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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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성남시의 금광동과 단대동, 상대원동, 신흥동, 은행동 등 옛 금광리, 단대리, 상대원리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정리한 마을지. 『금광·단대·상대원 마을지』는 상대원을 중심으로 신흥동, 산성동, 단대동, 양지동, 은행동, 금광동, 중동[현 중앙동] 등 8개 동을 중심으로 하여, 마을의 역사와 지명, 세거성씨, 지리적 환경, 문화유적, 주요기관과 사회적 기능, 생활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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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 주민들의 구술 생애 자료를 서사물로 재구성한 책. 성남문화재단의 '우리동네 문화공동체 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상대원이라는 공간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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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성남시의 건물, 구조물 등을 쌓아 만드는 일 또는 사람이나 물품 등을 수용하기 위한 구축물. 건축의 범위와 종류는 매우 광범위하여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집이나 궁궐, 사찰, 관아 건물은 물론이고, 성곽, 교량, 탑, 부도, 심지어는 무덤까지도 건축의 범위에 속한다. 또 그 재료에 따라서도 나무로 만든 목조 건축, 흙으로 만든 토축 건축, 벽돌로 만든 전축 건축, 돌로 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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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씨는 숭신여중을 거쳐 숭신여고를 다녔다. 집이 있는 태평동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은 산길이었다. 초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던 길이었지만, 가끔씩은 무서운 곳이기도 했다. “그 길이 지금도 아주 생생해요. 뒷길이 다 산길이었어요. 사고도 많이 보고 사람도 죽고, (거기서요) 예. (어쩌다가 사람이 죽어요) 그때 당시 어렸을 때 충격 먹은 게, 무슨 쫓아갔는데 살인 사건이래요.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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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자랑하는 사람은 팔불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궁씨는 아내가 고맙고 자랑스럽다. 아내는 1남 1녀의 아들 딸을 잘 키웠다. 딸은 대학에 다니고 아들은 대학을 준비 중이다. 그 아이들은 궁씨의 고향인 상대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의 고향도 상대원이다. “우리 아들 딸은 빨리 가자 왜 여기 살고 있냐 난 이유를 모르겠다 라는 쪽이에요 특히 아들네미가 그런 주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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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상대원은 거의 차댈 데가 없을 정도로 도로를 차들이 점령하고 있다. 하지만 지석태가 자랄 때만 해도 거의 차가 없었고, 당시에는 체구도 작아서 동네길도 운동장처럼 느껴져서 동네만큼 놀기 좋은 곳도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바로 거기서 동네 친구들이랑 뛰어 노는 게 지석태에게는 제일 큰 재미이자 즐거움이었다. 그 곳에서 지석태는 평생 알아야 할 놀이나 게임의 8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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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성남시에 세거하는 성씨의 하나. 광주이씨는 광주(廣州)의 토성으로 성남을 본관으로 하는 명문이다. 광주이씨의 중흥조라 할 수 있는 고려 말의 이당(李唐)은 광주의 아전을 지내다가 생원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했다. 그 중 둘째아들 둔촌(遁村) 이집(李集)이 고려 말에 이색, 정몽주, 이숭인 등과 깊이 사귀고 고려가 망하자 현재 서울 강동구 둔촌동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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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구보의 집은 답십리 개천 주변에 있었다. 이삽십 평 남은 되는 집이었다. 끼니도 어려운 사정이었으니 집의 형편이야 짐작이 가지만, 그래도 어머니에게는 더없는 의지처였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바람은 밖에서 불어왔다. 소년 구보가 초등학교 2학년 될 때쯤 서울은 재개발 바람이 불었고, 소년 구보가 살던 답십리 개천 일대도 철거 대상이 되었다. 구보의 나이 아홉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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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집안의 가장이 된 구보는 구두 공장에 다니면서 구두일 하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들이 그랬다. 직접 구두 수선하는 일을 배워 보라고, 공장 다니는 것보다 보수가 훨씬 낫다고. 그도 그 일을 해보고 싶었다. 한참을 망설이고 생각했다. 한 달 두 달 일 년, 그 이상 고민하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신문을 보게 되었다. 구두 세탁과 수선을 함께 하는 사람의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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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발 구두세탁소는 잘 되었다. IMF 경기 한파의 덕을 본 것이 운이 따랐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오토바이를 이용한 신속 수거 배달이 사람들에게 먹혔던 것이다. 가파른 언덕배기 많은 상대원 인근에서 오토바이는 영업에 없어서는 안 될 일등공신이었다. 하지만 구보는 그게 늘 불안했다. 언덕배기에서 자칫 오토바이 사고라도 나는 날이면 큰 일이라는 생각이 때때로 머리를 스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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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가 아내를 만난 건 그로부터 2년 정도 지난 후였다. 나이가 서른 즈음이 된 신앙심 깊은 그에게 주변 사람들이 중매를 서겠다고 나섰다. 아주머니들은 언제나 신앙심 좋은 아가씨를 물망에 올려놓고, 청년과의 결혼 생활을 요모조모 그려보고 예상해 보았다. 구보의 집에 세들어 살던 젊은 아주머니도 그랬다. 오랫동안 그를 지켜보고 이만 하면 되겠다는 판단을 하고서, 아는 친구의 여동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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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구보의 형은 집안의 장남이었고 기둥이었다. 형은 똑똑한 편이었고 공부도 좀 잘 했다. 형은 비인가 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다시 검정고시를 봐야 했다. 그래야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소년 구보는 포기해도 형만은 공부를 계속하기를 바랬다. 구보도 거기에는 별 불만이 없었다. 