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후기 이도(李燾)와 최여천(崔與天)이 편찬한 전라도 남원읍지(邑誌)의 증보판. 1699년에 이도와 최여천이 편찬한 『용성지』에 보유(補遺)편을 추가하여 1725년 이후에 다시 편찬한 것이다. 방두천(房斗天)이 발문을 지었으나, 보유편을 누가 짓고, 언제 누가 편찬하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용성지』는 남원부사로 부임한 이구징(李耈徵)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 전라북도 남원시의 군(郡)·현(縣)에 파견되었던 지방 관리. 감무는 고려 중엽인 1106년(예종 원년)부터 정부가 서해도(西海道)를 비롯하여 각 지방에 파견하기 시작했다. 이는 지방 군·현의 백성들을 위로하여 유민(流民)의 발생을 방지함으로써 조세와 역(役)을 효과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부는 특히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군과 속현 지역에 감무관을 파...
-
전라북도 남원시 대강면 강석리에 있는 서당. 1905년에 이태암이 대강면 강석리의 강석굴 마을에 있는 자신의 가숙(家塾)에서 학동을 훈학시키는 형태로 서당을 운영하였다. 강석서당은 이후 1925년까지 운영되면서 70여 명의 제자가 배출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강민첨(姜民瞻)의 23세손이다. 부인은 경주정씨(慶州鄭氏) 노송정(老松亭) 정지년(鄭知年)의 후예이다. 강주택은 뛰어난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타고난 천성이 효심이 깊어서 부모에게 항상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여 드리고 그 뜻을 어긴 적이 없었다. 초상과 장사 및 제사에 관한 예절을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따라...
-
전라북도 남원시의 고려 태조부터 왕조 말까지의 역사. 고려시대 남원은 남원부(南原府)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남원부는 고려 건국 초에는 강남도에 소속되었다가, 1018년(현종 9)에는 강남도와 해양도가 합하여 전라도라는 명칭으로 불리면서 남원부 역시 여기에 소속되었다. 남원부는 또 용성(龍城)이라고도 하였다. 남원 지역은 통일신라 이래 5소경(小京)의 하나로,...
-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 옹금 마을에 있었던 서당. 1726년(영조 2)에 남원의 삭녕 최씨 집안에서 그 재실에 서당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진사 최상익(崔祥翼)이 초기의 훈장으로 학동을 가르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최상익의 고손자인 최병직(崔秉直)이 1894년(고종 31)의 식년문과에서 차석으로 급제하여 이 서당에서 배출한 인물로는 가장 뛰어난 성과를 올렸다. 최병직 역시...
-
전라북도 남원시 수지면 고정 마을에 있었던 서당. 1740년(영조 16)에 소 아무개가 마을 유지들과 함께 서당을 설립하였으며, 소풍장이 훈장을 지냈다고 한다. 고정 마을에 내려오는 설화에 따르면, 이곳에 정착한 정씨(丁氏) 일족이 세 그루의 정자나무를 심고 큰 서당을 설립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뜻을 오래 기억하자는 뜻에서 고정(考亭)이라는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
전라북도 남원시 대강면 생암리 마을에 있었던 서당. 1920년에 전라북도 남원시 대강면 생암리 광암 마을에 사는 장석균이 자신의 가숙에 김병택을 훈장으로 초빙하여 학동을 대상으로 훈학을 실시케 하였다고 전해진다. 장석균은 광암 마을 유지들과 함께 서당을 운영하였다. 당시 제자들이 봄, 가을 연중 2회에 걸쳐 곡성 도림사에 가서 현장 강학을 하기도 하였다. 훈장...
-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화정리 꽃정이 마을에 있던 서당. 1775년(영조 51)에 당시 호조좌랑 황종묵이 남원 사동방, 두적동에 서재를 건립하여 이후 1910년까지 많은 학동을 배출하였다. 이명기, 황학현 등이 훈장을 역임하였으며, 인근 5개 마을의 학동들이 이곳 구경재에서 수학했다고 한다. 현재 서재는 전하지 않고 터만 남아 있다....
-
전라북도 남원시 아영면 내인리 바람실 마을에 있는 서당. 1960년에 동복오가 자신의 재실을 서당으로 꾸며 학동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87년까지 많은 학동들을 가르쳤는데, 배출한 제자들은 근 100여 명에 달하였다. 그렇게 되기까지 함양사람 오정식 훈장의 공로가 매우 컸다고 전해진다. 구사재 서당은 현재 마을 공동 소유로 관리 및 보존되고 있으며,...
