 기생의 소매에 써준 것이다.
이 시에는 “진양지에 이르기를, 판서 강혼이 젊은 시절 관기를 좋아했는데 방백이 부임하여 수청을 들게 하니 공이 시 한 수를 지어 기생의 소매에 써주었다. 방백이 보고 누가 지었는지 물었다. 기녀가 공이 지었다고 대답하자, 불러 보고 크게 칭찬하고 과거공부를 권하였으며, 마침내 문장으로 이름이 드러났다”라는 주(註)를 달아놓았다.
[삼일만세의거에 참여한 진주기생들]
1919년 진주 남강 변에서 “왜놈들 물러가라”고 목청껏 외쳤던 진주기생들이 있었다. 진주기생조합 소속 기생들이었다. 기생조합은 나라가 망할 무렵 교방이 해체되자 교방의 노기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것으로, 뒤에 권번으로 그 맥이 이어진다. 진주기생조합 소속 기생들은 진주교방의 맥을 이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19년 3월 19일 한금화(韓錦花)를 비롯한 진주기생들이 태극기를 선두로 촉석루를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일본 경찰이 진주기생 6인을 붙잡아 구금하였는데 한금화는 손가락을 깨물어 흰 명주자락에 “기쁘다, 삼천리강산에 다시 무궁화 피누나”라는 가사를 혈서로 썼다고 전해온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3월 29일에는 수원기생조합 소속의 기생 일동이 검진을 받기 위하여 자혜병원으로 가던 중 경찰서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때 김향화(金香花)가 선두에 서서‘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뒤따르던 여러 기생들이 일제히 만세를 따라 불렀다. 이들은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경찰서 앞에서 다시 만세를 부르고 헤어졌다. 이 사건으로 주모자 김향화는 일본 경찰에 붙잡혀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라는 기록이 있다.
뿐만 아니라, 1919년 3월 31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의 ‘기생들이 만세’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십구일 오전 십일 시 반 경에 수원조합 기생 일동이 자혜병원으로 검사를 받기 위하여 들어갔다가,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몰려 병원 안으로 들어가 뜰 앞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경찰서 앞으로도 나왔다가 해산했는데, 조합원 중에 김향화는 경찰서로 인치 취조하는 중이더라”한 것이 보인다.
진주기생들의 만세의거 사실 역시 당시 『매일신보』에 실려 있다. 1919년 3월 25일자 ‘기생이 앞서서 형세 자못 불온’이라는 기사에 “십구일은 진주기생의 한떼가 구한국 국기를 휘두르고 이에 참가한 노소여자가 많이 뒤를 따라 진행하였으나 주모자 여섯 명의 검속으로 해산되었는데, 지금 불온한 기세가 진주에 충만하여 각처에 모여 있다더라.”라고 적혀 있다. 이때 기생들의 만세의거는 진주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고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의거이다.
4월 1일에는 황해도 해주에서 읍내 기생 일동이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그린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에 용기를 얻은 민중이 참여함으로써 만세시위 군중은 3천명이나 되었다. 당시 해주기생 중에는 서화에 능숙한 기생조합장 문월선을 비롯하여 학식 있는 여성들이 많았는데, 이날 문월선·김해중월·이벽도·김월희·문향희·화용·금희·채주 등 8인이 구금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4월 2일에는 경상남도 통영에서 정홍도·이국희를 비롯한 예기조합 기생들이 금비녀·금반지 등을 팔아 광목 4필 반을 구입하여 만든 소복을 입고, 수건으로 허리를 둘러맨 33인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3인이 붙잡혀 6개월 내지 1년의 옥고를 치렀다.
[매국노 꾸짖은 진주기생 산홍]
『매천야록』 광무 10년(1906)조에 “진주기생 산홍(山紅)은 얼굴이 아름답고 서예도 잘하였다. 이때 을사오적의 하나로 지목되는 매국노 이지용(李址鎔)[1870~1928]이 천금을 가지고 와서 첩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자. 산홍은 사양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첩이 비록 천한 기생이긴 하지만 사람 구실하고 있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이지용이 크게 노하여 산홍을 때렸다.”라는 기록이 있다. 글도 잘 쓰고 얼굴도 예쁜 진주기생 산홍이 이지용의 첩이 되길 거부한 것은 당시로서는 큰 사건이었다.
이지용이 누구인가. 1905년 내무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적극 찬성하여 조약에 서명한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이다. 1907년에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니, 그 권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대단하였다. 1906년 을사오적 이지용이 진주를 방문했다. 그가 진주를 방문한 흔적은 촉석루 벼랑에 그의 이름을 새겨 놓은 데서 알 수가 있다. 이때 이지용은 진주기생 산홍에게 마음을 빼앗겨 천금을 주고 첩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자 산홍이 역적의 첩이 될 수 없다고 거절하였는데, 이 일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절개를 칭찬해 마지않았으며, 『매천야록』에 그때의 일을 기록해 두고 있는 것이다.
양회갑(梁會甲)[1884~1961]은 「기녀 산홍이 매국노의 죄를 나무라며 잠자리를 거절하고 스스로 죽다(妓山紅 數罪賣國 賊不許寢 自死)」라는 시를 지어 산홍의 절개를 칭찬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이지용이 천금을 가지고 와서 첩이 되어 달라고 했는데, 기녀의 신분으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기에 충분했다. 이 일을 들은 어떤 사람이 이지용에게 시를 지어 주면서 희롱까지 하였다. 매국노에게 당당히 맞선 산홍은 당시 진주기생의 기개를 만천하에 과시한 셈이 되었다. 산홍은 선배 기녀인 의기 논개의 사당인 의기사(義妓祠)를 참배하고 시 한 수를 남겼다.