형이 좀 더 나은 집안을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큰 바람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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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범구가 초등학교 3학년 되었나, 그 무렵에 분당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그때 28평 아파트가 육칠천 갔었다. 그때 노씨 아줌마는 부업으로 벌어들인 꽤 큰 목돈을 쥐고 있어서 분당으로 이사갈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남편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아깝고 후회스럽다. 그때 그 일을 실행에 옮겼다면, 하는 말로 그때 그거 잡았다면, 노씨 아줌마의 인생길이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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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성남시에서 일정한 목적을 위하여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는 조직적인 경제 단위. 성남시에는 KT 등 대기업 본사를 비롯하여 대기업의 물류 센터, 제조 공장, 은행, 백화점 등 많은 기업이 활동하고 있다. 분당신도시 개발 이전에는 중소 제조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나 분당신도시 개발과 함께 대기업 본사, 벤처 기업들이 성남 지역으로 이주하여 성남시의 기업들은 새로운 발전 단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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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구는 노씨 아줌마의 큰 아들이다. 남편 강씨는 성남 상대원동 구석에서 이름도 없이 살지만, 범구만은 넓은 세상에 나가 살길 바랬다. 다행히 범구는 깐깐하면서도 화통하고 남자다웠다. 자기를 더 많이 닮은 큰 아들을 보면 노씨 아줌마는 뿌듯했다. 아들 범구는 공군사관학교를 가서 전투기 조종사가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수술 자국이 있어서 불가능했다. 한동안 방황하는 범구를 노씨 아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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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남편은 상대원1동에 자신의 석유가게를 내고 7년 간 운영했다. 그리고 잠깐의 외도(당구장 사업) 후에 상대원3동으로 옮겼다. 그 후로 지금까지 장장 9년의 세월이 흘렀다. 1994년도에 결혼을 했는데, 그 직후만 해도 석유가게의 석유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남편과 두 명의 기사들이 배달을 나가면, 그녀는 가게로 석유를 사러 오는 사람들을 상대했다. 손님들은 줄을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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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씨는 상대원의 변화를 다른 부분에서도 느낀다. 상대원은 더 이상 폐쇄된 지역사회가 아니다. 상대원은 이미 세계를 향해 열린 사회이다. 상대원에 많이 생겨나기 시작한 다문화가정이 그것을 증명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다문화가정에 관심을 갖기도 하고, 정책적으로 동사무소 같은 데서 외국인 대상의 문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한다. 궁씨와 같은 사진작가 중에는, 다문화가정을 대상으로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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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 재래시장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젊은 사람들은 좀 비싼 가격이라도 백화점과 대형마트의 깔끔한 매장을 선호한다. 최근 들어서는 온라인 쇼핑도 여기에 가세했다. 염씨의 딸도 한 달에 몇 번씩은 온라인 쇼핑을 이용하고 있다. 이래저래 상대원시장은 긴 침체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염씨가 운영하는 그릇가게도 월매출이 계속 줄더니, 요즘 들어서는 임대료 내고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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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과 하대원동에 있었던 옛 지명. 대원동리는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군 세촌면에 속해있던 마을로 이후 상대원리와 하대원리로 구분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상대원리는 중부면에, 하대원리는 돌마면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모두 중원구에 편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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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성남시 중원구에 있는 중천. 고려 시대에 대원(大院)이 있어서 위쪽을 상대원 아래쪽을 하대원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대원천은 상대원에서 하대원을 거쳐 흐르기 때문에 대원천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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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성남시 중원구의 상대원동과 갈현동을 연결하는 터널. 대원터널은 성남시 중원구 도촌동에서 수정구 신흥동까지 연결된 주요 간선도로인 희망로에 설치되어 있으며, 교통정체 해소와 도심의 균형적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대원터널이 개통되면서 돌마로에서 수정로까지 이어져 갈현동과 상대원동을 연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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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가게를 접은 지 그럭저럭 1년이 지났을 때, 백씨의 남편은 상대원으로 돌아와서 다시 석유가게를 냈다. 원래 남편은 서울 마포 사람이었다. 총각 때 누나(지금의 시누이)를 쫓아 성남으로 왔다. 그리고 상대원 최초의 석유가게였던 대원석유에서 직원으로, 소장으로 일했었다. 총각 때부터 해오던 일이라 우선 시작하기는 쉬웠다. 석유는 전화 장사였기 때문에 고정 고객 확보가 중요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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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씨 아줌마, 그녀는 강원도에서 태어났다. 어느 날 아버지가 성남이 개발될 것이라는 정보를 어디서 주워듣고 와서는 보따리를 싸게 했다. 성남과의 느닷없는 인연이 시작된 것이었다. 물론 노씨 아줌마는 아직도 아버지의 정보의 출처를 알지 못한다. 출처조차 확실치 않는 정보에 의지해서 그녀의 가족은 1968년 무렵 성남으로 이주해 왔다. 그녀 나이 9살 무렵이었다. 아버지 대신 엄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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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또기계라고 했다. 하도매기계라고도 했다. 그것은 배낭 같은데 구멍을 내고 조리개를 끼워 압착하는 기계였다. 잠바 같은 옷의 똑딱이 단추도 그 기계로 달았다. 노씨 아줌마의 부업이 본격화된 것은 또또기계가 집에 들어온 이후였다. “첨에 6개월 작업이 있으니까 고거 좀 해 줍사 하고 어떤 제안이 왔어요 저한테. 