-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면 권포리 본동 마을에 있는 서당. 1910년에 본동 마을에 사는 정송규와 마을 유지들이 정씨 종중의 서재에 서당을 열어 학동들을 훈학하였다. 초대 훈장은 경상도 함양인이었던 정행록이었다. 권포서당은 1930년까지 운영되었으며, 서당은 일제강점기에 폐지되었다. 현재는 서당 터만 남아 있다....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경주. 신라 경순왕 때 수은공의 후손이다. 김남중은 효성이 지극하여 병든 부모를 위하여 오줌과 변을 맛보면서 구환하였다. 부모의 병이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부모의 생명을 연장시켰다. 상을 당하여 부모의 장사를 치를 때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밤낮으로 효성을 다하였으며, 이에 감동한 귀신이 불을...
-
조선 후기 전라남도 남원 출신의 열녀. 본관은 순흥(順興).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후손이다. 사인(士人) 김세기(金世基)의 아내이다. 가문이 뜻하지 않은 화를 입어 남편이 갑자기 죽자 일가에서는 모두 급히 몸을 피하였다. 그러나 안씨는 홀로 노비들과 함께 예를 다하여 남편의 시신에 염을 하였다. 입관을 하는 날 안씨는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로 맹서의 글을 썼다....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김해(金海). 김일손(金馹孫)의 후예로, 아버지는 김창봉(金昌鳳), 어머니는 효열부(孝烈婦)로 이름난 밀양박씨이다. 효자|김창봉|효열부|밀양박씨|효자비|밀양박씨효열비|이긍복|박병준|김한곤 일찍부터 효열부로 이름난 홀어머니를 정성을 다하여 모셨는데, 그 뜻을 한 번도 어기는 일이 없었다. 항상 어머니의 잠자리를 보살피고 맛있는 음식을 드...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녀. 김오(金墺)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정숙하고 효행이 뛰어났다. 출가 전에 부모의 상을 한꺼번에 당한 김씨는 이를 애통해 했다. 그녀는 장례를 치르기 전에는 죽만 먹었으며, 엄동의 추위에도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빈소를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김이구는 부모를 섬김에 자식의 도리를 극진히 다하였다. 부모의 병이 위독하자 그는 부모의 변을 맛보아 그 증세를 살폈으며,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부모에게 드려서 며칠 동안 목숨을 연명시켰다. 그의 처 충주지씨(忠州池氏)도 시부모를 극진히 섬겨 열녀로 이름이 높았다. 김이구의 효행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그에게 동몽교관...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김치도는 어릴 때부터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먹을 것을 주면 자신의 입에 넣지 않고 반드시 부모에게 먼저 드렸다. 부모의 병환이 위중하자 명산과 북극성(北極星)에 기도하며 치유를 갈구하였으며, 상(喪)을 당해서는 예절을 지켜 섭섭함이 없게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청도에서 창의(倡義)하여 남원...
-
전라북도 남원시 수지면 남창리에 있었던 서당. 1870년에 안남곡이 수지면 남창리에 처음 서당을 열었으며 뒤에 이곳의 유지들과 함께 운영했다. 초창기 안남곡의 지도 아래 많은 제자가 배출되었으며 한동안 서재도 보존되었으나, 현재는 그 터에 노인정이 세워져 있을 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 내동리에 있었던 서당. 1908년에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 내동리에 사는 순흥안씨와 남원양씨 문중이 서로 합의하여 마을 앞 연당의 서재에서 학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안골서당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김사헌, 김사문 등이 초기 훈장으로 부임하여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으며, 해방 후 1949년까지 운영되었다. 현재 서재는 남아 있지 않고 터만 남아...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효자. 본관은 밀양(密陽). 찬성(贊成) 박건(朴楗)의 아들이다. 1729년(영조 5)에 경상도 밀양부 동강방에서 출생하였으며, 뒤에 부모를 따라 남원부 보현방 벌촌마을로 이거(移居)하였다 9살 때 부친이 병에 걸려 여러 달 동안 병석에 누워 있자 그는 밤낮으로 옆에서 간병하면서 자신을 대신 죽게 해달라고 간절히 하늘에 기도하였다. 부친의 병세가...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시 출신의 효녀. 양씨는 무인(武人) 박승선(朴承善)의 아내이다. 그녀의 어머니가 지병인 풍병(風病)을 앓고 있었는데,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출가한 그녀에게 와서 의지하였다. 양씨는 손과 발이 불편한 어머니를 항상 보살폈으며, 추운 계절이건 더운 계절이건 어머니에게 맛있는 음식을 봉양하였다. 또한 자신은 거친 무명으로 만든 짧은 옷을 입으면서도 어...
