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상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600
한자 曺系商
영어공식명칭 Jo Gye Sang
이칭/별칭 미후(美後),정관당(靜觀堂),조계상(曺繼祥)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강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4년연표보기 - 조계상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38년연표보기 - 조계상 사망
출생지 이연리 -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지도보기
묘소|단소 관동마을 -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마산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관곡재 -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마산리
사당|배향지 유원당 -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마산리
성격 무신|의병
성별 남성
본관 창녕
대표 관직 판관

[정의]

조선 후기 밀양 출신의 무신이자 의병.

[가계]

조계상(曺系商)[1554~1638]의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자는 미후(美後), 호는 정관당(靜觀堂)이다. 조계상(曺繼祥)이라고도 하였다. 할아버지는 가연(柯淵) 조말손(曺末孫)이고, 아버지는 조윤전(曺潤筌)이다. 1554년 밀양 이연리,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선조 연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종5품 판관직(判官職)에 제수되어 활동하다가 몇년 뒤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급습하여 형이 살해되자, 이에 분노한 조계상이 칼을 빼앗아 일본군을 베었다고 전한다. 이후 흙을 져다가 형의 시신을 수습한 뒤 자신이 죽인 일본군의 머리를 챙겨 관아로 갔으며, 일본군에게 복수하겠다고 아뢰어서 갑옷과 투구 등을 받았다. 조계상은 이때 “죽으면 마땅히 병장기와 말가죽으로 덮을 것인데, 살아서 어찌 일신의 목숨을 아끼리오.”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후 의령의 곽재우(郭再祐) 의병장 진영으로 들어가서 활동하였는데, 기강 전투와 정암진 전투에서 많은 적을 무찔러 전공을 세웠다. 만년에는 휴식을 취하고 후진들의 강학소로 사용하기 위하여 정관당(靜觀堂)을 창건하였다.

[학문과 저술]

『선무공신판관공실록(宣武功臣判官公實錄)』이 전한다고 한다.

[묘소]

조계상밀양시 상남면 마산리 관동(冠洞) 산록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임진왜란 때 세웠던 공을 인정 받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일설에는 당시 군공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전한다. 관찰사 홍우전(洪愚傳)이 묘갈명을 지었으며, 조계상이 강학하던 정관당은 세월과 함께 쇠락되었는데, 1794년(정조 18) 중건되어 문중 재실로 사용되어 왔다. 후대에 마산리 관동에 관곡재(冠谷齋)라는 재각도 세워졌다. 형이 죽었을 때 적으로부터 빼앗았던 장검(長劍)이 보존되어 있다. 1961년 후손들이 묘소 아래에 재숙소(齋宿所)인 유원당(裕遠堂)을 창건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