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2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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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巖 |
영어음역 | Kim Am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김창겸 |
성격 | 무관|천문가|병법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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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김윤중(金允中) |
성별 | 남 |
본관 | 김해(金海) |
대표관직 | 사천대박사(司天大博士)|집사시랑(執事侍郞)|강주태수(康州太守)|패강진두상(浿江鎭頭上) |
[정의]
통일신라의 무관·병법가·천문가.
[가계]
금관가야(金官加耶) 왕족의 후손, 김유신(金庾信)의 적손(嫡孫)인 김윤중(金允中)의 서손(庶孫)이다.
[생애]
김암은 본래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술법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였고, 천문학과 병법에 밝았으며, 지방관으로서 여러 차례에 걸쳐 지역을 맡아 잘 다스렸다. 또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활동사항]
김암이 젊은 시절에 중국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하였을 때, 틈을 타서 스승에게 찾아가서 음양가(陰陽家)의 술법(術法)을 배웠는데, 하나를 들으면 세 가지를 미루어 알았다. 스스로 둔갑입성지법(遁甲立成之法)을 지어 그 스승에게 드리니, 스승이 놀라면서 말하기를 “그대의 밝음이 여기에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하며, 그 후로는 감히 제자로 대우하지 아니하였다.
대력(大曆) 연간(766~779)에 귀국하여 사천대박사(司天大博士)가 되었고, 뒤에 지방으로 나가 양주(良州)[지금의 양산]와 강주(康州)[지금의 진주] 그리고 한주(漢州)[지금의 경기도 광주]의 태수(太守)를 역임하고, 중앙으로 올라와 다시 집사시랑(執事侍郞)을 맡은 뒤, 다시 지방으로 나가 패강진(浿江鎭) 두상(頭上)이 되었다. 김암은 가는 곳마다 마음을 다해 백성들을 보살피고 사랑하며, 농사일이 한가한 때에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가르치니 모두들 유용하게 여겼다.
일찍이 누리가 생겨 서쪽으로부터 패강진 경계로 들어와 우글우글 들판을 덮으니, 백성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김암이 산마루에 올라가 향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하니 갑자기 풍우가 크게 일어 누리가 다 죽어 버렸다.
779년(혜공왕 15)에 급찬(級湌)의 관등으로 혜공왕의 명을 받아 일본에 파견된 사신단의 부사(副使)에 임명되어 살찬(薩湌: 사찬) 김난손(金蘭孫)을 비롯하여 대판관(大判官) 한나마(韓奈麻: 대나마) 살중업[薩仲業(설중업)], 소판관(少判官) 나마(奈麻) 김정락(金貞樂) 등과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갔는데, 일본왕이 그의 현명함을 알고 억지로 붙들어두고자 하였다. 그러나 마침 당나라 사신 고학림(高鶴林)이 일본에 와서 서로 만나보고 매우 즐거워하니, 왜인들은 김암이 중국에도 알려진 것을 알고 감히 억류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김암은 780년 2월 일본을 출발하여 신라로 돌아왔다.
[의의 및 평가]
『삼국사기』 등에는 김암이 강주(康州) 태수(太守)를 맡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강주는 통일신라시대 지방행정구역인 전국 9주의 하나로서 그 장은 총관(摠管: 도독(都督))이었고, 반면에 태수는 주 아래의 행정단위인 군(郡)을 맡아 다스리는 관직이었다. 그러므로 김암이 강주의 태수를 맡았다는 것은 강주의 최고책임자인 총관이 아니라 강주에 소속된 군의 태수를 역임하였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