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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0681
한자 鄕校
영어의미역 County School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교동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회용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교동에 있는 조선시대 지방 관립 교육 기관.

[개설]

향교는 유교 문화 위에서 설립·운영된 교육 기관으로, 국가가 유교 문화 이념을 수용하기 위해 중앙의 성균관과 연계시키면서 지방에 세운 것이다. 교궁(校宮), 재궁(齋宮)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리는 향교는 지방에 설치된 관학으로 중등 과정의 교육 기관이다. 향교는 고려시대부터 설치되었으나 그리 성행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 태조(太祖)가 즉위 초에 제도(諸道)의 안찰사에게 명하여 향교의 흥망으로 수령의 치적을 고사하게 하여 학교의 쇄신을 꾀하였다. 이에 전국의 각 주(州)·부(府)·군(郡)·현(縣)에 각각 1개씩 설립하여 크게 흥하게 되었다. 그러나 향교는 임진왜란 이후 사회적인 변화와 사학인 서원의 유행으로 그 빛이 퇴색하여 한 읍(邑)에 하나의 향교만 남게 되었다. 양산 지역의 대표적 향교로는 1397년 설립된 양산향교가 있다.

[교육과정]

향교의 입학 자격은 16세 이상의 양반의 자제 또는 향리를 원칙으로 하였다. 유생의 정원은 행정 구역의 단위에 따라 달리 하였는데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은 각각 90인, 도호부(都護府)는 70인, 군은 50인, 현은 30인으로 하였다.

향교의 교과 과정은 『소학(小學)』 『사서오경(四書五經)』이 주가 되었으며 그 밖에 『근사록(近思錄)』, 제사(諸史)등이 추가되었다. 향교의 학관은 교수와 훈도를 각각 1명씩 두었는데 소군에는 훈도만 두었다. 향교의 감독 책임자는 관찰사와 수령이며 이들에 의하여 교육 활동을 평가받았다. 또한 향교의 운영 경비는 국왕이 하사한 학전과 지방의 유림으로부터 희사 받은 기부금으로 사들인 전지·어장·산림 등의 수세로 충당하였다.

향교는 성균관과 같이 문묘 기능과 교육적 기능을 동시에 갖고 있었으며 이것에 병행하여 사회교화·향풍순화 등 사회 교육적인 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향교는 점차 무력화 되어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사학인 서원이 거의 대치하게 되었고 향교는 지방 양민들이 군역을 피역하는 장소로 전락하였다. 1894년(고종 31)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향교는 이름만 남게 되고 단지 문묘를 향사(享祀)하게 되었다.

[양산향교]

양산향교는 1397년(태조 6)에 창건하여 양산 지방의 중등 교육을 담당하였다. 중종대 이후 향교의 기능이 약화되어 서원이 그 역할을 대신하였지만, 관학 기관으로서 향교의 명분은 유지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시설 대부분이 파손되었다. 현재 대성전, 명륜당, 동서서, 주방, 선문, 정원제, 풍영루(風詠樓)가 남아 있는데 조선 후기의 독특한 건축 양식을 하고 있다.

문루인 풍영루로 들어선 후 첫 건물 명륜당은 평지에, 대성전은 급경사지에 있다.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동재·서재를 앞쪽에 두고 대성전 등의 제사 공간을 뒤로 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으로 전체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풍영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누각(重層樓閣)으로 팔작지붕이고, 강당인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집이다. 명륜당 뒤에 있는 내삼문은 누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익공식(翼工式) 단층 맞배지붕집이다. 전체는 4채의 건물과 고직사(庫直舍)로 구성된, 목조기와집이다.

양산향교 활동에 관한 역사적 기록물로는 군수 이두연이 쓴 「향교중건기문」(1985), 군수 조신준의 「중수기」(1636),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인 조정융의 「기(記)」(1636), 군수 김이만의 「이건기(移建記)」, 군수 심락정의 「중수기(重修記)」, 군수 임철재의 「대성전중수기(大成殿重修記)」(1897), 경학원 대제학 김윤식의 「모성계서문(慕聖契序文)」(1916) 등이 있으며 『양산군지』, 『양산향교지』등에도 그 확인이 실려 있어 당시의 활동을 간략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다.

『양산향교지』와 『지보(誌補)』의 기록에 따르면 향교는 양산군 동쪽 2리에 있었으나 임진왜란에 불타 없어지고 임시로 1610년 성서(城西)지역에 설립하였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지대가 비탈진데다 여러 묘총이 늘어서 있어 불쾌하고 산사태가 날 우려도 있었으므로 양산 주민들은 옛 터에 향교를 재이전하기를 원했고 1744년 성 동쪽으로 이전하였다고 전한다.

『후지(後誌)』의 기록에 따르면 1928년(순조 28) 당시 군성 동쪽에 위치해 있던 건물을 군수 황찬희가 군 서방 5리의 상서방 곡포리로 이전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1909년 근대 교육이 실시되면서 양산향교는 양산 지방 유림들에 의해 원명학교로 개설되어 양산군 내의 청년 교육을 담당했다. 그 후 양산공립보통학교, 양산고등공민학교와 기술학교로 개칭·운영되었으며 1982년 8월 2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5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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