어떤 사장이지 말하자면 하청 사장이 그런 식으로 제의가 와 가지고, 초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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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씨가 1971년에 상대원으로 들어온 것은 정말 우연한 일이었다. 눈이 하얗게 내린 날 상대원고개 마루에서 버스를 내린 후로, 벌써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처음에 봉씨의 집은 미아리 천지극장 앞에 있었다. 봉병용이라는 사람의 소유였는데, 그는 일본에서 크게 성공한 자기형의 재산을 맡아 관리하면서 이런저런 사업에 손을 대던 사람이었다. 그가 일자리도 주었고, 가게가 딸린 방도 공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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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씨의 남편은 상대원에서 석유가게를 운영했다. 남편은 착하고 성실했으며, 석유가게는 굉장히 잘 되었다.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석유 배달을 했고, 그런 덕분에 돈을 꽤 모았다. 그러다가 남편은 다른 사업을 해보겠다고 했고, 어느 날 갑자기 새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석유장사 해서 모았던 1억 6천만 원을 불과 6개월 만에 송두리째 날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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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시장에는 가게 앞마다 노점도 많았다. 노점을 하는 사람이나 상가를 운영하는 사람 모두가 상대원시장이라는 공동체 내에 있었다. 그들은 친목회도 같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염씨는 친목회 회원에게서 동업 제안을 받았다. 헌집을 매입하여 새집으로 지어 파는 일이었는데, 집을 많이 지어본 사람의 제안이라 거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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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씨 아줌마는 2007년 10월에 상대원을 떠나 현재의 성남동으로 이사했다. 이사 전까지는 부업을 계속했다. 그녀는 스스로 생각해도 일복이 참 많았다. “진짜 수없이 밤낮없이 했어요. 어느 때는 새벽부터 일어나가지고 밥 간단하게 해주면서 애들 가기 전부터 시작을 해야 돼요. 그냥 뭐 몸빼바지 하나 주서 입고 허구헌 날, 그 시간대를 맞춰줘야 되니까 날짜를 맞춰줘야 되기 땜에.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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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 초에는 그냥 집안일만 했다. 하지만 삶의 목표를 생각하면 뭐라도 해야 했다. 그러다가 주위 할머니들을 도와 심심풀이 삼아 도라지 까기를 시작했다. 상대원시장 상인에게서 도라지를 받아다가 한 양푼씩 까면 그 때 돈으로 1000원을 받았다. 1986년 즈음해서 우연히 지퍼 부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389단지의 쓰러져 가는 허름한 2층 기와집으로 이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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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상대원은 본래의 느낌이 너무 없어졌다. 상대원은 이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낡은 도시의 한 지점에 불과하다. 지석태는 그것이 간혹 안타까움으로 다가섬을 느낀다. 안타까움은 그리움으로 전화된다. 그러면 그리움이란 우리의 삶에 무엇일까? 한낱 의고적 취향일 뿐일까? 상대원은 지석태에게는 또한 저만치 밀어두고 싶은, 묻어두고 싶은 장소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안 그랬거든요. 예전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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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씨가 사진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 부터였다. 흑백사진에 매료되어서 78년도부터 입문하게 되었다. 당시 서울 새나라백화점 7층에 있던 서울사진학원에서 배웠고, 우연치 않게 군 사진병 제도라는 것이 있다는 걸 알고 사진병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성남에서 을지로5가까지 다니는 570번 버스 있었죠. 상대원에서는 저쪽에서는 66번 있었고. 그 버스들 완전히 콩나물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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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생활 안정 및 교육, 직업, 의료 등의 보장을 포함하는 복지를 추구하기 위해 설립한 단체 사회복지는 현대사회의 구조적 소산인 사회제도의 하나이며, 생활문제의 예방과 해결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사회보장을 그 주요한 구성 부분으로 하고 있는데, 그밖에 성립 사정과 사회적 기능 등에서 사회보장과 일부 또는 전부가 공통되는 여러 제도도 포함되어 있다. 좁은 뜻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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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씨는 남편을 만나 혼인신고를 하기 위해 호적을 정리하면서 생모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다시 알게 되었다. 생모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에도 줄곧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어 왔기 때문에, 생모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또 한 번의 충격이었다. 집에서는 생모의 행방을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경찰서에 생모를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부탁해 보았지만, 서민의 아픔을 하나 하나 어루만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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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상대원1동 쪽에 공장들이 많이 들어섰다. 공장에서는 서울서 온 철거민들이 일을 했다. 젊은 사람들부터 아저씨 아줌마들까지 상대원 공장으로 일을 다녔다.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올라온 총각 처녀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들 모두에게 인근의 상대원시장은 삶의 거점과 같은 곳이었다. 쉬는 날이 오면 상대원시장통에는 총각 처녀들로 넘쳐났다. “일요일 날 보면은 그 젊은 청년들이 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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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씨는 3학년까지 성남초등학교를 다녔다. 성남 상대원을 비롯해서, 단대리, 수진리, 탄리, 그리고 모란에서도 다니는 친구들이 있었다. 학교 가는 길은 그야말로 고개 넘고 물을 건너는 험한 길이었다. 황서고개와 박석고개를 넘어야 하는 학교길은 겨울엔 너무 추웠고, 날씨 좋은 날엔 가끔씩 출몰하는 문둥이 때문에 무시무시하기만 했다. 