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1583
한자 集姓村
영어의미역 Single-Clan Village
이칭/별칭 동성마을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집필자 이종봉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에서 동일 조상의 후손들이 중심을 이루는 마을.

[개설]

집성촌은 조선 초기부터 조선시대 말기까지 주로 사회의 지배층에 속하여 있으면서 중앙 정부의 관료층과 연관을 가지는 양반 사대부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형성된 씨족 집단의 거주 촌락이고, 거주의 지속성을 보여 일정 지역의 복수의 촌락들을 형성하여 상호 교섭을 가진다.

파(派) 단위의 거주 범위는 상당히 넓고 동성 조직 전체로서는 전국적 확산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집성촌의 형성은 경기 지역처럼 사패지를 기반으로 형성되는 경우, 왕실과 관련된 묘역 근처에 후손들이 모여 살면서 형성된 경우, 집성촌을 이루다가 중앙 권력에 진출한 뒤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여 형성되는 경우가 있다.

조선시대 집성촌은 15~16세기에는 유명한 동성마을이라 하더라도 동족뿐만 아니라 이들의 혼인으로 여러 성씨들이 마을에 잡거하였고, 신분 구성상으로 소수의 양반호에 다수의 평민과 천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17세기를 넘어오면서 특정 성씨를 중심으로 동성마을을 이루게 된다. 집성촌은 동성 내부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여러 장치를 마련하고 있는데, 원사(院祠)·재실(齋室)·종가(宗家) 등의 건축물과 족계·동계 등의 규약과 조직, 보첩류와 문집의 간행 등이 나타난다.

이러한 것은 다른 가문, 또는 다른 신분에 대하여 그들의 권위와 위세를 나타내는 것이거나 동성 상호간의 갈등을 은폐하고 농민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였다. 따라서 집성촌은 조선의 촌락 사회의 한 단면을 이해할 수 있고, 그러한 촌락의 해체 과정은 중세 사회 해체의 한 측면을 엿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형성 배경]

양산 지역 집성촌이 형성되는 배경은 대략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등의 난을 피해 이주하여 집성촌을 형성시킨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 대석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나주정씨 정득(丁得)이 모친을 등에 업고 김해에서 낙동강을 건너 피난차 홍룡폭포 갯들 밑에서 피난 생활을 하다가 정착하였다. 소노마을은 임진왜란 전후 동래정씨 문중이 함께 모여 동성마을을 형성하였고, 좌삼마을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에 달성서씨가 마을을 형성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또 중앙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집성촌을 형성한 경우, 처가에 거주한 이래로 집성촌을 형성한 경우, 집성촌이 형성된 이후 인구의 증가 등으로 분가하여 새로운 집성촌을 이룬 경우가 있다. 집성촌의 형성과 유지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농토를 통한 사회 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때문에 인구가 농토의 규모를 초과할 때는 기존의 집성촌에서 분가하거나 이거할 수밖에 없어 새로운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현황]

웅상지역에는 달성서씨인 서몽호의 후손이 매곡 지역을 중심으로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고, 명곡 지역에는 월성손씨와 광주안씨가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는데, 각 지역에 다수의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물금읍에는 증산리 남평마을경주이씨가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고, 가촌리에는 부여백씨·파평윤씨 등이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동면에는 대표적으로 양산방씨·연안이씨 등이 각 지역에서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원동면에는 영천이씨가 내포와 당곡에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김녕김씨는 화제 독점마을에 집성촌을 형성하여, 독점김씨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상북면에는 광주안씨·동래정씨·달성서씨·밀양박씨 등이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하북면에는 삼수리양산이씨의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양산시내에 있는 집성촌은 거의가 해체되었지만, 연안이씨와 김녕김씨가 다방동과 명곡에 집성촌을 형성하였고, 삼성동에는 수성나씨·금성나씨·문화유씨 등이 북정마을·산막마을 등에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강서동에는 담양전씨가 용선마을에, 광주김씨는 어곡마을 등에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이처럼 양산에는 조선시대 각 지역에 집성촌을 형성하여 향촌 사회의 향론을 주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양산 지역 집성촌의 붕괴는 1960년대·1970년대 경제 개발이 진행되면서 농촌 사회의 분해와 함께 나타났다. 특히 1980년대와 1990년대 급속한 공업화·도시화로 부산 주변의 위성 도시화, 나아가 신도시 개발 정책으로 집성촌의 붕괴는 촉진되었다. 어찌 보면 양산 지역의 집성촌은 도시화의 물결에 맥없이 무너져야 하는 오늘날 집성촌의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