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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하직한 장원놀이 기능 보유자를 기리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D030101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명동 명동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종락

2006년 3월 “양산의 한 소리꾼이 세상을 하직했다.” 제하의 기사가 양산신문에 실렸다. 웅상농청장원놀이 논매기노래 기능보유자인 이유락(李有洛) 옹이 향년 86세를 일기로 하직하였음을 알리는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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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락(李有洛)옹

그는 1921년에 명곡리 512번지에서 출생하여 지난 2006년에 작고했다. 어려운 가정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보내고 같은 또래 친구들은 학교에 가는데 월사금 50전(당시 쌀 4~5되 가격) 낼 돈이 없어 학교를 가지 못하고 아버지로부터 한글과 한문을 틈틈이 배우며 가사를 도왔다. 12살 되던 해, 어머니는 2남 1녀를 두고 새로운 동생을 낳다 태어나지도 못한 동생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그 때 그의 형은 열다섯 살이었고, 그는 열두 살이었으며, 여동생은 일곱 살, 아버지는 마흔 살이었다. 어머니를 잃은 동생은 의지할 곳을 잃고 그만 졸졸 따라 다녔고, 그도 어린 나이였지만 동생이 무척이나 측은해서 잘 챙겼다. 열세 살 때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머슴 사는 집의 아들(박건중)은 자신보다 다섯 살 아래인데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날이 학교 가고 싶은 마음은 더했지만 자신의 처지에 당치도 않은 생각이라며 세차게 고개를 흔들곤 했다. 그해 세경으로 쌀 30되를 받았다.

아버지가 그 이듬해는 자기를 집에 있게 하고 대신 형이 월남댁(박동호 모 택호) 머슴살이를 하였다. 형은 실수로 물버지기(물독)를 깨뜨렸는데 그에 따른 꾸지람이 두려워 머슴을 중도 포기하는 바람에 남은 기간을 이씨가 대신 머슴살이를 하였다.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배워야겠다는 의욕을 버리지 못하고 웅상초등학교에서 열리는 야학에 등록을 했다. 야학 교사는 당시 웅상초등학교 교사들이 수당을 받지 않고 봉사하고 있었다. 야학에 다닌 기간은 3년이었지만 머슴살이하는 처지에 농번기에는 아예 갈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농한기 때라도 주인의 눈치를 살피느라 학교에 가는 날보다 못 가는 날이 더 많았다. 그래도 선생님들께서 얼마나 열정으로 가르쳐주었던지 그때 배운 것들이 일생을 살아가는데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계모를 두 번이나 맞이했지만 오는 분마다 이씨 남매에게 마음을 주지 못했고, 그들 또한 그 분들이 싫어 아버지에게 같이 살지 못하겠다고 하니, 두 분 다 얼마 되지 않아 가버렸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까지도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보다 마흔에 혼자되어 예순 여섯까지 홀몸으로 외롭게 살다 가신 아버지 때문에 더 가슴 아파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한참 전에 외조부가 돌아가시자 외조모는 얼마나 살기가 어려웠던지 어린 외삼촌을 데리고 개가를 하였다. 외삼촌은 개가한 댁에 마음이 붙지 않았는지, 이씨 집에 자주 와 머물곤 했다. 외조모는 당신 살기도 어려우면서 딸이 죽고 난 뒤, 외손자들이 얼마나 불쌍했는지 개가한 전씨 댁의 논을 소작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외조모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그 소작마저 떨어지고 말았다.

다시 머슴살이를 하여 스물한 살부터는 마을에서 최고 세경인 네 가마니의 쌀을 받았다. 부산에서 우마차 사업을 하던 친척이 세경을 좀 더 주겠다며 자기 집에 와 일하기를 권해 우마차를 끌고 짐을 실어 나르는 일을 2년간 했다. 그러나 세경은 더 받았지만 주변 환경 탓에 아무리 절약하려고 해도 절약이 되지 않아 남는 게 별반 없었다. 철도청 마차 짐꾼으로 취직을 하게 되면서 자취를 시작했다.

