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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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구암리를 ‘부처미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구암리를 부처미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를 담고 있는 지명 유래 전설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파병된 명(明)의 장수 이여송이 조선에서 인재가 나지 못하도록 정기를 끊으려 했다는 설화와 결부되어 전하고 있다. 부처미이는 돌부처가 길가에 있던 곳으로 1881년 『대동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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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대곡사의 화전놀이와 관련하여 전해오는 이야기. 「대곡사의 화전놀이」는 비봉산 대곡사 인근에서 벌어졌던 화전놀이의 실상과 함께, 화전놀이가 일제 강점기 때 의성군민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는지도 전해주는 전설이다. 1979년 의성군 교육청에서 발행한 『문소의 얼』에 「대곡사의 화전놀이[민속놀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으며, 자료 제공자는 ‘신산 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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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동부리에서 뱀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뱀 이야기」는 남편과 떨어져 살던 여인이 결국 남편을 찾지 못하고 죽어 구렁이가 되어 남편을 찾았다는 이야기이다.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동부 1리에 사는 배을보[여, 당시 88세]가 제보한 것으로, 2003년 의성 문화원에서 발행한 『비안현의 문화와 오늘의 삶』 158쪽에 수록되어 있다. 남편은 일본 동경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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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에서 현령을 지낸 여헌 장현광의 선정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 의성 현령을 지낸 여헌 장현광의 학덕과 선정을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인물 전설이다. 1998년 의성 군지 편찬 위원회에서 발행한 『의성 군지』에 「여헌 선생의 예언」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 학자이자 관리였던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은 학문과 도덕이 매우 뛰어나 영남학파의 후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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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용연리에 있는 고아 정공 전기 자재 제조 공장. 고아 정공은 1995년 7월에 코어 제조 판매를 목적으로 전 대표 이사 김달호에 의해 대구광역시 달서구 두류동 87-12 성안 오피스텔에서 설립되었으며, 포스코와 일본 다무라 전기의 거래 업체로 선정되어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1999년 3월 모터 코아를 전문적으로 생산하기 위하여 고아 정공 의성 공장을 준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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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 지역에서 광물을 채굴·제련하는 산업과 원료를 가공하여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산업을 통칭하는 용어. 일상생활에 필요한 자재와 원료를 얻기 위해 지하자원을 캐내는 광업과 이를 원료로 하여 가공하는 공업을 통틀어 광공업이라 한다. 인류의 생활은 석기 시대를 출발하여 청동기 시대 및 철기 시대로 이어져 왔으며 기술 혁명과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첨단 과학 문명을 꽃피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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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 지역에 있는 개신교인들의 의례 및 집회 장소.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비봉리에 살던 김수영은 1893년 봄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 장터에서 선교사 배어드의 노방 전도를 듣고 감화를 받아 의성 지역 최초의 개신교 신도가 되었다. 1900년 고향으로 돌아온 김수영의 전도로 하나 둘 교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개신교 전래 초기에는 교인의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교인들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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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의성 출신의 의병. 구성집(具聖執)[1876~1909]은 경상북도 의성군 가음면 덕천리 출신으로, 1906년 9월 12일경 김동산(金東山) 의진의 일원으로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경상북도 봉화군·강원도 삼척군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으는 일을 맡았고, 9월 25일경에는 삼척군 개산동의 윤천총(尹千總)과 이학서(李學瑞)로부터 군자금을 모았다. 1907년 7월경에는 성익현(成益賢)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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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상두(權相斗)[1870~1936]는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 출신으로, 안동 권씨 부정공파 와룡 감애[안동]가의 제일 큰집 출신이다. 3·1 운동 때 유림측에서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 청원을 할 때,134명 유림 대표와 함께 서명하였다. 권상두가 살고 있던 단밀면은 원래 상주에 속해 있다가 1895년 비안군으로 편입되었다. 단밀면은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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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중수(權重秀)[1869~1980]는 경상북도 의성군 산운면 학미리 출신으로, 권중권(權重權), 권성우(權聖佑)이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1915년에 결성된 대한 광복회(大韓光復會) 회원으로 활약하였다. 한일합병 이후 1910년대 무단통치 하에서는 독립운동은 지하화될 수밖에 없었다. 대한 광복회는 풍기 광복단(豊基光復團)[대한 광복단이라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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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에서 해방 이전까지 경상북도 의성 지역에서 운영된 근대식 교육. 한국의 근대 교육은 일반적으로 개항이 시작된 1876년대부터 1945년 해방까지 각종 근대식 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육을 말한다. 강화도 조약 이후 정부는 수신사(修信使)·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영선사(領選使) 파견, 서양인 교사 초빙, 1883년 동문학(同文學) 설치,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한 학부아문(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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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군석(金郡石)[1890~1967]은 경상북도 의성군 조문면 구련리 출신으로, 조문면에서의 3·1 운동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조문면의 시위는 대리동 교회 영수인 박낙현(朴洛鉉)과 같은 교회 집사 윤용구와 교인 윤영주·오상룡 등이 3월 18일 의성 장날 장터에서 시위할 것을 결의하여 시작되었다. 4명은 동지 규합에 나서 같은 교회의 김자룡·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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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규복(金圭福)[1905~1977]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중리 출신으로, 김규만(金圭晩)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다. 김규복은 1925년~1926년 경 대대적으로 정비된 의성 청년회의 집행 위원으로 활동했다. 조선 공산당 운동의 일환으로 1932년 10월 10일에 조직된 의성 적색 독서회에도 참여하여 농민부의 책임을 맡았다. 또한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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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길도(金吉道)[1878~1924]는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안평면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안평면 시위는 3월 15일부터 19일까지는 안평면 대사동 교회를 중심으로 전면적으로 확산되었다. 3월 15일, 16일 시위대는 밤 8시경 마을 앞에 있는 밭에서 독립 만세를 외친 후 곧 시위에 들어갔다. 그리고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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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도식(金道式)[1889~1923]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박곡리 출신으로, 의성군에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안평면 대사동에서 3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고 그 다음날인 3월 19일에는 400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도리원 장터로 시위 행진한 다음 도리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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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만식(金萬植)[1921~?]은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 출신으로,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여 미국 정보 기관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훈련을 받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군은 1945년 5월 OSS와 제휴하여, 한반도 진입을 위한 ‘독수리 작전’에 착수했다. OSS와의 합작 훈련은 2지대와 3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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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명출(金明出)[1893~1987]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안계리 출신으로, 비안면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비안면 독립 만세 시위는 쌍계 교회 중심으로 일어났다. 