문둥이는 가끔씩 고갯길 이곳저곳에 나타나 등교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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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 사람들 이야기는 성남시 상대원동 주민들의 구술 생애 자료를 서사물(이야기북)로 재구성한 것으로, 성남문화재단의 ‘우리동네문화공동체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라틴 아메리카의 작가 마르케스가 자신의 자서전에 쓰고 있듯이, “삶은 한 사람이 살았던 것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더 나아가 기억을 어떻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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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씨가 3년간 사진병 복무를 마치고 성남으로 돌아왔을 때, 성남에는 비디오 붐이 일었다. 결혼식, 회갑잔치 때 한 30~40분 찍어 편집해 주면 15원만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금새 경쟁업체들이 생겨나면서 가격은 7~8만원 대로 떨어졌다. 그 후로 얼마동안 궁씨는 주중에는 전자제품 대리점을 하는 형님 가게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결혼식장에서 결혼식 사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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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 재개발에 대해서 은근히 집에서도 기대를 하는 것 같아요. 확실한 어떤 정보를 가지고 기대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여기 사는 사람들에겐 큰 관심거리죠. 재개발하면 과연 우리집은 어떻게 비싸게 팔릴까. 우리는 어떤 이익을 받을까. 그런 기대요. 여기 사람들은 재개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너저분한 느낌을 많이 받잖아요. 요즘은 건물들이 다 많이 올라가 있는데 여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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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흔들리는 중이다. 그렇지만 나에겐 꿈이 남아 있다. “청소년들을 되게 좋아해요.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이들하고 대화를 나눈다거나 얘기를 나누는 게 되게 기뻐요. 기쁘고 편하고 말이 너무 잘 통하고 그리고 아이들의 삶에 좋은 발전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건 되게 보람을 많이 느끼고 그게 기쁘고 삶의 즐거움이거든요. 그래서 계속해서 교직을 도전을 해서, 교직 임용고시를 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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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 때 다시 성남으로 돌아오기 전, 우리 가족은 이천 쪽에서 살았다. 아빠는 제조업 분야에서 일했다. 라켓을 만들던 한일라켓, 구두를 만들던 에스콰이어 공장에서 근무하였다. 이천은 아빠의 일터가 있던 곳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친구들과 들로 물로 돌아다니던 이천이 그립기도 하다. 그후 성남으로 다시 돌아온 우리 가족은 금광2동에 자리를 잡았다. 경사가 심한 골목에서 뛰노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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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씨의 눈에는 상대원의 변화가 늘 안타깝다. 상대원이 자꾸 죽어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뒷걸음질하는 상대원을 다시 활기찬 동네로 만드는 방법들이 그리 멀리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마음처럼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상대원3동 자치센터 위원장을 맡고 있으면서 머리 속으로는 여러 가지 궁리를 해 보기도 했다. 우선 상대원에도 지하철이 필요해. 상대원을 지나는 버스가 아무리 늘어도 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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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성남시 중원구에 있는 법정동. 상대원동은 중원구 남단에 자리 잡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은 상대원1동, 상대원2동, 상대원3동이다. 검단산 줄기 남쪽 구릉지를 차지하여 지대가 높고 기복이 심하다. 1970년대 광주대단지 조성 당시 성남 이주 철거민 고용을 위해 조성된 성남산업단지 제2공단, 성남산업단지 제3공단이 상대원동에 준공되면서 초기 성남 지역의 산업을 이끌었고, 상대원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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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작업을 하면서 궁씨는 상대원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 철거민들이 이주해 와서 천막치고 살던 69년, 70년부터 상대원은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처음 상대원동은 찌들은 인생들의 집합소였다. 삶은 어렵고 구차했었다. “옛날에 지금 공단이 2공단 3공단으로 돼 있거든요. 그런데 3공단 쪽이 늦게 생겨가지고 그 당시에 철거민들이 땅을 준 걸 팔고, 제가 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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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에 있었던 지명. 본래 경기도 광주군 세촌면 지역으로 대야원[하대원동] 위쪽이 되므로 웃대원 또는 상대원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보통골, 중간말과 군내면의 사기막골을 병합하여 상대원리라 하여 중부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성남시에 편입되면서 상대원동이 되었고, 1989년 중원구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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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3동에 있는 근린상권형 시장. 상대원시장은 1970년대 조성된 상대원 공단에 노동자들이 몰리면서 번성하였으나, 1990년대 이후 상대원 지역 공단들의 이전과 대규모 할인마트 등장 등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소규모 근린상권형 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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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시장은 상대원공단과 지역적으로만 붙어 있는 것이 아니다. 궁씨는 상대원시장이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공단의 인력을 시장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주민 자치센터 위원장이 되면서부터는 그런 생각이 보다 분명하고 확고해졌다. 그래서 기회만 생기면 이런 생각을 말해 왔다. 오늘도 궁씨는 혹시 할 말을 빠뜨리지 않았나 걱정이다. “아 내가 한 마디 덜한 게 하나 있다.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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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씨의 고향에서 땅 한 평에 4천원 하던 시절, 상대원에서는 20평에 2만원이었다. 한 평에 천원 꼴이었다. 그러니 300평 정도만 사서 팔면 남의 일 안하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고향 어른들에게 도리가 아닌 듯하여 많이 망설였다. 