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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1538
한자 丁得
영어음역 Jeong Deuk
이칭/별칭 원백(遠伯),모성재(慕聖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진상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유생
출신지 경상남도 김해
성별
생년 미상
몰년 미상
본관 나주(羅州)
대표관직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의]

조선 중기 경상남도 양산지역에 자리잡은 유생.

[개설]

조선시대 양산 지역의 유일(遺逸: 학식과 덕이 높았지만 관직에 등용되지 않아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인물) 중 한 명이다.

[가계]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원백(遠伯). 호(號)는 모성재(慕聖齋). 정재(正齋) 정지송(丁之松)의 후손이다.

[활동사항]

정득은 타고난 바탕이 뛰어나게 총명하였고, 거동과 외모가 단정하고 엄숙하였다. 지조를 굳게 지켰으며, 행동을 단아하게 하여 장자(長者)의 풍모가 있었다고 한다. 나이 13세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부친상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당(祠堂)에 아뢴 후 신위(神位)를 받들고 홀로 계신 어머니를 업고서, 김해 지역에서 낙동강을 넘어 양산 지역의 천성산 아래에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정득은 장수(長壽)하여 효종 때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 僉知中樞府事)를 제수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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