쌍계 교회 박영화 목사 등 추진 세력은 밀의를 거듭하면서 3월 13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김명출을 비롯한 배도근·이일만·박세길 등을 동지로 규합하고 태극기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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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봉수(金奉洙)[1900~1973]는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하령리 출신으로, 안평면에서 3월 15일부터 19일 사이에 벌어진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김봉수는 17일 안평면 하령동에서 동리 청년들과 함께 군중을 규합하여 시위를 주도하였다. 100여 명과 함께 독립 만세를 연창하면서 안평면 삼춘동까지 행진하였다. 19일에도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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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부문(金富文)[1887~1952]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출신으로, 점곡면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18일부터 20일까지 계속된 점곡면 만세 시위는 처음 송내동 교회 권수백 조사 등 교인들이 시위의 초석을 마련하였고, 사촌동의 안동 김씨 청년들이 시위를 확산시켜 나갔다. 여기에 윤암동의 영양 남씨, 송내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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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 운동가. 김성수(金成守)[1890~1965]는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서부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6일 비안면 동부동·서부동 주민들에 의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의성군에서 벌어진 3·1 운동 독립만세 시위는 3월 12일 비안면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과 쌍계동의 만세 시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동부동에 사는 김석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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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오명(金五命)[1889~1933]은 김명식(金明植)이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하령리 출신으로, 의성군 안평면에서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는 3월 15일 대사동 교회 교인을 중심으로 일어났다가 주민들의 참여가 확산되는 가운데 3월 19일까지 안평면 일대에서 계속되었다. 3월 19일에는 도리원 장날 장터에서 약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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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옥돈(金玉頓)[1889~1975]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의성군에서 3월 15일에서 19일까지 가장 대규모로 전개된 안평면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서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1919년 3월 11~12일 경 그는 이화실의 집에서 만세 시위를 모의하였다. 3월 15일 일요일 낮 예배를 마친 후 대사동 교회 영수 이종출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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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위창(金渭昌)[1900~1941]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 출신으로, 점곡면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는 처음 송내동 교회 교인들이 시위의 초석을 마련하였고, 사촌동의 안동 김씨 청년들이 시위를 확산시켜 나갔다. 교회의 권수백 조사는 사촌동의 김태호 등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같은 동네 김위창을 비롯 김점득·김유경·김수석·김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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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유식(金有式)[1899~1959]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박곡리 출신으로, 안평면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대사동 교회 교인 중심으로 전개된 이 시위는 3월 15일부터 3월 19일까지 진행되었다. 3월 19일 김유식을 비롯 권사연·김일석·이봉수·김치명 등이 앞장서서 시위 군중과 함께 장터에 있는 도리원 주재소로 몰려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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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익휘(金益輝)[1885~1959]는 김익하(金益夏)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의성군에서 최대 규모로 전개되었던 안평면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는 대사동 교회 집사인 이화실로부터 “만세 운동을 하면 조선이 독립될 수 있다.”는 설명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동민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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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일석(金日錫)[1891~1969]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마전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9일 의성군 안평면 대사동 교회 교인을 중심으로 전개된 도리원 장날의 시위를 선두에서 이끌었다. 3월 19일 김일석을 비롯 권사연·김유식·이봉수·김치명 등은 도리원 장날을 이용하여 수감 중인 동지들을 구출하고자 시위 군중들에 앞장 서 시위를 전개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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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자룡(金子龍)[1893~1954]은 경상북도 의성군 조문면 구련리 출신으로, 의성면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는 1919년 3월 18일 조문면 대리동 교회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주도하였다. 대리동 교회 영수인 박낙현(朴洛鉉)은 1919년 3월에 대구 성경 학당에 갔다가 전국적인 만세 시위 소식을 듣고, 급히 귀향하여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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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재범(金在範)[1900~1931]은 김재범(金載範)이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화전리 출신으로, 1919년 대구 계성 학교(啓聖學校) 3학년에 재학 중 대구에서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계성 학교의 교사이던 백남채(白南採)·최상원·권의윤·최경학(崔敬學) 등은 학생 대표들인 김재범(金在範)을 비롯,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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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천특(金千特)[1888~1945]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 출신으로, 의성면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의성면의 시위는 조문면 대리동 교회 교인들 중심으로 영수인 박낙현(朴洛鉉)이 1919년 3월에 대구 성경 학당에 갔다가 거기서 전국적인 만세 시위 소식을 듣고, 장터에서 만세 부를 것을 결의하였다.이들은 동지 규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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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충한(金忠漢)[1883~1965]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비봉리 출신으로, 김천 황금동 교회 조사였다. 3월 9일 김천에 있는 황금동 교회에서 평소 동향인으로 알고 지내던 김원휘, 대구에서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의 체포를 피해 김천으로 온 계성 학교 학생 김수길, 황금동 교회의 원로인 최용수, 교회 조수 한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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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치근(金致根)[1878~1933]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박곡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7일과 19일 안평면과 봉양면 도리원 장날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3월 17일에는 시위 군중이 대사동 우리곡(尤利谷) 마을에 모여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후 창길동(倉吉洞)을 거쳐 화령동(花寧洞)까지 행진하며 만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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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호문(金好文)[1887~1942]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출신으로, 송내동 교회 교인이자 김해 김씨 일족으로 점곡면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부친 김수배와 함께 참여하였다. 점곡면의 만세 시위는 1919년 3월 18일부터 20일까지 계속되었는데 처음 송내동 교회 권수백 조사 등 교인들이 시위의 초석을 마련하였고, 사촌동의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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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희문(金喜文)[1889~1970]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출신으로, 점곡면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점곡면의 만세 시위는 1919년 3월 18일부터 20일까지 계속되었다. 