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398 |
---|---|
한자 | 金聖七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상규 |
출생 시기/일시 | 1913년 - 김성칠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 김성칠 도서회사건으로 1년간 복역 |
활동 시기/일시 | 1937년 - 김성칠 경성법학전문학교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41년 - 김성칠 전라남도 대치와 경상북도 장기 등에서 금융조합 이사로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44년 - 김성칠 금융조합 이사로 복직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3월 - 김성칠 금융조합연합회 지도과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47년 - 김성칠 서울대학교 사학과 조교수에 부임 |
몰년 시기/일시 | 1951년 - 김성칠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8년 11월 22일 - 김성칠 표석비 제막 |
출생지 | 김성칠 -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
묘소|단소 | 김성칠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신학리 |
사당|배향지 | 표석비 -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신학리 |
성격 | 역사학자 |
성별 | 남 |
본관 | 광산 |
저술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10권 완역 등 |
[정의]
근대 경상북도 영천 출신 역사학자.
[개설]
김성칠(金聖七)[1913~1951]은 영천 출신으로 경성제국대학에서 역사학자로 활동한 인물이다. 1928년 대구고등보통학교 2학년 때 독서회사건으로 검거되어 1년간 미결수로 복역하였다.
일제 치하 단일 학생결사사건으로선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사건은 1928년 11월에 있은 ‘대구학생비밀결사사건’이었다. 대구의 고등경찰 9명이 넉 달 간 전속으로 매달려, 11월 6일부터 대구시내의 남자 중학생을 대상으로 해 전후 105명을 구속한 후, 12월에는 이 중 결사간부 26명을 검찰에 송치한 것이 사건의 개요이다.
대구사범학교의 교사 현준혁(玄俊赫)이 지도한 ‘사회과학연구사건’보다 1년 앞서 발생한 이 사건으로 대구의 남자 중학생을 둔 가택은 경찰의 폭압적인 수색을 받아야만 했다.
일경에 의해 밝혀진 결사단체는 ‘신우(新友)’·‘혁우(革友)’·‘적우(赤友)’·‘우리동맹’ 등 7개 단체였다. 이 단체들의 지도 강사는 박광세(朴光世)·장적우(張赤宇) 등 사회주의 의식을 지닌 청년들이었다. 이들로부터 독립 사상과 사회주의 교육을 받고 해방 후 이름을 떨친 학생은 대구고등보통학교의 윤장혁·상무상·김일식·황보선·김성칠 등과, 대구중학교의 조은석, 대구농중의 권태호, 대구상업의 장원수 등이었다.
특히 고보생들은 교내 언론 집회의 자유, 조선 역사 과목의 신설, 조선어 학습 시간의 연장, 불량 일인 교원의 경질 등 일제의 식민지 교육 자체를 부정하는 요구 조건을 내걸며 동맹 휴학을 하기도 했다.
구속된 학생들과 지도 강사들은 1년에서 3년 전후의 감옥살이를 했는데, 이들이 대구형무소에 구금되어 있을 때인 1930년 6월에 바로 장진홍 의사의 옥중 자결 사건이 발생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수감 학생들은 일제히 감방 벽을 부수며, 분사한 장의사를 살려내라고 농성했고 단식에 돌입했다. 맹휴와 결사에 못지않은 비장한 옥중투쟁이었다. 그러자 일경은 윤장혁(尹章赫) 등 주동자 등에게 ‘건조물 파괴’라는 죄명을 덧씌워, 징역 8개월의 가형(加刑) 처벌을 하는 악랄함도 보였다.
‘비밀 결사 단체’라 했지만 일제 고등경찰이 자신들의 수사 실적을 부풀리기 위해 과장한 바도 없지 않았다. 실제는 신진 사상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독서 동아리 모임에 가까웠던 때문이다.
사회주의 학습은 당시의 지식 청년들로선 흔히 있는 신사상 연구 풍조의 하나였다. 일본에서도 사회주의 서적과 사상에 접해 보지 않으면 지각이 모자라는 학생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따라서 학문적 관심이 일차적이어서, 일인 관헌들 가운데도 성장기 청년들의 이런 연구 풍조를 대범하게 보아주는 인물도 없지 않았다.