-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방극용은 1919년 4월 4일 남원읍 장날을 이용하여 형갑수 등과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이 날 정오경 광한루 광장에 모인 1,000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며 남문을 거쳐 시장으로 시위 행진을 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일본 군경의 무차별 사격을 받아 현장에서 순국(殉國)하였다. 1968년에 대통령 표...
-
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호는 둔세옹(遯世翁). 아버지는 방덕준(房德峻)이다. 방대순의 아버지는 수족이 저리는 병에 걸려 거의 치료 불가능의 상태에 이르렀다. 효자인 그는 수소문 끝에 명의(名醫)를 찾아가 그 증세를 다스릴 수 있는 기술을 배워 마침내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였다. 그 뒤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한결같이 옛 예절을 준수하면서 상을 치렀다. 그...
-
전라북도 남원시 대강면 방동리 방골마을에 있었던 서당. 1800년에 진순응이 전라북도 남원시 대강면 방동리 방골마을에 사숙(私塾)의 형태로 서당을 처음 열었다. 진정표와 진우복 등이 차례로 방동서당의 훈장을 지냈다. 배출한 제자로는 1849년(철종 즉위년) 생원진사과 초시에 합격한 진경복과 1860년(철종 11) 문과 을과에 급제한 진창복이 유명하다. 뒤에 진순응의 후손...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시 출신의 효자. 아버지는 전적(典籍) 방원정(房元井)이다. 방명흡은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형제간에도 우애가 깊었다. 그는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하여 기(氣)가 막히게 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어머니에게 드려 목숨을 소생케 했다. 뒤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서는 죽만 먹었고 잠자는 것조차 괴로워하면서 온 정성을 다하여 상례(喪禮)를...
-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면에 있었던 서당. 1890년에 유환익이 마을 유지들과 뜻을 모아 남원시 운봉면 가산리에 병암재를 설립하였다. 오백지가 훈장으로 부임하여 학동들을 가르쳤으나, 1930년 2월 일제가 수차례에 걸쳐 서당의 해산을 요구하고, 오 훈장을 납치하려 하자 훈장이 피신하면서 서당이 폐설되었다....
-
전라북도 남원시 덕과면에 있었던 서당. 1800년에 영해군 이당의 후손인 매계 이도가 남원시 덕과면 신양리의 광주 이씨 집성촌이었던 사립안 마을에 이웃 마을의 유지와 협의하여 비촌서당을 열었다. 일명 사립안서당이라고도 하며 매계강당 건립으로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후 1945년까지 계속 운영되었다. 한때 풍양조씨 가문의 조일(趙逸)이 훈장을 지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
전라북도 남원시 일대에 설치되었던 조선시대 사설 초등 교육기관. 서당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초등 교육기관으로 마을마다 설치되어 어린 아이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서당의 기원은 멀리는 고구려의 경당(扃堂)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고려시대에도 그 존재가 확인되지만 크게 번창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였다. 서당은 처음에는 양반 가문의 자제를 교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는...
-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 서곡리 서동마을에 있던 서당. 서당리서당의 정확한 설립 연대는 전하지 않는다. 대체로 조선 중기 이후 설립되어 지역 유지들이 함께 운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설립 연대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예전부터 이곳을 서당동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영광유씨의 재실(齋室)에서 학동을 가르쳤는데, 광복 후인 1950년까지 계속 운영되었다....