처음 송내동 교회 권수백 조사 등 교인들이 시위의 초석을 마련하였고, 사촌동의 안동 김씨 청년들이 시위를 확산시켰으며, 윤암동의 영양 남씨, 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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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남규우(南圭佑)[1889~1967]는 남오대(南梧大)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윤암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8일부터 20일까지 전개된 점곡면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점곡면의 만세 시위는 3월 18일부터 20일까지 계속되었는데, 처음 송내동 교회 권수백 조사 등 교인들이 시위의 초석을 마련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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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영양. 이계(伊溪) 남몽뢰(南夢賚)의 후예이다. 남승순(南勝淳)[1857~1925]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윤암리에서 출신으로, 1919년 3월 19일 점곡면 사촌동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점곡면 사촌동(沙村洞) 만세 시위의 소식을 듣고 장남 남규우(南圭佑)·황금종(黃金鍾) 등과 함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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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군에서 국제 결혼으로 가족을 이룬 가정. 다문화 사회는 시민 혹은 국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사회·경제·정치·문화적 권리를 취득하고 향유하는 데 인종과 민족이 차별의 근거가 되지 않는 사회를 뜻하며, 다문화 가정은 서로 다른 국적, 인종, 문화를 가진 남녀가 이룬 가정이나 그런 사람들이 포함된 가정을 의미한다. 결혼 이민자가 늘어나면서 다문화 가정의 규모는 2008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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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3년(숙종 20) 울릉도에서 안용복(安龍福), 박어둔(朴於屯) 두 사람이 일본 오야 가문의 어부들에 의해 일본에 납치되었다. 일본은 이 사건을 계기로 울릉도를 ‘본국의 죽도(竹島)’라고 하면서 조선인의 어로 활동을 금지해 달라는 요구를 해 왔다. 이것이 ‘울릉도 쟁계(鬱陵島爭界)’[일본에서는 ‘죽도 일건(竹島一件’]라고 한다. 조선 정부에서 ‘울릉도 쟁계’ 해결을 위해 울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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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부터 1945년 광복 전까지 경상북도 의성 출신 또는 의성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의성 지역 한말 의병 활동은 을미사변을 계기로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에서 가장 먼저 전개되었다. 의병 부대는 의병장 김상종(金象鍾), 초모장 김수욱(金壽旭), 중군 권대직(權大稷), 선봉장 김수빙(金壽聘), 관향장 김수협(金壽莢)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모두 전통적인 유교 사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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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의성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규언(圭彦), 호는 죽오(竹塢). 아버지는 박필운(朴必運), 어머니는 장욱근(張郁瑾)의 딸 옥산 장씨(玉山 張氏)와 박숭근(朴崇根)의 딸 월성 박씨(月城 朴氏), 할아버지는 박문룡(朴文龍), 증조할아버지는 박이길(朴彛吉), 부인은 진사(進士) 이건영(李健榮)의 딸 숙부인(淑夫人) 경주 이씨(慶州 李氏), 후처는 노영호(盧永昊)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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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낙현(朴洛鉉)[1887~1957]은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에서 출신으로, 1919년 3월 의성읍 장날 3·1 운동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박낙현은 조문면 대리동 교회의 목사로 대구 성경 학당에서 열린 사경회(査經會)에 갔다가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독립 만세 운동의 소식과 대구에서 일어나고 있던 만세 시위를 직접 목격하고 귀향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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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노수(朴魯洙)[1907~?]는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출신으로, 1920년대 서울에서 공학회(共學會)·서울 학생 구락부·경성 청년회, 그리고 일본에서 신간회 동경 지회 등에 가입하여 항일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8월 30일 의성군의 옥산면·점곡면·단촌면 청년 박명옥(朴明玉)·유시언(柳時彦)·김성윤(金成允) 등과 함께 의성 지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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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두완(朴斗完)[1888~1966]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괴산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부터 19일에 걸쳐 안평면 대사동 교회의 영수인 이종출(李鍾出)을 비롯하여 교인들이 전개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박두완은 이종출(李鍾出)·김옥돈(金玉頓)·이양준(李良俊)·이북술(李北述) 등이 주도하는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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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만녕(朴萬寧)[1898~1967]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괴산리 출신으로, 비안면에 있는 비안 공립 보통학교(比安公立普通學校) 학생으로 상급 학생으로 급장(級長)이던 우희원(禹熙元)·박기근(朴基根)[혹 朴望牙]·정인성(鄭寅成) 등과 함께 3월 9일부터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서울·평양·대구 등지의 독립 만세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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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밀양. 1919년 3월 12일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 교회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한 목사 박영화(朴永和)의 장남이다. 박상동(朴尙東)[1894~1948]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8일 대구 계성 학교(啓聖學校) 재학 중 대구 서문 시장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3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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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의성 출신의 문신. 본관은 병산(屛山)[비안(比安)]. 호는 율정(栗亭), 시호는 문충(文忠). 고려 문화시중을 역임하고 벽상공신으로 병산군(屛山君)에 봉해졌던 박우(朴瑀)는 병산 박씨의 1세가 되는 중시조이다. 고조할아버지는 판도사 판서(版圖司 判書)를 지낸 박계오(朴繼五)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직장(直長) 박종주(朴宗柱)이고, 할아버지는 예부 낭중(禮部 郎中) 박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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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의성 출신의 문신. 본관은 병산(屛山)[비안(比安)]. 호는 율정(栗亭), 시호는 문충(文忠). 고려 문화시중을 역임하고 벽상공신으로 병산군(屛山君)에 봉해졌던 박우(朴瑀)는 병산 박씨의 1세가 되는 중시조이다. 고조할아버지는 판도사 판서(版圖司 判書)를 지낸 박계오(朴繼五)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직장(直長) 박종주(朴宗柱)이고, 할아버지는 예부 낭중(禮部 郎中) 박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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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석홍(朴錫洪)[1896~1985]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에서 출신으로, 중국 흑룡강성(黑龍江省) 아성현(阿城縣)에서 강화인(姜化仁)·박삼근(朴三根) 등과 함께 북만 조선인 청년 총동맹(北滿朝鮮人靑年總同盟)을 조직한 뒤 선전 부장이 되어 잡지 『농군(農軍)』을 발간하면서 목단강(牧丹江) 일대의 재만 동포들에게 독립 사상을 고취하였다.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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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수영(朴秀永)[1893~1969]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괴산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부터 19일에 걸쳐 안평면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1919년 3월 15일 대사 교회의 영수 이종출을 비롯하여 교인들이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 후 3월 16일 이북술 등 1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기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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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시목(朴時穆)[1894~1945)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출신으로, 1919년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고, 이듬해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한 뒤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임시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감찰원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경상북도 지역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로 돌아왔다. 