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327 |
---|---|
한자 | 姜世晃 |
영어음역 | Kang Sehwang |
이칭/별칭 | 광지(光之),첨재(忝齋),산향재(山響齋),표암(豹菴),박암(樸菴),의산자(宜山子),견암(蠒菴),노죽(露竹),표옹(豹翁),해산정(海山亭),무한경루(無限景樓),홍엽상서(紅葉尙書),헌정(憲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병모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인서화가이자 평론가.
[가계]
본관은 진주. 자는 광지(光之), 호는 첨재(忝齋)·산향재(山響齋)·박암(樸菴)·의산자(宜山子)·견암(蠒菴)·노죽(露竹)·표암(豹菴)·표옹(豹翁)·해산정(海山亭)·무한경루(無限景樓)·홍엽상서(紅葉尙書). 시호는 헌정(憲靖). 아버지 강현(姜鋧)과 생모 광주이씨 사이의 3남6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집안은 대대로 학문과 장수를 누렸으며, 할아버지 강백년(姜柏年)과 아버지 강현에 이어 강세황이 71세 때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감으로써 이른바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로 칭송받았다. 후손으로는 부인 진주유씨(晋州柳氏)의 소생인 강속(姜屬)·강울(姜蔚)·강빈(姜頻)·강영(姜寧)과 나주나씨(羅州羅氏)의 소생의 강신(姜信)이 있다. 강신과 그의 아들 강이오(姜彝五), 그리고 강완의 손자 강진(姜溍)이 그림으로 이름을 떨쳤다.
[생애]
강세황은 1713년(숙종 39)에 서울에서 태어나 1791년(정조 16)에 7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8세에 시를 지었고, 강세황이 13, 14세에 쓴 글씨를 얻어다 병풍을 만든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서예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32세 때는 가난으로 안산(安山)에 이주하여 오랫동안 학문과 서화에 전념하였으며, 이 때 김홍도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영조의 배려로 61세에 처음 벼슬길에 올라 64세 때 기구과(耆耉科), 66세 때 문신 정시에 수석 합격하였다. 관직으로는 영릉 참봉(英陵 參奉)·사포 별제(司圃 別提)·병조 참의·한성부 판윤(漢城府 判尹) 등을 두루 거쳤다.
1784년 71세 때 천추부사(千秋副使)로 북경에 가서 서화로 이름을 날렸다. 72세 때는 북경 사행(北京 使行), 그리고 76세 때는 금강산 유람을 하면서 기행문과 실경 사생 등을 남겼다. 강세황의 생애에서 관직 생활과 예술 활동 등은 영조와 정조의 배려가 컸음을 알 수 있다. 특히 51세 때 영조가 신하들에게 강세황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림 잘 그린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한 일을 계기로 오랫동안 절필(絶筆)했던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활동사항]
강세황은 왕희지(王羲之)·미불(米芾)·조맹부(趙孟頫) 등 중국 역대 명필들의 글씨체를 본받아 해서·초서·예서·전서(楷書·草書·隷書·篆書) 등 각 서체에서 모두 뛰어났다.
그림은 산수(山水)·사군자(四君子)·화조화(花鳥畵)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는데, 중국의 원 말 사대가(元末 四大家) 또는 오파(吳派)의 양식을 답습한 전형적인 남종산수화(南宗山水畵)를 즐겨 그렸다.
조선 후기에는 당시에 유행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도 그렸다. 또한 강세황은 당대 회화의 비평에도 능하여 김홍도(金弘道)와 심사정(沈師正) 등 당대 유명 화가들의 작품에 대해 많은 화평을 남겼다.
강세황은 시·서·화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남달리 높은 식견과 안목을 갖춘 사대부 화가로서 스스로 그림 제작은 물론 화평(畵評) 활동을 통해 당시 화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저술]
54세 때 쓴 자서전인 『표옹자지(豹翁自誌)』와 문집인 『표암유고(豹菴遺稿)』가 전한다.
[작품]
진경산수화인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이 대표작이다. 강세황은 송도기행첩에서 남종화법에 서양화법을 가미한 독특한 화풍을 구사하였다.
그 외 대표적인 회화 작품으로는 「자화상」, 「현정승집(玄亭勝集)」, 「첨재화보(忝齋畵譜)」, 「삼청도(三淸圖)」,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 「난죽도(蘭竹圖)」 등이 있다. 특히 자서전인 『표옹자지(豹翁自誌)』에 들어 있는 2폭의 자화상을 비롯하여 7, 8폭의 초상화를 남겼는데, 강세황의 자화상인 「강세황자필본」은 보물 제590-1호로 지정되어 있다.
[묘소]
강세황의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도하리에 있다.
[의의와 평가]
강세황은 특히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진경산수(眞景山水)의 발전과 새로운 서양 화법의 수용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한 서화론 및 서화평에 있어서도 선구적이었다.
강세황의 서화가 개성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은 서화의 정통성과 올바른 방법에 관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참신하고 독자적인 강세황만의 서화관에 의해 실천적으로 문제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고 하겠다.
비록 출신은 서울이지만 경상남도 진주시에서는 진주 사람으로 기록된 ‘서화능통의 역사적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진주시사』에 소개하고 있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
2011.08.16 |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 1) 이칭별칭 광지(光之)|첨재(需齋)|산향재(山響齋)|표암(豹菴)|박암(樸菴)| ->이칭별칭 광지(光之)|첨재(忝齋)|산향재(山響齋)|표암(豹菴)|박암(樸菴)| 2) 표암(豹菴)|박암(樸菴)|의산자(宜山子)|견암(全菴)|노죽(露竹)|표옹(豹翁) ->표암(豹菴)|박암(樸菴)|의산자(宜山子)|견암(蠒菴)|노죽(露竹)|표옹(豹翁) 3) 아버지 강현(姜醴) ->아버지 강현(姜鋧) 4) 호 첨재(需齋)|산향재(山響齋)|표암(豹菴)|박암(樸菴)|의산자(宜山子)|견암(全菴)|노죽(露竹)|표옹(豹翁)|해산정(海山亭)|무한경루(無限景樓)|홍엽상서(紅葉尙書) ->호 첨재(忝齋)|산향재(山響齋)|표암(豹菴)|박암(樸菴)|의산자(宜山子)|견암(蠒菴)|노죽(露竹)|표옹(豹翁)|해산정(海山亭)|무한경루(無限景樓)|홍엽상서(紅葉尙書) 5) 호는 첨재(需齋)·산향재(山響齋)·박암(樸菴)·의산자(宜山子)·견암(全菴)·노죽(露竹)·표암(豹菴)· ->호는 첨재(忝齋)·산향재(山響齋)·박암(樸菴)·의산자(宜山子)·견암(蠒菴)·노죽(露竹)·표암(豹菴)· 6) 아버지 강현(姜醴)과 생모 광주이씨 사이의 3남6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아버지 강현(姜鋧)과 생모 광주이씨 사이의 3남6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7) 아들 강이오(姜紛五), 그리고 강완의 손자 강진(姜晉)이 그림으로 이름을 떨쳤다 ->아들 강이오(姜彝五), 그리고 강완의 손자 강진(姜溍)이 그림으로 이름을 떨쳤다 8) 「현정승집(玄亭勝集)」, 「첨재화보(需齋畵譜)」, 「삼청도(三淸圖)」, ->「현정승집(玄亭勝集)」, 「첨재화보(忝齋畵譜)」, 「삼청도(三淸圖)」,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