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1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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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東完 |
이칭/별칭 | 근곡(槿谷)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계형 |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포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호는 근곡(槿谷). 아버지는 박형순(朴馨淳)이다.
[활동 사항]
박동완(朴東完)[1885~1941]은 1885년 12월 27일 포천에서 민족의식이 강한 박형순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비교적 여유 있는 가정에서 자라 다섯 살 때부터 독선생을 두고 한문을 배웠으며 열세 살 때 포천의 명문가 현석윤의 딸 현마리아와 혼인하였다.
1901년 서울로 이주하여 종로구 수하동에 정착하고 양사동 소학교, 한성 중학교, 한성 외국어 학교, 배재 학당 대학부를 졸업하였다. 한성 외국어 학교에서 수학 후, 감리교 정동 제일 교회의 전도사로 근무하는 한편, 기독교 신보사의 서기로 전도와 독립사상의 고취에 힘썼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 자결주의 사상에 공감하고 있던 차에 1919년 2월 중앙 기독교 청년회 간사 박희도(朴熙道)로부터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이에 찬동하였다. 2월 27일 이인환(李寅煥)·함태영(咸台永)·박희도·이갑성(李甲成)·오화영(吳華英)·최성모(崔聖模)·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 등과 함께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정동 제일 교회 내에 있는 이필주 목사의 집에 모여 천도교 측에서 작성한 독립 선언서에 민족 대표로서 서명하였다. 이튿날 2월 28일 밤,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 손병희(孫秉熙)의 집에서 다른 민족 대표들과 만나 독립 선언에 따른 최종 협의를 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경,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의 태화관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 대표로 참석하여, 독립 선언서를 돌려 보고 만세 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시청 총감부에 구금되었다. 1920년 경성 복심 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 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중앙 기독교 청년회 소년부 위원장·신간회(新幹會) 상임 간사 등을 역임하였다. 1931년 7월 2일 중국 지린 성[吉林省] 장춘현(長春縣) 만보산 지역에서 일제의 술책으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수리 관개(水利灌漑)사업을 둘러싸고 충돌하여 한국과 중국의 인명 피해와 막대한 재산을 잃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각 사회단체의 주요 인사들과 같이 재만 동포 옹호 동맹(在滿同胞擁護同盟)을 설립하고 중앙 상무 집행 위원으로 임명되어 만주의 펑톈 성[奉天省]과 지린 성 일대를 돌며 재만 동포의 상황을 조사하고 한국과 중국 양국민의 융화에 힘썼다.
1933년 미국 오아후 섬의 한인 기독교회 초대 담임 목사로 부임하여 그 곳에서 약 12년간 목회를 하였다. 교포 2세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쳐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기 위해 교회 부설 한글 학교를 확장하였다. 또한 국내의 흥업 구락부(興業俱樂部)와 비밀 연락을 취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나라가 일본에게 강점당하자 평생 한복을 입되 바지 대님을 매지 않았다. 해방될 때까지는 대님을 매지 않겠다는 의지를 실천한 것이다. 또한 당시 시간은 일본의 표준 시각에 맞춰 있었는데, 이를 싫어하여 일부러 시계를 30분 늦게 맞추어 살았다.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지만 그리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1년 2월 23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