일본으로 건너가 1927년 2월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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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현령을 역임한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상주(尙州)[상산(尙山)]. 초명은 안신(安信). 자는 백충(伯忠). 시호는 정숙(貞肅). 아버지는 박문로(朴文老), 할아버지는 박전(朴瑔), 증조할아버지는 박원정(朴元挺)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손자 박사춘(朴士春)이 1462년 현 의성군 봉양면 장대리에 은거하면서, 이곳의 상주 박씨 입향조가 되었다고 한다. 박안신(朴安臣)[1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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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의성 출신의 의병. 본관은 밀양. 박연백(朴淵伯)[1869~1909]은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효선리 출신으로, 박연백(朴淵白)이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1905년부터 1909년까지의 의병 항쟁사 중·후기에 속하는 시기에 의성 의진을 이끈 인물이다. 박연백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여 의성군 춘산면과 사곡면의 경계에 자리 잡은 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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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의성 출신의 정치인. 박영출[1909~1975]은 1930년대 후반 일본 도쿄에서 조선인 연수생을 수용하기 위한 숭덕 학사와 숭덕 교회를 설립했으며 1940년대 초반 숭덕 교회 목사로 취임했다. 1945년 8·15 해방을 맞아 귀국한 후 서울에 숭덕 학사를 재건하는 한편 민주 국민당에 입당해 정당 활동을 시작했다.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 의원 선거에 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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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장호(朴章鎬)[1886~1961]는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효선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8일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 등이 대구 서문 시장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3·1 운동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3월 8일 오후 3시 경, 서문 시장에는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고, 계성학교·대구 고등 보통학교·신명 여학교·대구 성경 학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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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재화(朴在華)[1890~1928]는 경상북도 의성군 조문면 대리리 출신으로, 1922년경 중국 길림성(吉林省) 소재 독립군 단체 흥업단(興業團) 단원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흥업단은 1920년 봉천성(奉天省) 무송현(撫松縣)에서 윤세복(尹世復)·김혁(金爀)·김호(金虎) 등의 주도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였다. 흥업단의 표면적인 목적은 산업 진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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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함양 박씨의 의성 입향조이자 무신.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박지량(朴之亮)[?~1292]은 1271년(원종 12) 수로방호사(水路防護使)가 되고, 1274년(충렬왕 즉위)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참전하였다. 쓰시마[對馬島], 이키시마(壹岐島)를 거쳐 키타큐슈(北九州)를 쳤으나 태풍을 만나 고려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1280년(충렬왕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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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천수(朴千壽)[1897~1947]는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출신으로, 사촌동(沙村洞) 만세 시위의 소식을 듣고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 계획에 참가하였다. 3월 18일 밤 9시 사촌동 동민 600~700명이 횃불을 밝히며 만세 시위를 벌였고, 다음 날에도 만세 시위가 벌어지자 박천수는 김성갑(金聲甲)·김용준(金龍俊)·신주칠(申周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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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배세태(裵世泰)[1890~1943]는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 동리 주민들과 함께 대사동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배세태는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어 다음 날에도 오후 8시 주민 100여 명과 함께 기도동(箕道洞)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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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군에 있는 삼성 산업의 생산 공장. 삼성 산업은 1995년에 실립되어 한전주, 철도 공사의 침목과 더불어 공사용 파일 호안 블럭, 암거, 수로관 등의 콘크리트 제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고 있는 기업이다. 본사는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 있으며, 의성 공장은 1995년부터 현재까지 PC 전자, PC 침목, PHC 파일, 철탑, 강관 철주, 한전 멘홀, 유황폴리머 하수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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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도원리에 있는 삼성 콘크리트의 생산 공장. 삼성 콘크리트는 1995년에 설립되었으며, PC 침목, 레미콘, PC 제품 등을 주력으로 생산하고 있는 벤처 기업이다. 삼성 산업의 계열사이며, 본사는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 있으며, 경상북도 의성군, 경상남도 창녕군·밀양시에 생산 공장을 두고 있다. 삼성 콘크리트 봉양 공장은 1995년 7월에 설립된 이후 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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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 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3월 12일~4월 초순까지 의성 지역에서 일어난 항일 독립 만세 운동. 3·1 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충량한 신민의 양성’을 목표로 한 지배 정책과 식민지 수탈을 기조로 하는 경제 정책으로 인해 많은 고통에 시달린 가운데 민족의 독립과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었다. 세계사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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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군에서 매년 마늘 수확기에 개최되는 국제 축제. 세계 의성 마늘 축제는 의성 마늘의 우수성을 홍보하고, 의성 마늘을 이용한 다양한 가공 식품과 음식을 전시 및 판매하여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유도하기 위해 의성군청에서 주최하고 세계 의성 마늘 축제 추진 위원회에서 주관하는 행사이다. 2012년에는 ‘의성 마늘 세계에 GO하다’라는 주제로 7월 26일부터 7월 28일까지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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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두수(申杜洙)[1927~1986]는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 출신으로, 경주 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4년 4월 안동 농림 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비밀 결사 명성회(明星會)에 가입하였다. 명성회는 일제의 식민 정책을 비판하고 이정선(李貞善)·권태염(權泰琰)·정현모(鄭賢模)와 함께 정세를 틈타 무장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하려고 하는 비밀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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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병섭(申炳燮)[1892~1933]은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금오리에서 출신으로, 1919년 4월 1일 춘산면 금오동에서 15명의 마을 주민들이 방오발(方五發)의 집에 모여 마을 일을 의논하던 중 ‘각지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하는 것은 후일 독립될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27일 이웃 고을 청송군 화목 시장(和睦市場)에서도 운동을 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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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산축(申山祝)[1907~1939]은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개일리 출신으로, 1932년 5월 17일 일본 아이치현[愛知縣]에서 문화 보급회(文化普及會)를 조직하여 한국인 노동자의 권익 보호 활동 및 민족 의식 고양을 위한 계몽 활동 등 항일 운동을 하다가 1938년 12월 5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9년 2월 12일 나고야[名古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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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주칠(申周七)[1890~1938]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9일 점곡면에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점곡면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은 3월 18일 오후 9시 사촌동 오후 11시경 서변동 만세 시위로 이어졌고, 3월 19일에는 다시 사촌동의 만세 시위로 이어졌다. 