역사에 길이 남을 진주의 의로움
두 사당에 또 높은 다락 있네
일 없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 놀고 있네
논개는 왜장을 안고 몸을 날려 천추에 꽃다운 이름을 남겼건만, 자신은 일없는 세상에 태어나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나 놀고 있음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천하가객 안민영이 반한 진주기녀 비연]
중국 한나라 여인 비연(飛燕)은 뛰어난 몸매에 가무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한나라 성제(成帝)의 총애를 받아 황후의 지위까지 오르게 되었다.
‘비연’이 중국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조선에도 있었으니 바로 진주 기녀 비연이다. 비연은 진주에서 뛰어난 미모와 몸매로 뭇 사내들은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 소문은 곧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졌다. 당시 최고의 가객(歌客)이라고 할 수 있는 안민영(安玟英)이 소문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비연을 만나러 진주로 달려왔다.
안민영은 자를 성무(聖武), 호를 주옹(周翁)이라 하였으며, 서얼 출신으로 조선 말 제1의 가객이다. 고종 13년(1876) 스승 운애(雲崖) 박효관(朴孝寬)과 함께 조선 역대 시조집 『가곡원류(歌曲源流)』를 편찬 간행하여 근세 시조문학을 총결산하는 데 크게 공헌한 사람이다.
당시 안민영은 풍류객답게 전국을 유람하며 각처의 기녀들과 즐기면서 시로 그 감흥을 드러내고 있다. 진주에도 여러 번 와서 난주·초옥 등 진주 기녀들과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비연은 쉽게 만날 수 없었다. 그가 비연을 만나러 천릿길 진주를 찾았을 때, 비연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당시 진주 외촌(外村)에 살고 있던 거부 성진사의 첩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8도의 기녀를 마음대로 주무르던 안민영이었지만, 비연은 쉽게 만날 수가 없었다. 비연을 만나기 위해 많은 패물을 준비해온 안민영을 어떻게 해서든지 비연을 한번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일면식도 없는 남의 여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기방에 찾아가면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온 안민영은 패물로써 비연을 아는 사람을 회유했다. 그 사람을 통해 비연을 한번 만나고 그 감회를 억누를 수 없어 시로 남기기까지 했다.
이 이야기는 안민영의 개인 시조집 『금옥총부(金玉叢部)』에 전해온다. 이 시조집은 안민영이 70세 되던 고종 22년(1885)에 이뤄진 것으로, 『가곡원류』보다 9년 늦게 만들어졌다. 그는 80세까지 생존하면서 만년까지 작품활동을 계속한 정력가이다.
[진주기녀 난주]
안민영은 진주 기녀 난주(蘭珠)를 무척 총애했다. 그가 진주에 왔을 때 그녀를 위해 시조 2수를 지었으니, 「진양기녀 난주를 칭찬하다(讚晋陽蘭珠)」와 「진양기녀 난주를 시제로 함(題晋陽妓蘭珠)」이다.
진양 기녀 송옥과의 인연 또한 남달랐다. 안민영이 진주에 머물 때 물과 풍토가 맞지 않아 풍병이 들어 여러 약을 썼으나 조금도 약효를 얻지 못하고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했다. 이때 한 의원이 말하기를“이 병은 매우 위중해서 만약 동래 온천에 가서 삼칠일 동안 목욕을 하지 않는다면 다시 회복될 수 없다”고 했다. 안민영은 즉시 진주를 떠나 마산포와 창원을 거쳐 동래로 향한 일이 있었다. 안민영이 진주에서 사경을 헤맬 때 따뜻한 위로의 편지를 보낸 기녀가 바로 송옥이었다.
[영변땅에서 망향가 부른 진주기녀 채란]
1924년 민족시인 김소월(金素月)은 오랜 방황 끝에 고향 영변으로 돌아와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돌보면서 소일하고 있었다. 오랜만의 귀향이었지만 그동안의 실의와 좌절이 컸던 탓인지 마음의 안정을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행도 하고 영변에 머물면서 마음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김소월이 영변에 머물고 있을 때, 우연히 한 기녀를 만나게 된다. 이 기녀는 어릴 때 정신병을 앓던 아버지가 집을 나가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개가할 밑천을 장만하려고 자신을 전라도 행상에게 팔았다.
전라도 행상에게 팔린 신세가 된 기녀는 이리저리 팔도를 떠돌게 된다. 팔도를 떠돌다 급기야는 남으로 홍콩, 북으로 다이렌과 텐진에 이르게 되었다. 기구한 운명이었다. 멀리 외국으로 떠돌다 어찌어찌 해서 평안북도 영변 땅에 오게 됐고, 민족시인 김소월을 만났던 것이다. 이 기녀가 바로 진주가 고향인 채란이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홍콩, 중국 등지를 떠돌다 조선에 돌아와 고향과 천리나 떨어진 영변 땅에 도착한 채란은 고향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멀리 남쪽 고향 진주 땅을 바라보며 처연한 목소리로 「팔베개의 노래」를 부른다. 이때 김소월은 문득 담을 사이에 두고 골목길 저편에서 들려오는 슬프고 절절한 노래를 듣는다. 그리고 그 노래를 듣고 채록하여 「팔베개의 노래조(調)」라는 민요시를 지었다. 지금 전하는 것은 김소월의 시밖에 없으므로 채란이 불렀던 노래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김소월의 시와 대동소이하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