그때 동갑내기 박철수란 고향친구가 목수 일을 하기 위해 찾아와서 한 방에서 생활을 하다 1943년 일본 북해도 석탄광산에 징용으로 함께 끌려가서 다이너마이트 폭파 작업용 구멍을 뚫는 일을 했다. 고되기 그지없는 일에다 먹는 것이라고는 조개껍질에 퍼주는 희멀건 죽이 전부였다. 배고픔을 견딜 수 없어 틈날 때마다 쑥이나 나물을 뜯어 삶아 소금을 넣어 먹기도 했다. 풀을 잘못 뜯어 먹고 부기가 생기는 일도 예사였다. 한 방에서 자고 일어나 멀쩡하게 일하러 갔던 사람이 사고로 죽었다는 말과 함께 다시는 얼굴을 볼 수 없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씨도 어느 때 그런 처지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 속에 살면서도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차라리 죽으면 편하지 하는 생각이 들자 죽음에 대한 불안은 오히려 없어졌다. 기계를 매고 일을 하다 감전에 의하여 의식을 잃기도 하고, 가스에 질식되어 들것에 몇 번이나 실려 나와도 죽지 않았던 것은 너무 천한 생명이라 저승에서도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라 그랬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온기 없는 다다미방에서 옳지 않은 이불 한 장 덮고 자려니 극심한 추위 때문에 잠을 설치기가 일쑤였다. 눈은 또 얼마나 많이 오던지…. 벼룩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아 벼룩이 사람을 들고 가려고 할 정도라고 했다. 2년 동안 징용살이를 하며 노임을 받았지만 숙식비를 공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쥐꼬리만 했다. 광복이 되고 집에 돌아올 때는 겨우 돌아올 여비만 남았다. 귀향 후 머슴살이를 3년 더 살다 목수 일을 배우기 위해 목수 뒤를 몇 년이나 따라 다니며 일을 했다. 하지만 타고난 소질이 없었기에 목수 일은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26살에 결혼을 하여 2년 동안 살았지만 인연이 아니었던지 파혼을 했다. 29세에 전라도 순천에 살다 빛 독촉을 견디지 못하고 집과 살림을 고스란히 두고 가족들 몸만 빠져 나와 지향 없이 떠돌다 머문 곳이 명동이었다는 처녀와 재혼하여 일생을 같이하였다. 가진 것도 없고 부족한 자신을 만나 고생만 죽도록 하면서도 아무런 불평 없이 자식을 착하게 잘 키워 모두 성혼시키고 자신을 극진히 봉양해준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라 했다.

웅상 지역에서 유래된 농청장원놀이가 명동마을에서 계승하여 경상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이씨 같은 한 맺힌 민초들의 삶의 모습을 재현한 작품으로, 출연하는 모든 이들이 실제 체험한 삶이고 가슴 밑바닥에 함장된 응어리를 풀어헤치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규정상 몇 사람으로 한정되어 박철수, 김필연과 같은 훌륭한 소리꾼을 제치고 부족한 자신이 소리부분 기능 보유자로 지정되었음은 영광스럽고도 송구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타고난 목청 탓도 있었지만 이보다 이씨가 소리하기를 즐겨 평소에도 자주 자신이 살아온 한을 애간장을 끓어 올리며 소리를 해왔기 때문이리라. 농청장원놀이 연습 때나 공연 때도 어려운 가정에 태어나 배우지 못하고 머슴살이할 때 밤을 새워가며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들녘에서 물대기를 하던 일, 헤어진 옷 기워줄 이 없어 달빛에서 직접 옷을 기운 일, 머슴살이의 서러움, 뼈저리도록 배고팠던 시절, 으스러지는 몸으로 나날이 논밭에서 땀 흘리던 때를 떠올리면서 피눈물을 토해내듯 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후대의 사람들이 이런 애간장 끓는 작품을 공연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이 놀이가 자자손손 계승되길 바라는데 기교면이나 감각면에서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옛 세대를 능가하지만 배고픔을 모르고 고생을 모른 그들이 선조들의 눈물로 점철된 생활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을까 우려되는 것이다. 소리나 공연 때 단순히 목에서만 나오는 소리가 아닌 가슴 저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이씨와 같은 소리와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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