신주칠은 이때 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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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오기수(吳麒洙)[1892~1959]는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후죽리 출신으로, 1912년 경성 관립 공업 전습소(京城官立工業傳習所)를 졸업하고 임시 토지 조사국(臨時土地調査局) 기수(旗手)로 근무하다가 의성 경찰서 순사보(巡査補)로 근무하였다. 1919년 5월 만주로 가서 조선 독립단(朝鮮獨立團)에 가입하고 귀향하여 1919년 음력 9월 경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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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오서희(吳庶熙)[1922~1996]는 오동수(吳桐秀)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출신으로, 중국 봉천 소학교(奉天小學校)를 졸업하고 재봉 회사에 근무하다가 한국 광복군 훈련반(韓國光復軍訓練班)[일명 韓光班]을 졸업하고 광복군(光復軍) 제2지대 2구대에서 한·미 간의 군사 합작(軍事合作) OSS 훈련을 받았다. 오서희는 국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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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의성 출신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원지(元趾). 증조할아버지는 오계조(吳啓兆)이고, 할아버지는 오시익(吳始益)이다. 생부는 오점근(吳點根)이고, 생모는 권희준(權希俊)의 딸 안동 권씨(安東 權氏), 양부는 오덕근(吳德根)이고, 양모는 김인술(金仁述)의 딸 안동 김씨(安東 金氏)이다. 부인은 이한성(李漢星)의 딸 숙부인(淑夫人) 경주 이씨(慶州 李氏)이고, 후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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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오진문(吳進文)[1896~1955]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상리리 출신으로, 1919년 8월부터 대구에서 오기수(吳麒洙) 등과 함께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자금 모집 및 친일파 폭살 계획을 수립하고 활동하였다. 그는 1920년 1월 의성 출신 오기수와 김영우 등과 함께 조선규로부터 독립운동 자금 740원을 제공받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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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왜구가 경상북도 의성 일대에 침입한 사건.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해져 해안 지방을 넘어 내륙으로까지 그 피해가 미쳤다. 의성 지역도 이 시기에 왜구의 침입을 두 차례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왜구는 13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고려뿐만 아니라 중국에까지 침입하여 약탈과 살인 등을 일삼았던 해적들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일본 남북조의 혼란기에 발생한 집단으로 여겨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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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재현(在見). 호는 육봉(六峰). 우용택(禹龍澤)[1868~1940]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출신으로, 한말 일제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고 친일 매국노를 직접 찾아가 그들의 매국 행위를 질타한 강개지사(慷慨之士)로 당시 널리 알려졌던 인물이다. 고종은 그의 의로운 행실을 듣고 참봉(參奉)을 제수하기도 하였다. 우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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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유승필(兪承弼)[1891~1974]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마전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6일 이북술[일명 李華實]과 함께 기도동을 거쳐 창길동까지 전개된 만세 시위 행진에 참여하였으며, 19일에는 도리원 장날을 기해 전개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유승필은 도리원 시위에서 1,0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몽둥이와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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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1953년까지 북한의 남침으로 경상북도 의성 지역을 포함한 대한민국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선제 공격에 의해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동안 전개된 전쟁이다. 수백만의 인명이 희생되고 셀 수 없을 정도의 물적 기반이 파괴된 민족 간 전쟁으로, 유엔 연합군과 중국군이 참전했다는 점에서 국제전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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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윤영주(尹營柱)[1893~1988]는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출신으로, 대구 기독교 성경 학교(基督敎聖經學校)에 재학 중 1919년 3월 8일 대구 시위에 참가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의성에서도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윤영주는 3월 12일 대리동 교회의 신도인 윤용구와 오상룡(吳相龍) 등과 함께 의성읍의 장날인 3월 18일 만세 시위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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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윤용구(尹龍九)[1891~1971)는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면 대리리 출신으로, 의성읍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2일과 13일 대리동 교회 목사 박낙현과, 교인 윤영주(尹營柱)·오상룡(吳相龍)과 함께 의성 장날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거행하기로 하고 박낙현·윤영주·오상룡 등과 함께 태극기와 붉은 글씨로 ‘대한국 독립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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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 지역에서 입었던 의복 및 이와 관련한 생활 풍속. 의성 지역에서는 산업화 이전에는 삼베, 무명, 목화, 명주 길쌈을 통해 가정에서 손수 옷을 지어 입었다. 특히 의성 지역은 대한민국 최초의 목화 재배지로 현재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에 ‘문익점 면작 기념비(文益漸綿作記念碑)’가 세워져 있다. 의성 지역 여성들은 어릴 적부터 길쌈과 바느질을 배웠고, 이를 통해 가족의 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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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군에서 생산되는 단맛과 매운 맛을 고루 갖춘 고추. 고추는 임진왜란을 전후 하여 중국이나 일본을 통하여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추에 대한 기록은 1614년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일본을 거쳐 온 것으로 왜겨자라는 표현이 발견된다. 그러나 일본 측 기록인 『대화본초(大和本草)』·『물류칭호物類稱呼』·『성형도설成形圖說』 등에는 우리나라 혹은 남만에서 온 것이라 기록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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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에 있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 소속 교회. 1900년대 초 의성군 의성읍 호미리에 살던 김원휘가 처가가 있는 의성군 의성읍 비봉리를 내왕하던 중 복음을 접한 뒤로 호미리 주민 김경찬, 김기화, 김천득 등에게 전도하여 함께 비봉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1908년 호미리 언덕에 초가 3칸의 기도실을 마련하여 집회하면서 의성 교회가 시작되었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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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요는 민중이 널리 부를 뿐만 아니라, 그 음악적·문학적 성격도 민중적이다. 민요는 생활상의 필요성에서 창자가 스스로 즐기는 노래이다. 악곡이나 박자, 사설이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아서 특별한 기교나 재주가 없어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생활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단순히 민중의 생활을 노래하는 차원을 넘어서 노동과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생산적인 노래라는 특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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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군청과 의성 어린이날 큰잔치 추진 위원회에서 매년 개최하는 어린이날 행사. 어린이날은 1923년에 일본 유학생 모임인 색동회를 중심으로 방정환 등 8명이 기념일을 공포하고 행사를 개최함으로써 역사가 시작되었다. 의성군에서도 이날을 기념하여 매년 5월 5일 의성 어린이날 큰잔치를 개최한다. 매년 5월 5일 의성군청이 주최하고 관내 기관 및 단체로 구성된 의성 어린이날 큰잔치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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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군에서 재배되고 있는 장미과 낙엽 교목 식물인 사과나무의 열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재래종인 능금을 재배했는데, 홍만선의 『산림경제』에 재배법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초에 많이 재배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후기에는 선교사들이 외국 품종을 들여와 관상수로 심었고, 1901년 윤병수가 원산 부근에 과수원을 만들어 국광·홍옥 등을 재배하였다. 