-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 서무리에 있던 서당. 1903년에 전라북도 남원시 동면 서무리에서 마을 유지들이 함께 협력하여 서당을 개설하여 많은 학동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누가 설립을 주도하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초대 훈장은 문석린이 맡았으며, 그 뒤에는 외부에서 초빙하였다. 1950년까지 운영되었으며, 서당답 30두락이 있어서 이를 토대로 하여 서재를 보존·관리...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이천(利川). 호는 강석(江石). 서택인(徐擇仁)의 아들이다. 서택인부터 그의 손자 서봉주(徐鳳周)에 이르기까지 3세(三世) 5효열(五孝烈)을 배출한 집안으로 유명하다. 서영측은 형 서영팔(徐永八)과 함께 효성이 지극하여 홀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뒤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두 형제가 함께 시묘살이를 하였다....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구계공(龜溪公) 서침(徐沉)의 18세손으로, 아버지는 서한보(徐漢輔)이다. 서유경은 어버이를 섬길 때 정성을 다하여 봉양을 하였다. 그의 아들 서한보(徐漢輔) 역시 부모에 대한 효행이 극진하여 어머니 상을 당해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들 부자의 효행은 흔히 왕상이 겨울철에 얼음을 깨고 잉어를 얻어 부모를 봉양한 일화...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호는 낙재(樂齋). 아버지는 소규영(蘇奎永)이다. 출생한 지 8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었으나, 어려서부터 홀어미에게 지극 정성으로 효도를 하였다. 그는 아버지를 일찍 잃은 것을 항상 슬퍼하였으나 노모를 편히 봉양하는 일을 잠시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품행이 단정하고 학문에 힘써 식견이 고매하여 사람들로부터 많은 칭송...
-
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소병표는 어려서부터 조숙하여 부모의 뜻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또한 효심이 지극하여 항상 맛있는 음식을 부모에게 대접하였으며, 철마다 서늘한 옷과 따뜻한 옷으로 항상 갈아 입혀드리며 부모를 봉양하였다.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늘 자리를 지키면서 밤낮으로 구환하였으며, 대소변을 맛보면서 간병하였다. 그리고 뒷간의 수발이며 옷 빨래에 이르...
-
조선 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본관은 진주(晋州). 아호는 청암(靑巖). 고려 상호군(上護軍) 소희철(蘇希哲)의 후손이다. 고조는 소을생(蘇乙生), 증조는 소패(蘇覇), 할아버지는 소윤무(蘇允武), 아버지는 소찬(蘇贊)이다. 그의 처부는 종묘령(宗廟令)을 역임한 남원(南原) 양도(梁度)이다. 아들로는 성균생원 소석지(蘇錫智), 노성현감(魯城縣監) 소연(蘇沿), 사헌부감찰...
-
전라북도 남원시 대강면 사석리에 있던 서당 터. 1920년에 임모상과 마을 유지들이 뜻을 모아 대강면 사석리 마을 뒤편에 서당을 설립하였다. 초대 훈장으로는 당시 호남의 거유(巨儒)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을 초빙하였는데, 그는 이 마을에 기거하면서 20여 년간 후학을 양성하였다. 서당 개설이후 1970년까지 많은 제자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었으며, 고명한 후학들을 또한...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열녀. 본관은 경주(慶州)로,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다. 신익룡의 처 이씨는 시집 온 지 몇 달이 채 안 되었을 때 남편과 함께 멀리 떨어진 마을의 친족 모임에 나갔다가 날이 어두워 귀가하던 중 갑자기 반노(叛奴)와 맞닥뜨렸다. 이들은 남편을 죽이려고 하였고 술에 취한 남편은 말에서 떨어져 인사 불성이었다. 이때 이씨는 위험...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열녀. 본관은 언양(彦陽). 아버지는 부사(府使) 김건(金健)이다. 김씨는 좌랑(佐郞) 안극충(安克忠)의 아내이다. 어느 날 화적(火賊)들이 느닷없이 집안으로 들이닥쳐 남편에게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이때 김씨는 두 팔로 남편을 가로막고 그 대신 칼에 찔려 죽었다. 덕분에 남편은 간신히 화를 면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자신을 희생하고...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사칙(士則), 호는 백강(栢岡). 아버지는 첨추(僉樞) 안숙(安橚)이다. 안극효는 1741년(영조 17)의 식년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가 사헌부의 지평, 장령, 헌납 등 주로 언관직에서 근무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여 권력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활발한 언론을 펼쳤다. 일찍이 영조와 8촌간인 여천군(驪...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안대중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9살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큰아들 안사오(安嗣吳)와 함께 권율 장군의 막하에 들어가 왜군과 싸우다가 여원치(女院峙)에서 부자가 함께 전사하였다....