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3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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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晋州民亂 |
영어음역 | Jinju Millan |
영어의미역 | Jinju Uprisi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백태남 |
[정의]
1862년(철종 13)에 경상남도 진주에서 일어났던 농민봉기.
[개설]
1862년에 경상도우수사 백낙신(白樂莘)의 불법탐학에 반발하여 진주 출신 유계춘(柳繼春) 등이 일으킨 민란으로, 자진 해산하기까지 4일간 진주 일대를 휩쓸며 부정 관리와 부호들을 응징하였다. 이후 중앙조정에서 보낸 진주안핵사에 의하여 민란은 수습되었으나, 같은 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임술민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역사적 배경]
조선 후기에 이르러 중앙정부의 세도정치와 부패관료들의 탐학으로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이에 따라 지방에서도 수령들의 탐학이 날로 심해지자 이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힘을 모아 난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며, 진주민란은 그 대표적 사건이었다.
[발단]
경상도우수사 백낙신은 부임 이래 갖은 방법으로 농민을 수탈하였는데, 진주목에서도 불법 수탈곡을 일시에 배당하여 수납하려 하였다. 이러한 처사는 그렇지 않아도 파탄지경에 다다랐던 농민들을 극도로 분노하게 하여 소요의 발단이 되었다.
[경과]
백낙신의 불법행위에 분개한 유계춘은 김수만(金守滿)·이귀재(李貴才) 등과 함께 농민운동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고, 통문을 지어 돌리면서 민심을 모아 1862년 2월 18일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스스로 ‘초군(樵軍)’이라 부르면서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손에는 몽둥이나 농기구를 들고 진주성으로 몰려갔다. 이때 그동안 잠잠하던 이웃 고을의 농민도 모두 합세하여 그 세력이 수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하룻밤을 성 밖에서 지낸 농민봉기군은 이튿날 백낙신과 진주목사 홍병원(洪秉元)으로부터 부정부패를 혁파한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부정관리들을 불태워 죽이고,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부호들을 습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2월 29일 박규수(朴珪壽)를 진주안핵사로 보내 난을 수습케 하였다.
[결과]
진주안핵사 박규수는 진주에 들어와 약 3개월에 걸쳐 민란을 수습하였다. 그 결과 농민측에서는 처형 10명, 귀양 20명 등의 희생을 냈고, 관리측은 8명이 귀양형을 받았다. 그러나 이 민란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던 다른 지방의 농민들을 자극하여 이 해에 30여 개의 지역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 임술민란이라는 전국적인 사건으로 번져나갔다.
[의의와 평가]
중앙정부의 실정과 지방관리들의 부정부패가 극심하고 농민들에 대한 착취가 만연하던 때, 비록 진주민란은 반란이라는 혐의로 진압은 되었으나, 전국적으로 농민봉기의 불씨를 당겼으며, 마침내는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