1906년 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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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군에서 재배되고 있는 장미과 낙엽 교목 식물인 사과나무의 열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재래종인 능금을 재배했는데, 홍만선의 『산림경제』에 재배법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초에 많이 재배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후기에는 선교사들이 외국 품종을 들여와 관상수로 심었고, 1901년 윤병수가 원산 부근에 과수원을 만들어 국광·홍옥 등을 재배하였다. 1906년 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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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전반기 경상북도 의성 지역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통해 독립을 모색한 비밀 결사. 의성 적색 독서회는 1931년 세계 대공황과 일본 경제 악화에 따른 식민지 지배 통치가 더욱 강화되는 정세 속에서 의성 지역을 단위로 한 사회주의적 비밀 결사이다. 의성군청의 공무원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항일 독립 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의성 적색 독서회는 1931년 무렵 의성으로 들어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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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후죽리에 있는 통일교 소속 교회. 통일교는 문선명이 창시한 신종교의 하나로서 창조주와 예수, 성경을 믿고 따르며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참사랑을 잃었으므로 참가정을 통해 이를 회복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1954년 세계 기독교 통일 신령 협회로 시작되었는데, 한국 선교에 주력하여 기반을 마련한 뒤 1960년대부터 일본과 미국 등 세계 각국으로 선교 범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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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철파리에 있는 흑마늘 전문 가공업체. 의성 흑마늘 영농 조합은 2007년에 설립되어 의성 한지형 마늘을 자연 발효, 숙성시켜 흑마늘을 전문적으로 가공하여 공급하고 있는 영농 조합이다. 본사는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에 있으며,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동 농수산물 유통 공사 내에 해외 사업부를 두고 중국, 미국 등 20개 나라에 수출하고 있다. 의성 흑마늘 영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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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세기 의성 아주 신씨(鵝洲 申氏) 가문 출신의 신지제(申之悌)·신홍망(申弘望) 부자 및 그 후손과 관련된 전적(典籍)과 고문서(古文書).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에 위치한 오봉 종택(梧鳳宗宅)에 소장되어 있는 전적과 고문서 자료이다. 오봉 종택은 의성 출신의 문신이자 학자인 신지제[1562~1624]의 후손들이 거주하는 아주 신씨 종택이다. 신지제·신홍망 부자 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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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맹준(李孟俊)[1897~1948]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대사동 독립 만세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5일 이맹준은 대사동의 주민들과 함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그날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어서 16일 오후 8시에도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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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배기(李培基)[1892~1974]는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괴산리 출신으로, 안평면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5일 대사동 교회 영수 이종출(李鍾出)과 교인들이 주도하는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16일 이북술 등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기도동(箕道洞)을 거쳐 창길동(倉吉洞)까지 시위 행진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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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봉수(李鳳壽)[1878~1919]는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안평면 대사동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7일 이봉수는 이북술(李北述)의 권유를 받고 15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대사동 우리곡(尤利谷)에 모여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위 군중은 안평면 마전동·기도동·괴산동을 돌면서 400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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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수원(李守元)[1874~1964]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 대사동 주민들과 함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동참하기로 하고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어서 16일 오후 8시에도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기도동을 거쳐 창길동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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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순근(李順根)[1893~1958]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이양준과 함께 1919년 3월 18일 안평면 대사동에서 3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안평 주재소를 향하여 시위 행진을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10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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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원춘(李元春)[1871~1936]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 대사동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3월 15일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동리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10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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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원현(李元鉉)[1926~1945]은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에서 태어났다. 대구 상업 학교 재학 중 1943년 4월에 동교생 이상호(李相虎)·김상길(金相吉)·서상교(徐尙敎) 등이 앞서 조직했던 항일 학생 결사 태극단(太極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5월에 결성된 태극단은 조국 독립을 위한 비밀 결사로서 전국적 조직을 통한 무력 항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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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이경(李利景)[1890~1968]은 이동호(李東湖)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부터 19일에 걸쳐 안평면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3월 16일 오후 8시 이북술·김옥돈·이만준(李萬俊) 등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기도동을 거쳐 창길동까지 시위를 벌였으며, 3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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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일만(李一萬)[1903~1954]은 이종연(李鍾淵)이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2일 쌍계 교회 목사 박영화(朴永和) 등이 주도한 쌍계동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12일 오전 비안 공립 보통 학교(比安公立普通學校) 학생들이 학교 뒷산에서 만세를 부르고 정오 무렵 마을로 돌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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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재인(李在寅)[1907~1964]은 의성군 의성읍 출신으로, 1935년 1월경 의성읍 교회 청년을 중심으로 결성된 청년 면려회(靑年勉勵會)를 항일 운동 단체로 조직 개편하였다. 이재인은 의성읍 교회의 목사인 유재기(劉載奇)가 “조선 민족은 현재의 비경(悲境)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일본의 손에서 되돌려 찾아내는 일 외에는 없으며 이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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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의성 현령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균(仲勻), 호는 용재(慵齋)·용헌(慵軒)·부휴자(浮休子)·상우당(尙友堂)·태정일씨(太庭逸氏)·장육거사(藏六居士). 이만실(李蔓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大司憲) 이승직(李繩直)이고, 아버지는 생원 이시민(李時敏)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 權氏)로 권계경(權啓經)의 딸이다. 