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광주(廣州). 아호(雅號)는 국포(菊圃). 청백리 사간공(思簡公) 안성(安省)의 8세손이다. 안우는 효자 집안의 후손으로 그 또한 부모에 대한 효심이 깊었다. 19살 때 부친이 돌아가자 상례(喪禮)에 따라 정성을 다해 장사를 치렀다. 그 뒤 모친이 병환으로 누워 있으면서 별미(別味)를 원하자 지성으로 이를 구해다 주었다. 모...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면숙(勉叔), 호는 백계(白溪). 아버지는 주부(主簿) 안삼석(安三錫)이다. 안재도는 학문적으로 뛰어났으나 벼슬길에 나가지는 않았다. 그는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자 방장산(方丈山) 밑 요호(蓼湖)에 은둔하여 일생을 마쳤다. 문헌공(文獻公) 박성원(朴聖源)이 그의 묘비명을 지어 백계처사(白溪處士)라...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문보(文寶), 호는 죽암(竹巖). 사재당(思齋堂) 안처순의 아들이다. 안전은 문장(文章)과 행실(行實)이 뛰어났으나 과거 공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덕성을 숨기면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순지(順之), 호는 기재(幾齋), 사재당(思齋堂). 그의 증조는 안구(安玖)이며, 조부는 전주부윤(全州府尹) 안지귀(安知歸)이고, 아버지는 전적(典籍) 안기(安璣)이다. 어머니는 조양임씨(兆陽林氏) 능성현령(綾城縣令) 옥산(玉山)의 딸이다. 안처순은 1513년(중종 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이듬해 별...
-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양계상은 일찍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8살 때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하자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의 피를 내어 아버지에게 주었고, 이어 허벅지의 살도 베어 주었다고 한다. 뒤에 어머니가 중병을 앓았을 때 어머니의 소원인 잉어를 구하기 위해 엄동설한에 냇가에 나가자, 때 아닌 잉어 한 마리가 얼음 위에 나와 있어 이를 구하여 어머니...
-
고려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은 남원. 호는 호은(湖隱). 충숙왕 때 참지정사를 지낸 문인공(文仁公) 양일(梁溢)의 후손이다. 양사철은 고려시대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평리(門下評理) 삼중대광(三重大匡)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사』 등에서 그의 행적은 찾아볼 수 없다....
-
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녀. 아버지는 첨지(僉知) 진재창(陳再昌)이다. 양여형(楊汝亨)의 아내 진씨(陳氏)는 경사(經史)에 능통하였으며, 효성 또한 지극하여 부모를 봉양할 때에는 한번도 그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결혼해서는 시댁에 의지하지 않았다. 본가에서 살면서 부모의 상을 당했던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고 죽만 먹는 등, 그의 오빠 진극서(陳克緖)와 진극...
-
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열녀. 양진원의 아내 윤씨는 남편의 상을 당하자 3개월 동안 그 시신을 부둥켜안고 지냈다. 또한 삼년상을 치르면서 날마다 통곡하는 그녀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감동하여 함께 울었다고 한다. 윤씨의 열행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의 특전이 내려졌다. 그러나 정확한 명정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
고려와 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의 별호(別號). ‘용성’이 남원의 별호라고 처음 지칭한 것은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서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남원을 가리키는 말로 용성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 『고려사』에 나오는 용성의 사용례를 찾아보면 대부분 수주(水州)[수원]의 속현이나 안변도호부에 속한 등주(登州)의 속현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남원을 가리키는...
-
고려시대에 전라북도 남원 일대에 설치되었던 여객(旅客) 및 교통 제도. 원(院)은 일반 여객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는 일종의 여관이었다. 그러나 국왕이 지방을 순시하거나 피난길에 이용되기도 했으며, 각 도 관찰사가 고을을 순행할 때에 점심을 먹거나 마필을 교체하는 곳으로도 쓰였다. 또한 원은 민심을 파악하거나 고을 수령들에 관한 내사(內査) 자료를 얻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
고려시대에 전라북도 남원 일대에 설치되었던 수운(水運) 제도. 진(津)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전국의 주요 강변의 요충지에 설치했던 나루터이다. 관진(關津), 진관(津關) 또는 도(渡)라고 불렸다. 원래는 드나드는 사람들을 검색하기 위해 설치되었지만, 실제로는 교통 및 통신 기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남원부와 그 관할 군현들은 내륙 깊숙이 위치에 있지만 섬진강을 통해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