하지만 봉씨는 더 이상 떠돌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집이라도 팔아 자리잡고 장사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미리 봐둔 가게 자리가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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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 사람들은 남한산성에 자주 오른다. 궁씨도 황송공원 쪽을 통해 자주 오른다. 황송공원에는 게이트볼을 하거나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들도 있다. 지금이니까 등산도 하고 게이트볼도 치지만, 궁씨가 젊었을 당시에는 데이트 장소도 시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에는 젊었을 때 데이트 같은 건 종합시장이 제일 좋은 장소였죠. 종합시장 다음에 상대원시장 쪽이었죠. 상대원시장 쪽도 그 당시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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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씨는 분당 아파트에 입주한 지 10년 만에 팔아버렸다. 한국에서 월드컵 열풍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던 2002년이었다. 48평 아파트를 3억 5천에 달랑 팔아치웠으니, 지금 생각하면 싸도 너무 싼 가격이었다. 노무현 정권 말기에 아파트가 최고점을 찍고 1년 만에 반토막에 가까워진 지금 시세보다도 싼 가격이었다. 그리고 염씨네는 다시 상대원동으로 들어왔다. 처음에 살던 장모님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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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의 첫 가게는 겨우 5,6평 정도 밖에 안 되는 조그만 크기였다. 그래도 시장 내에 자리가 난 가게는 거기 밖에 없었다. 가게를 상대원으로 옮기긴 했지만 장사 밑천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 연 가게라 단골 손님도 없었다. 가게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염씨는 아끼고 또 아껴야 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게 그 때 여기 처음 이사와 가지고 김장을 50포긴가 했을 거예요. 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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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 아랫시장은 제대로 된 호황기를 맞았다. 장사가 잘 되니까 점포에는 권리금이 오고갔다. 가게 자리를 원하는 사람은 많았는데 건물이 없는 형편이었다. 집들을 층을 올리고, 작은 지하실도 파서 활용하기도 했다. 한번은 지하에 다방을 내려고 터를 파다가 계속 물이 나는 바람에 무척 애를 먹은 적도 있었다. 상대원시장터가 원래는 늪지대였던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대형 상가를 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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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은 이제 재개발 이야기가 나돈다. 봉씨가 생각하기에도 상대원은 많이 낙후되고 노후된 지역이 되어 버렸다. 마치 낡은 흑백필름 속의 세상을 보는 듯, 혹은 이미 오래 전에 변화가 멈춰버린 고립된 마을을 보는 듯하다. “새로운 신선한 이미지도 없고 노후될대로 됐고, 사람들도 전부 다 나태해졌고. 상인들도 요즘 들어온 사람들도 옛날에 있던 사람이 나태해 있으니까 나태해질 수밖에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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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씨네 가족이 아파트에서 좀 더 나은 삶을 꿈꾸기 시작했을 때, 염씨의 가게가 있는 상대원시장은 정반대의 운명을 맞이하고 있었다. 분당 신도시로 인해 상대원시장은 차음 활력을 잃어갔다. 상대원시장의 손님들이 신도시에 들어선 백화점과 현대식 마트들로 발길을 돌렸다. 특히 분당의 백화점들이 운행하는 셔틀버스는 상대원시장에 치명적이었다. 상대원의 지역민들에게 새로운 쇼핑 기회를 제공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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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시장에는 이평원 씨라고 야채 장수가 있었다. 이평원 씨는 원래 웃시장에서 장사 잘하고 있었다. 70년대 초만 해도 재래시장에서 야채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 품목이었다. 야채는 어려운 사람들이 매일 먹어야 하는 찬거리였다. 생선은 일주일에 한 번, 고기는 형편대로 먹고 없으면 안 먹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랫시장이 살아나려면 야채가게가 반드시 필요했다. “야채가 있어야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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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태의 스물 여덟 해 삶은 평범했다. 앞으로도 뭐 그리 특별한 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살아온 스물 여덟 해 중에서 열다섯 해는 상대원에서 보낸 세월이었다. 비슷한 환경을 가진 상대원 주변 지역에서의 삶을 더하면 스물다섯 해를 보낸 셈이었다. 상대원은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졸업, 대학에 입학하고, 군복무를 하고, 다시 복학하여 졸업할 때까지 그의 삶의 근거지 역할을 했다.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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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에는 중학교가 없었다. 그래서 중원초등학교 졸업생은 숭신여중이나 금광중학교, 아니면 대원여중[현 대원중학교]으로 진학했다. 내가 간 숭신여중은 공부를 많이 시키기로 유명했고, 두발이나 복장 규정이 까다로웠다. 많은 아이들이 그것을 싫어해서 금광중이나 대원여중으로 진학했다. 학교까지는 걷기에는 좀 먼 거리였다. 가끔씩은 누군가의 차를 얻어 타기도 했지만(그게 누군지 기억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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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씨는 90년인가 어느 날 평화방송에서 꽃꽂이 강좌를 보다가 그것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처녀 시절에 아트 플라워와 분재를 배우던 취미가 꽃꽂이로 이어졌다. 좋은 선생을 찾아 월 수강료 70만원을 투자하였다. 전시회도 열심히 쫓아다녔다. 그리고 사범자격증도 땄고, 강의를 하기도 했다. 백씨는 다른 지역에서 꽃꽂이 강의를 하면서 상대원에도 꽃꽂이를 보급시키고 싶었다. 그런데 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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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씨가 처음 상대원으로 이사왔을 때 상대원의 땅값은 굉장히 쌌다. 한 평에 천원 남짓. 그런데 지금은 전국에서 성남만큼 땅값이 많이 오른 데가 없다. 상대원시장에서 장사하던 상인들 중에도 복덕방에 자주 놀러다니고 땅에 투자했던 사람들은 모두 잘 산다. 반면에 착실히 장사만 했던 사람들은 먹고사는 것으로 끝이었다. 다행히 봉씨는 아내가 서둘러, 이사온 지 10여년 만에 집을 장만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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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 사람들의 삶은 대부분 팍팍했다. 부모들은 삶에 쫓겨 아이들을 돌볼 겨를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의 간섭 없이 커 나갔다. 