부인은 안동 권씨권탁의 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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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종출(李鍾出)[1890~1966]은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 대사동 교회에서 일요일 낮 예배를 마친 뒤, 김옥돈(金玉頓)·이북술(李北述)·이양준(李良俊) 등과 교회에 남아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당일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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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경상도 의성현 출신의 이탁영이 작성한 일기. 임진왜란 당시 이탁영(李擢英)은 경상도 감영의 영리로 있으면서, 경상도 관찰사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탁영은 임진왜란 당시 도(道)의 행정을 담당함과 동시에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의 참모로 활동하기도 했다. 『정만록』은 전란 당시 이탁영 본인이 담당한 행정 업무와 직접 목격한 사건들을 기록한 일기인 것이다. 이탁영은 『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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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 운동가. 이태원(李兌遠)[1928~현재]은 1927년 의성군 단촌면에서 출신으로, 2012년 6월 현재 생존하고 있다. 대구 상업 학교 재학 중 1943년 4월에 동교생 이상호(李相虎)·김상길(金相吉)·서상교(徐尙敎) 등이 앞서 조직했던 항일 학생 결사 태극단(太極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5월에 결성된 태극단은 조국 독립을 위한 비밀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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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대능(大能). 호는 경산(耕山). 고려 시대 영동정(領同正) 이전(李磚)의 후예이다. 아버지는 이장수(李章秀)이며 어머니는 문소 김씨(聞韶 金氏)이다. 이태직(李泰稙)[1878~1913]은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출신으로,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국권이 강탈되자 이에 반대하고 일제를 규탄하는 「소회 진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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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영천.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의 후예이다. 이태학(李泰鶴)[1890~1962]은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 출신으로, 의성군 운산면에 있는 교회 목사로서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가던 도중, 3월 초순 서울에서 일어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그 후 대구로 가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도록 권유를 받고, 3월 7일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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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학술(李學述)[1892~1955]은 의성군 신평면 덕봉리에서 출신으로, 1919년 3월 25일 신평면 덕봉동에서 김수성(金守星)·손문원(孫文遠) 등과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학술은 신평면 덕봉 교회의 집사로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주변의 쌍계 교회·대사동 교회·괴산동 교회 등에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벌인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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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에 있는 인성 공업의 생산 공장 인성 공업은 1983년 6월에 인천광역시에서 설립되었으며, 인성 공업 금성 공장은 1996년 2월에 준공하여 플라스틱 사출 및 플라스틱 조립 제품을 주력으로 생산하고 있다. 인성 공업은 1983년 6월 8일에 인천광역시 부평구 청천동에 설립되어 기계·자동차 중간재로 사용되는 플라스틱 사출을 전문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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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에서 1945년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 시기 경상북도 의성 지역의 역사. 조선 총독부는 총무부·내무부·탁지부·농상공부의 행정 부처와 사법부를 두고, 지방은 도(道)·부(府)·군(郡)·면(面)의 행정 체계를 갖추었고, 총독은 일본 일왕에 직속되어 총리 대신을 거쳐 일왕에 상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사회적·경제적 수탈뿐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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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임재호(林在虎)[1898~1961]는 1919년 3월 12일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과 의성군 쌍계동의 박영화 등이 주도한 독립 만세 운동의 소식을 듣고 동부동과 서부동의 김석근(金石根)·박홍섭(朴洪燮)·박후도(朴後度) 등의 청년들과 함께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만세 시위에 발맞추어 함께 궐기할 것을 다짐하고 먼저 시위에 사용할 태극기를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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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에서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여 경상북도 의성군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두 차례 걸쳐 조선을 침략한 일본과 조선·명(明)의 연합군이 벌인 전쟁이다. 1차 침입을 ‘임진왜란’, 2차 침입을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하는데, 7년 간 두 차례에 걸친 침입을 통칭할 때는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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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 지역에서 일어난 태풍·홍수·산사태·해일·폭설·가뭄·황사 등의 이상 기상 현상과 지진·화산 등의 자연 현상 등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재해. 한반도의 경상북도의 내륙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의성군은 낙동강의 지류 하천인 위천과 쌍계천이 가로지르고 있어 여름철 집중 호우나 태풍으로 인한 풍수해를 입기도 한다. 또한 하천의 유로가 짧고 겨울철 강수량이 부족하여 봄철에 가뭄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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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 지역의 산업 중 누에를 사육하여 고치를 생산하는 업종. 잠업은 고대로부터 의복을 생산하기 위한 우리 민족의 중요한 산업의 하나로 발전해 왔다. 우리나라 잠업의 역사는 삼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미 이때부터 양잠에 대한 지식과 기술이 상당히 발달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삼국 시대에도 고관의 의복이 거의 비단으로 지어졌을 정도로 양잠이 크게 장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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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장주호(張柱虎)[1927~2006]는 의성군 비안면 외곡리에서 태어났다. 1943년 8월 안동의 안동 농림 학교(安東 農林學校) 제8·9·10회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 독립 회복 연구단(朝鮮 獨立 恢復 硏究團)의 단원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국내로 보내는 단파 방송을 듣고 태평양 전쟁의 상황과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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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비안현 출신의 무신.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필경(弼卿). 아버지는 경기도 수군 절도사(京畿道 水軍節度使)를 역임한 장시규(張是奎), 어머니는 진성 이씨(眞城 李氏), 할아버지는 장익(張翊), 증조할아버지는 장덕명(張德明)이다. 사위가 병조 판서(兵曹 判書)를 역임한 이삼(李森)으로 알려져 있다. 장한상(張漢相)[1656~1724]은 1656년(효종 7) 경상도 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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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전응주(全應珠)[1895~1950]는 1919년 3월 17일 밤 강희석 등과 함께 석탑동 교회를 중심으로 한 주민 50여 명을 이끌고 마을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그 후 창길(倉吉)·삼춘(三春)·박곡(朴谷)·석탑(石塔)·신월동(新月)·화령(花寧) 등 부근의 각동에서 운집한 8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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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부석(鄭富碩)[1885~1942]은 1919년 3월 15일 대사 교회의 영수 이종출을 비롯하여 교인들이 계획한 만세 시위에 찬성하고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3월 16일에는 동민 100여 명과 함께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기도동(箕道洞)에서 창길동(倉吉洞)까지 시위를 벌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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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부(子孚), 호는 매창(梅窓)·신곡(神谷). 의영고 직장 정윤소(鄭允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사 정언보(鄭彦輔)이고, 아버지는 정두(鄭枓)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사직 권식(權軾)의 딸이다. 양구 현감 정사성(鄭士誠)이 형이다. 정사신(鄭士信)[1558~1619]는 6세 때부터 형에게 수학하였고, 1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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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운수(鄭雲樹)[1903~1986]는 의성군 금성면에서 태어났으며, 1926년 연희 전문학교 재학 중 6·10 만세 운동에 가담하여 시위에 앞장섰다. 