1년 넘게 구속되어 있던 대구고보 2년생인 나이 어린 김성칠에게 뜻밖의 ‘기소 유예 처분’을 내리면서 담당 검사가 “15세미만의 사상범을 만드는 것은 대일본제국의 명예에 하나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한 것도 새겨볼 만하다.
[가계]
김성칠(金聖七)의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부친은 김상한(金相漢)이다.
[활동 사항]
김성칠은 출옥했지만 학교에서 퇴학당하여 집에서 3년간 독학하고, 1932년 『동아일보』 농촌구제책 현상 모집에 1등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이 상금으로 일본 규슈[九州]의 도요쿠니(豊國) 중학에 1년간 유학하여 중학과정을 마쳤다. 일본 국경일만 가까우면 매번 가위눌림을 당했다고 할 만큼 끔찍한 기억이 있음에도 과감히 도일하여 경직된 사회 과학 지식만이 아닌 다양한 지식을 흡수함으로써, 해방 공간에서 선배들이 즐겨 찾던 마르크시즘의 강물을 뛰어넘어, 폭넓은 안목의 사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37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전라남도 대치(大峙), 경상북도 장기(長鬐) 등지에서 1941년까지 금융조합 이사로 재직하였다. 1941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하여 사학을 전공하던 중 1943년 겨울 학병(學兵) 응모를 거부하고 학업도 중단되었다.
1944년 봄 다시 금융조합 이사로 복직하여 충청북도 봉양(鳳陽)에서 광복을 맞이하고, 1945년 12월부터 1946년 3월까지 금융조합연합회 지도과장을 지냈다. 1945년 10월 10일 경성대학 법문학부에 복학하여, 졸업 후 사학과 조수(助手)가 되어 연구 활동했으며 1946년 3월부터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출강을 하다가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조교수가 되었다.
1950년 6·25 전쟁으로 서울에 갇힌 그는 좌우에 편향됨이 없이 ‘붉은 서울’의 실상을 낱낱이 일기장에 담았다. 신변의 위험을 각오하면서도 역사의 현장을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천성의 기록자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51년 10월 8일 피난 수도인 부산에서 고향인 영천으로 중구절(重九節) 제사를 모시러 갔다가 고향인 영천에서 어이없게도 괴한에게 피격되어 원사(寃死)하고 만다.
생전에 해 온 일보다, 해야 할 일이 더 많았던 사학자이며 번역가였던 서울대 교수 김성칠로서는 무엇보다 38세의 한창 나이가 두고두고 아까웠던 것이다.
[학문과 저술]
일찍부터 국사를 비롯한 국학 등 민족문화는 물론 청나라와 조선 시대 지식층의 문화 교류에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계속하여, 1941년 여름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10권을 완전히 번역하였으며[1948년 금융조합연합회간], 1946년에는 『조선역사(朝鮮歷史)』를 펴내어 유려하고 아름다운 필치로 광복 후의 우리 겨레를 크게 깨우쳤다.
1948년부터 1950년에 걸쳐서는 1945년 3월에 번역을 완료한 『열하일기(熱河日記)』 5책을 간행하였으며, 소년 시절부터 농촌과 농민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애정의 표현으로 펄벅(Buck, P.)의 『대지(大地)』, 강용흘(姜鏞訖)의 『초당(草堂)』을 번역 출판하였고, 고어와 고대사연구를 위한 기초로 삼으려고 1950년 1월에 지명조사연구회(地名調查硏究會)를 조직하여 조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밖에 『동양사개설』[공저]가 있고,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때까지 기록을 담은 『역사 앞에서』가 있다. 1993년에 출간된 『역사 앞에서』는 철저히 객관적 입장에서 좌우익의 전변을 꿰뚫어본 역사가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고 뛰어난 통찰력과 문화의식을 단정한 문체에 담아 일기 문학의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상훈과 추모]
영천향토사연구회에서 2008년 11월 22일, 영천시 청통면 신학리 김성칠의 무덤 옆에 표석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거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