어떤 아이는 어려서부터 술과 담배를 배웠고 또 어떤 아이는 약간 방탕끼를 갖고 제멋대로 살았다. 어려서부터 집을 떠나 객지로 떠도는 아이들도 간혹 있었다. 그도 한때 한동안 그런 방탕한 시간을 보냈다. 친구들도 그런 부류의 친구들이었다.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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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분양받은 상대원 집터 주변은 그 후 5년이 지나도록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산을 깎아 급하게 만든 그곳에 생계를 이어갈 방편이나 일자리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원 지역은 집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계속 집들이 지어졌다. “5년 이상 지나고 하니까 집들이 점점 생기기 시작하드만 71년 지나 5년 지나니까 어느 정도 들어서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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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에는 황촌말, 송촌말, 대원, 보통골, 사기막골 등 옛날 마을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토박이 궁씨는 옛날 마을들을 마음 속에 쉽게 그릴 수 있다. 황촌말은 요기 앞동네고, 대원은 상대원1동 사무소 뒤쪽으로 원주민촌이 있었다. 사기막골 같은 데는 상대원에서도 문화적 값어치가 나가는 동네이다. 궁씨는 간혹 성남의 문화유적을 촬영하러 나선다. 작년 여름에는 사기막골을 카메라에 담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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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 아이들이라고 별다르게 놀 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원의 지형적인 특성을 살린 특별한 놀이도 없었고. 어렸을 때는 사내들끼리 남성다움, 난 남자다 라는 것을 과시하려고 했던 약간 위험한 놀이들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죽을라고 환장했는지 모르겠지만. 동네마다 비탈졌는데 제대로 비탈진 긴 거리가 많아요. 저 비탈진 끝부분엔 사거리고. 차들이 왔다갔다 하는. 골목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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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은 검단산 남서쪽의 지대가 높고 기복이 심한 지역이다. 예로부터 보통골, 사기막골 등 몇 개의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궁씨는 그것들이 합해져 상대원리가 되고 다시 상대원동이 되는 역사를 다 지나왔다. 예전에 비하면 인구도 많아졌고 살기도 좋아졌다. “옛날엔 상대원 1리 2리 이런 식으로, 상대원 1, 2, 3동까지 지금 현잰 바뀌어 있지 않습니까? 요새는 인구도 거의 8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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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씨 아줌마는 현재의 성남동으로 이사한 후 집에서 하던 또또기계 부업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집 밖에서 하는 부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상대원동이 더욱 그립다. “직장이라고 나가보니까 진짜 아침부터 늦게까지 가서 돈 백만원. 여자들 뭐 기술 없고, 그리고 또 나이를 먹다보니까 써주는 데도 없어요. 진짜 힘든 데 밖에 없고, 알바 식이예요. 일도 안 써줘요. 그래도 내가 말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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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태의 어머니는 전업 주부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목수였다. 목수는 정해진 출퇴근이 없었다. 그 당시 그의 집에는 마당이 있었는데, 마당은 아버지가 목공일을 하시는 장소였다. 아버지는 자개장을 만들었다. 조개껍데기 같은 게 붙은 검은 자개장은 당시만 해도 비싸게 팔리는 인기상품이었다. 아버지가 집에서 직접 만드는 자개장은 만들었고 또 손수 판매도 했다. 꽤 잘 나갔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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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시내버스를 타고 성남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의 모습을 살펴보는 2시간여의 짧은 여행. 성남 사기막골에서 출발하여 상대원과 성남시청, 모란역을 거쳐 분당신도시의 야탑동, 서현동, 수내동, 정자동을 지나 운중동 한국학중앙연구원(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회차하는 성남시내버스를 타고 왕복 2시간 15분정도에 걸쳐 성남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옛날과 오늘의 모습을 두루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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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에 있는 천주교 교회. 1982년 2월 8일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수진동본당에서 분리하여 성남동·하대원동·중동[현 중앙동] 일부와 분당구 전체를 관할하는 본당으로 설립되었다. 1993년 1월 7일 분당요한본당이 성남동본당에서 분리되어 설립됨으로써 지금은 성남동·하대원동 전역과 중앙동 일부를 관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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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여수동에 있는 성남시 관할 행정기관. 성남시청은 지방자치단체인 성남시와 성남시의회에서 결정된 정책을 집행·관리하는 행정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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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은 첫 발을 딛던 40년 전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만큼 변했다. 철거민이 막 들어와 하꼬방 슬라브집에서 살기 시작했던 것이 어제 같다. “제가 학교 다닐 무렵만 해도 시장 고쪽으로 개울 또 완전 산꼭대기고, 막 집이 듬성듬성 있고, 돌산이라고 그럴까 돌 있고, 덜렁 학교가 하나 지어 있었고 그랬었잖아요. 그때만 해도 물 사정도 안 좋고. 그래가지고 막 굉장했었어요, 청소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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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기수(耆叟). 생원(生員) 송윤은(宋胤殷)의 장자. 부안현감(扶安縣監)을 역임한 송관(宋觀)의 손자.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올랐던 대표적 훈구세력 광원군(廣原君) 이극돈(李克墩)의 사위이다. 따라서 당시 성남 지역에 세거하던 두 벌열(閥閱) 가문이 혼맥으로 서로 맺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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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성남 지역 출신의 문신. 조선 중기의 문신인 송언신은 성남 지역의 지명과 관계가 있는데, 일설에 조선 후기의 문신 이집의 서원이 있는 곳을 하대원이라고 한데 대하여, 송언신의 서원이 있었던 지역을 상대원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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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에 거주하였던 열녀. 