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송정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1432
한자 宋挺廉
영어음역 Song Jeongryeom
이칭/별칭 계맹,존양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전영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상남도 합천
성별
생년 1612년연표보기
몰년 1684년연표보기
본관 은진(恩津)
대표관직 사헌부장령

[정의]

조선 중기 경상남도 양산에서 활동한 문신.

[개설]

송정렴의 정치적 행적은 송시열에 대한 치죄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숙종 즉위 초에는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였고 이에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장악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송시열이다. 1680년(숙종 6)에 경신대축출이 일어나 서인이 정국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의 송정렴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송정렴은 정계에서 축출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송정렴의 교유 인사가 허목(許穆)·조임도(趙任道)·권대운(權大運) 등 주로 남인 계열의 인사들이었음에도 엿볼 수 있다.

[가계]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계맹(繼孟), 호는 존양재(存養齋). 아버지는 진사 송익(宋翊)이며, 어머니는 덕은임씨(德恩林氏)로 거창의 첨모당(瞻慕堂) 임운(林芸)의 아들인 임승근(林承謹)의 딸이다. 외삼촌으로 임곡(林谷) 임진부(林眞怤)가 있다.

[활동사항]

존양재 송정렴은 1612년(광해군 4년)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 지역에서 태어났다. 12세 때부터 외삼촌인 임곡 임진부에게서 글을 배웠다. 임곡 임진부송정렴의 자질을 알아보고 남다른 관심을 두고 공부를 가르쳤다. 14세 때는 남명 조식을 모신 용암서원에서 독서를 했는데 여기서 송정렴임진부에게서 남명 학문의 종지인 경의(敬義)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다.

23세 때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문인으로 있으면서 1635년(인조 13)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여 삼전도 굴욕을 당하자, 자결을 시도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인 합천으로 내려와 동계 정온을 찾아 학문연마에만 힘썼다.

27세에 현재 의령 지역에 있던 미수(眉叟) 허목(許穆)을 보자 허목송정렴의 학문을 칭찬하며 몸소 ‘물이선소이불위 물이악소이위지(勿以善小而不爲 勿以惡小而爲之)’라는 글을 써주었다. 이것은 명심보감에 있는 글귀로 착한 일이 작은 것이라고 해서 하지 않아서는 안 되며, 악한 일이 작은 것이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29세에 외삼촌 임진부와 함께 산청 지역에 가서 거창 수승대(搜勝臺)를 방문하고 퇴계 이황과 갈천 임훈의 유적을 둘러보고 다시 동계 정온을 찾아 『근사록(近思錄)』을 읽었다. 42세에 초시에 다시 합격하였으나, 송정렴이 과거를 보지 않으려고 하자 외삼촌 임진부의 간곡한 타이름으로 과거를 보아 43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그 후 성균관 학유, 전적, 사헌부 감찰, 강진현감, 기장현감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57세에 사직하고 남명을 모신 덕천서원의 원장직에 취임하였다.

58세에 존양재를 짓고 이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본래부터 존심양성(存心養性)을 공부의 요지로 삼고 있었는데, 집을 짓고 편액으로 지은 것이다. 59세에는 영귀대(詠歸臺)를 완성하였다. 영귀대는 송정렴이 낙향해 자연을 읊조리면서 제자들을 기르고자 지은 정자이다. 고향 합천에 내려온 송정렴은 남명의 수제자로 불리는 덕계 오건을 모신 서계서원과 일두 정여창을 모신 함양의 남계서원, 안의의 용문서원 원장을 맡아 지역 유풍에 앞장섰다. 그러나 얼마 뒤 조정의 부름을 받아 성균관 전적, 예조좌랑 등의 벼슬을 지냈다.

67세에 남명을 모신 용암서원 원장으로서 용암서원과 뇌룡사를 고쳤다. 이후 다시 벼슬 때문에 잠시 고향을 떠났으나 송정렴은 퇴계 이황을 모신 의령의 덕곡서원 원장을 다시 맡는 등 다시 선현의 뜻을 기리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송정렴은 1684년 73세에 별세하였다.

[학문과 사상]

성리학에서의 학문 수양 방법으로 인식론적인 의미의 궁리(窮理)와 실천론적인 뜻의 거경(居敬)을 합한 거경궁리를 제1의로 삼고 문사(文詞)에는 별로 뜻을 두지 않았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존양재문집(存養齋文集)』이 있으며, 1693년(숙종 19)에 아들 송풍재(宋風齋)와 송지식(宋之食)이 편집하였다. 서문은 영남의 대표적인 학자인 이현일(李玄逸)이 썼으며, 백수십 년을 전해 오다 고종 때 허전(許傳)[1797~1886]이 발문을 써 1901년 후손들이 간행하였다. 모두 6권 3책으로 구성된 문집에는 송정렴의 시와 당대의 유명학자들과 주고받은 서신, 시국에 관한 의견, 그리고 지역 사회 문제에 대한 글 등이 다양하게 실려 있다.

특히 동래 왜관을 증설하는 것에 대하여 송정렴이 의견을 제시한 글은 당시 사대부들이 가지고 있던 일본에 대한 생각을 전해준 것이다. 또 허목과 예송문제를 주고받은 편지는 예학에 대한 송정렴의 생각과 당시 사대부들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현재 『존양재선생문집책판(存養齋先生文集冊板)』 90매는 1985년 11월 14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8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고암서원(古巖書院)과 신천서원(新川書院)에 봉향되었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