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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1316
한자 金猛
영어음역 Gim Maeng
이칭/별칭 정고,문정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이종봉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상남도 양산시
성별
생년 미상
몰년 1030년연표보기
본관 양산
대표관직 참지정사

[정의]

고려 전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양산(梁山). 자는 정고(貞固). 할아버지는 김연(金衍), 아버지는 김지(金贄), 아들은 김덕부(金德符)이다.

[활동사항]

김맹성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인으로 활동하였다. 1001년(성종 20) 흥료(興遼)가 거란을 배반하자 거란이 사신을 보내 고려의 구원을 청하였을 때 곽원이 왕에게 “압록강 동쪽 가에 있는 거란의 성(保障)을 이 기회에 탈취하자.”고 권유하였을 때, 김맹최사위(崔士威), 서눌(徐訥) 등과 함께 글을 올려 그의 계략이 부당하다고 반대하였다.

김맹은 1016년(현종 7) 6월 중추직학사(中樞直學士)로 임명되고 1018년 급사중이 되었으며, 1020년 송나라에 파견되었다. 1021년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1022년 권지중추사로 임명되었고, 1025년 의춘현개국남(宜春縣開國男)의 봉작과 함께 식읍 300호를 받았다. 1927년 중추사로, 1930년 태자소부(太子少傅)에 임명되고 이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보임되었다가 죽었다.

김맹이 죽은 후인 1067년(문종 21) 계사일에 “전 문하시중 최항(崔沆)강감찬과 참지정사 김맹 등은 고상한 절개와 정직한 마음으로 여러 왕대를 섬겨 그 공로가 청사에 빛나고 있다. 이제 국내가 태평무사하고 백성들이 혜택을 받게 되는 것은 다 그들의 힘이니 최항과 강감찬에게는 수태사겸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을, 김맹에게는 태자태사문하시중(太子太師門下侍中)을 각각 추증할 것이다.”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문종 대에도 여전히 추앙을 받았다.

[학문과 사상]

김맹은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이 여러 번 올라 좌습유(左拾遺)로 되었으며 현종(顯宗)이 즉위한 후 근시(近侍)로 선발 배치되어 중한 정무를 맡아 보았다는 것과 지공거가 되어 관인 선발에도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학문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인 김지도 글에 능통한 인물이란 점을 고려할 때 김맹은 학문에 조애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상훈과 추모]

현종 때 문정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문종 때에는 태자태사문하시중(太子太師門下侍中)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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