송율 처 신씨(宋嵂妻愼氏)는 아내로서 절개를 지켰을 뿐 아니라 시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던 열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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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자치센터 위원장을 맡고 있는 궁씨는 요즘 들어 상대원이 다시 되살아나 옛날의 활기를 되찾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원을 지나는 지하철 노선이 생겨야 한다는 것이 궁씨의 주장이다. “오히려 전철이라든가 이런 연계적인 거, 좀 더 상대원 쪽으로 갈 수 있는 방향으로 만들어 주는 게 어떻겠는냐 하는 생각도 들고. 8호선 같은 경우에도 아까 말씀드린대로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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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씨 아줌마는 하대원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쳤다. 지금의 대일초등학교 자리가 성남여중이었다. 그 전에는 강원도 횡성군 청일면에서 살았다. 친정은 워낙 못 살았다. 거기다 아버지는 팔방 난봉꾼으로 전국을 안 다닌 데 없이 떠돌아 다녔다. 당연히 칠남매는 어머니 혼자 책임을 지셨다. 어머니가 아무런 믿는 구석도 없이 성남으로 이주를 결정하신 것도, 시골에 땅 좀 있는 거 난봉꾼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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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씨 아줌마의 하루는 집안에서 시작해서 집안에서 마무리되었다. 그러다 보니 같은 동네에 사는 평범한 아주머니, 할머니, 그리고 앞집에 마주보고 살던 장애인 아주머니 정도가 대인 관계의 대부분이었다. 그들에게 노씨 아줌마는 아들의 이름, 범구 엄마로 통했다. 그들은 부업을 같이 하는 동업자였고, 삶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였다. “할머니들이고 아줌마들이 우리집이가 사랑방 마치 그렇게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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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 송촌에 살던 성씨 정주목사 송수(宋壽)[1470~1518] 때부터 중원구 상대원동 송촌(宋村)에 살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송수는 광주이씨 광원군 이극돈[1435~1503]의 사위로 장인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는데, 이극돈이 생전에 사위를 자기 곁에 묻어달라고 해서 이극돈의 묘 옆에 장사지냈다는 것이다. 부인 이씨는 남편이 일찍 죽자 친정 근처에 살면서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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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시장은 위쪽일수록 장사가 잘 된다는 사실을 염씨는 얼마 가지 않아 알아차렸다. 그러던 차에, 82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근처에 새 건물이 지어지면서 가게 자리가 하나 났다. 염씨는 서둘러 계약을 했다. 처음 가게에서 네 가게 정도 떨어진 곳에 새로 얻은 가게는 염씨의 아내가 맡아보았다. “저는 밑에서 보고 제 집사람은 위에 쪼그만 가게 거기서 보고. 그렇게 장사를 하다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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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길을 찾아 들어왔지만, 상대원에서도 먹고 살길이 막막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하릴없어 하다가, 얼마 전 지나가던 화장품 장사에게 물었던 것처럼, 지나가는 굴비장사를 보고 물었다. 굴비 장사하면 밥 먹고 사나요? 이 대목에서 재미있는 것은, 옛날 이야기 책에나 나올 만한 그 황당한 우연성이다. 그때 화장품 장사가 지나가지 않았고, 굴비 장사가 지나가지 않았다면 봉씨는 무엇을 하게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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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의 노력, 삶에 대한 정성, 거기에 적당한 행운이 따르면서 구보의 삶은 점점 안정을 찾아갔다. 결혼 이후 7년 동안 생기지 않던 아이도 태어났다. 첫 딸이 태어난 것이다. “우리 집사람이 몸이 좀 약했어요. 그래서 하나만 날라 그랬는데, 또 내가 외아들이었고, 어머니도 하나 더 낳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말씀 있었고, 주변 사람들도 하나는 너무 외롭다 둘 낳아야 된다 자꼬 주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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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씨가 상대원으로 왔던 80년대 초는 장사가 참 잘 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상대원공단은 활발하게 돌아갔고, 근로자들이 시장의 주요한 고객이었다. 젊은이들은 간이부엌이 딸린 방 하나 짜리에 주로 살았다. 방안에는 비키니 옷장 하나에 조그마한 호마이카상이 놓여 있었고, 부엌에는 석유 곤로와 밥공기와 국그릇 정도가 갖추어졌다. 또한 돌이나 백일이 되면 뷔페를 찾는 지금과는 달리,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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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씨는 요즘 함주부[함께하는 주부 모임]가 운영하는 ‘책이랑도서관’에 상근한다. 상대원 소외지역 청소년들이 찾는 작은 문화공간을 소중하게 돌보고 가꾸는 일이 그녀는 마음에 든다. 그리고 함주부 일을 하면서 상대원에서 벌어지는 문화 프로젝트에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2008년 들어 성남문화재단이 문화예술을 통해서 상대원시장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기획한 문화 프로젝트 중에는, 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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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성남시 수정구와 중원구에 위치한 시도(市道). 음촌로는 수정로 신흥주공아파트 삼거리에서 동남방향으로 나뉘어져 공단로 대원터널 앞 사거리까지 연결된 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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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씨는 결혼 전에 아내와 약속한 게 하나 있었다. 40대 넘으면 잘 살든 못 살든 사진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약속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통보였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마흔 다섯이 되던 2004년에 궁씨는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정식으로 사진을 배우러 대학 1학년에 입학한 것이다. 그리고 내처 대학원까지 다니고 있다. 내년이면 졸업 논문을 내야 한다. 