그후 미국에 유학하여 뉴저지주에 있는 장로교 종회 소속 프린스톤 대학 신학과에 들어가 1937년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 수학하는 동안 한국인 중심으로 애국 단체인 동지회, 교민회를 조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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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장수(鄭長壽)[1899~1953]는 1919년 3월 15일 대사 교회의 영수 이종출을 비롯하여 교인들이 계획한 만세 시위에 찬성하고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3월 16일에는 동민 100여 명과 함께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기도동(箕道洞)에서 창길동(倉吉洞)까지 시위를 벌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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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일본막부에 파견된 공식 외교 사절단. 통신사(通信使)는 조선이 일본의 막부 장군(幕府將軍)에게 파견했던 공식 외교 사절단을 말한다. 1403년(태종 3)과 1404년 조선과 일본이 각각 명으로부터 책봉을 받으면서 대등한 처지의 교린국이 되어 상호간에 사절, 즉 통신사와 국왕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때에 따라서 보빙사(報聘使)[답례로서 외국을 방문하는 사절]·회례사(回禮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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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세촌리에서 의성군 금성면 개일리를 거쳐 서울과 경주를 연결하는 철도. 중앙선은 경부선(京釜線)에 이은 한국 제2의 종관 철도이며, 총 연장 386.6㎞로 의성군 구간은 29㎞이다.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전농동 청량리에서 경기도 양평, 강원도 원주, 충청북도 제천, 경상북도 영주,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지나 경상북도 영천에서 대구선과 접속하여 경주까지 이르는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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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무정부주의 운동의 대표적 항일 운동 비밀 결사에 의성 지역 인사가 연루된 사건. 1920년대 중반 식민지 조선에서는 새로운 사상인 무정부주의가 의성 지역을 비롯한 각 지역에 파급되었다. 이를 계기로 진우 연맹 사건이 발생하여 의성군의 무정부주의자인 박석홍이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무정부주의 운동은 모든 제도화된 정치 조직,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는 사상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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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 지역에서 철로 위에 차량을 운전하여 여객과 화물을 운송하는 설비 및 수송 체제. 한국에서 최초로 철도가 건설된 것은 1경인선 부설이며 미국인 모오스(Morse)에게 시설권을 주었으나 자금 조달에 실패하자 일본이 이를 인수하여 1897년 개통했다. 그 이후 1901년에 경부선이 착공되었고, 이어서 경원선, 호남선, 경의선이 완공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대륙 침략과 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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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경원(崔慶源)[1878~1965]은 의성군 조문면(召文面) 대리동(大里洞) 교회의 목사 박낙현(朴洛鉉) 등과 함께 1919년 3월 18일 의성읍 장날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최경원은 박낙현의 만세 시위 운동에 참가하기로 하고, 의성읍 도동 교회[현 의성읍 교회]의 김천특(金千特)도 동참하기로 뜻을 모았다. 최경원은 의성으로 나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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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달모(崔達模)[1860~1932]는 전응주와 함께 주민 50여 명을 이끌고 마을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그후 창길(倉吉)·삼춘(三春)·박곡(朴谷)·석탑(石塔)·신월동(新月)·화령(花寧) 등 부근의 각동에서 운집한 8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고, 이튿날 밤에도 창길동에서 신월동까지 만세 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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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개항 이래 근대를 달성하기 위한 자구적 노력을 경주하면서 외세의 침탈을 막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의 한국 침략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강제적 을사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국은 일본의 실질적 식민지가 되었다. 우리 민족은 이러한 일제의 한국 침략에 맞서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일제의 한국 지배에 맞서 국내외에서 적극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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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개항 이래 근대를 달성하기 위한 자구적 노력을 경주하면서 외세의 침탈을 막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의 한국 침략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강제적 을사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국은 일본의 실질적 식민지가 되었다. 우리 민족은 이러한 일제의 한국 침략에 맞서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일제의 한국 지배에 맞서 국내외에서 적극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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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 지역에서 생산되는 우수하고 특별한 산물. 지역마다 지형, 기온과 강수량에 차이가 있고 토질이 달라 그 지방의 풍토에 알맞은 특산물이 생산된다. 특히 한국은 예부터 지역성이 강하여 지방 특산물이 많이 생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 자치제가 실시되면서 각 지역마다 지역을 홍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지역 특산물을 브랜드화하여 경쟁력 있는 산물을 생산하고 있는 실정이다. 의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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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1911년 사이 경상북도 의성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개된 의병 항쟁. 의병 운동은 집권층이 부패하고 무능한 상태에서 외세가 침략하여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일어난 구국 운동의 대표적 형태였다. 의병 운동은 일제의 대한 제국 병합을 전후한 시기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무장 투쟁을 주도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의 기반을 마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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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언신을 시조로 하고 박지량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의성군의 세거 성씨. 함양 박씨(咸陽朴氏)의 시조는 신라 경명왕의 셋째 아들인 박언신(朴彦信)으로 속함 대군(速咸大君)[속함은 경상남도 함양의 옛 명칭]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았다. 고려 시대에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내고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진 박선(朴善)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였다. 박선의 현손 박신유(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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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이후 경상북도 의성 지역의 역사. 경상북도 의성군은 태백산에서 남으로 뻗은 태백산맥과 서남으로 뻗은 소백산맥이 소쿠리 모양을 형성하고 있는 지형에 위치한다. 태백산맥의 영천 보현산에서 온 줄기가 춘산면에서 두 갈래로 갈려져, 한 줄기는 북쪽으로 흘러 춘산면의 산두봉, 옥산면의 황학산, 단촌면의 갈라산을 만들고, 이곳에서 서쪽으로 굽어 신평면의 봉암산, 다인면의 독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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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산제리 화장산성(花藏山城)에서 벌어진 의병과 일본군의 전투. 화장산성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산제리 화장산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 시대 산성이다. 의성군 비안면, 안평면, 안사면을 경계로 하여 370m 능선을 따라 약 4㎞의 산성이 수축되어 있다. 현재 천연의 암굴(岩窟)을 거점으로 한 유적은 아직도 남아 있다. ‘화장(花藏)’이라는 이름은 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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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황금종(黃金鍾)[1871~1953]은 의성군 점곡면 사촌동(沙村洞) 만세 시위의 소식을 듣고 남승순(南勝淳)·남규우(南圭佑) 등과 함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3월 19일 남규우와 함께 시위 군중을 이끌고 윤암동을 출발하여 사촌동으로 몰려갔다. 밤 9시 무렵, 사촌동 도로에는 부근 주민 500여 명이 모여 중앙 도로를 오르내리며 태극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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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길림성 무송현(撫松縣)에 있는 군정서(軍政署) 부속 흥업단(興業團)의 의성 지역 군자금 모집 활동. 1920년대 초 만주 길림성 무송현에 있는 군정서 부속 흥업단은 군자금 모집 계획을 세웠다. 1920년 11월 흥업단의 단장 김호(金虎)와 외교 부장 김성규(金星奎)는 이만준(李萬俊)에게 20만 원의 자금 조달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만준은 환인현(桓仁縣)의 한교공회장(韓僑公會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