고맙게도 궁씨의 아내는 이해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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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씨는 성남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성남제일, 대원을 거쳐 중원초등학교에서 졸업장을 받았다. 짧게는 6개월만에도 학교를 옮겼었다. 아버지의 직업이 이사를 많이 다녀서가 아니었다. 집은 늘 상대원에 있었다. “우리 사는 데는 상대원동이 한정돼 있는데, 인구가 늘어나니까 성남초등학교에서 성남제일로, 인제 다시 인구가 늘어나니까 대원초등학교를 지어서 대원초등학교로 왔다가, 또 인구가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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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붙여진 이름. 즉, 땅을 인식하고 그 땅과 다른 땅을 구별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붙인 이름. 사람이 땅에 정착하여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생활의 편리함을 얻기 위해 자연적 환경이나 지형의 특색, 또는 당시의 산업이나 사회제도 등의 인문적 특성을 반영하여 땅에 각각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명에는 사람들의 사상, 의지, 생활모습, 언어, 풍속, 도덕, 종교 등이 표현되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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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을에 같은 본관을 가진 성씨끼리 함께 모여 사는 곳. 집성촌이란 동족마을이라고도 부르며 성씨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원시사회에서 씨족생활이 이루어지듯이 근대 도시사회로 발전하기까지 농업국가에서는 같은 씨족끼리 모여 살게 되어 있다. 우리 민족이 성(姓)을 가진 것은 아득히 먼 옛날이다. 그러나 왕족이나 귀족은 일찍부터 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천민이나 노예는 근대사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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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은 잘 사는 동네였고 은행동은 못사는 동네였다. 상대원공단이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 69년도 70년도에 철거민들이 들어와 천막촌을 형성할 때만 해도 상대원동이 이렇게 활기를 띠게 될 것이라고 생각치 못했다. 처음 철거민이 들어왔을 때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동네였다. 아니 오히려 어린 궁씨에게 그건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처음에 철거민들 들어와 갖고 군용텐트 촥 쳐갖고 거기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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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솔직히 독립 생활 혹은 결혼 생활을 상대원 같은 곳에서 시작하고 싶지는 않다. 상대원은 사람이 많이 산다. 그들 대부분은 어려운,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다. 많은 혜택을 누리면서 좋은 교육을 받으면 좋은데, 상대원에서 그것은 좀 어려운 요구였다. 오히려 편부모 밑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아이들이 다른 지역보다 많았다. 또 술 때문에 불화를 겪는 가정이 많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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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 옆에 돌고래다방이 있었다. 노씨 아줌마는 주로 그곳에 가서 음악을 들었다. MP3 기기가 발에 채이는 요즘에는 다방에 가서 음악 감상을 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하는 젊은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튼 그때는 음악 감상을 위해서 다방에 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걔는 박천마을에 나는 이천마을에 살았거든요. 그러면 우리집을 지나서 가야 하는데, 그 친구가 맨날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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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씨는 상대원에서 18년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생모를 찾았고 아이를 출산했다. 신장이 좋지 않았던 그녀는 요관 수술을 크게 받았다. 그런데 수술이 있은 지 일년 만에 뱃속에 아이가 들어섰다. 결혼한 지 7년 만의 일이었다. 거의 포기한 상태에서 들어선 아이는 너무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건강한 사람도 아이를 가지면 심장이 눌리니까 힘든데, 저는 잘못하면 수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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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씨가 중학생이었을 때 상대원공단은 활기가 넘쳤다. 아침 상대원 거리는 공단에 출퇴근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공단에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어마어마 했어요 그냥 뭐 봇 진짜 그야말로 뭐 봇물이라고 그러나 막 밀고 들어가는 그러고 다녔어요 샤니케잌 뭐 또 콘티빵 뭐 이런 때는 진짜 인구 많았었고. 또 상대원에 방이 웬만하면 방이 조금만 꾸며서 놔도 다 세가 나가고, 어릴 때 우리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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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씨는 지금도 상대원3동에 살고 있다. 1959년 태어나서 지금까지 상대원을 떠나본 적이 없는 터줏대감이다. 상대원 곳곳에 50년의 삶의 자취가 기록되어 있는 셈이다. 궁씨는 사진작가이며, 동시에 사진을 전공하는 대학원 학생이다. 상대원시장 입구의 한 5층 건물에 궁씨의 사진 작업실이 있다. 좀 낡은 계단을 올라 들어가게 되는 작업실에는 촬영도구들과 함께 그가 찍은 사진들이 놓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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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성남시 중원구에 있는 행정동이자 법정동. 행정동이자 법정동인 하대원동은 둔총대로를 중심으로 상가와 주택이 밀집해 있고, 주택 뒤로는 대원공원과 임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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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에 있는 회화나무. 대하초등학교 인근 자이 아파트 옆의 호야 경로당 마당에 있는 수령 250년의 노거수(老巨樹)로 높이 17m, 가슴높이 둘레 94cm, 수관(樹冠) 폭 13m로, 콩과의 활엽수 교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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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씨는 여름휴가를 가본 적이 없다. 어려울 때는 어려워서, 장사가 잘 될 때는 바빠서 못 다녔다. 장사하고, 돈 버는 일 외는 별다른 취미도 여가생활도 없었다. 친목회 일 이외에는, 시장 밖 나들이를 하는 경우도 흔치 않았다. 85년도에 상가 사람들이 모여 한우리라는 친목회를 만들었다. 꽃집 사장님도, 고춧집 사장님도, 옆에 앞에, 앞에 옆에 다 해서 열 몇 사람이었다. 고향을 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