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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2035
한자 梁山靑年會
영어의미역 Yangsan Young Men´s Association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홍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청년운동단체
설립연도/일시 1920년 7월 15일연표보기
해체연도/일시 1928년 1월 18일연표보기
설립자 김철수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 있었던 청년 운동 단체.

[개설]

1919년 3·1운동 이후 각 지역별 청년 운동은 문화 진흥과 산업 진흥을 목표로 야학 운영, 토론회, 강연회, 풍속 개량, 체육 활동 등을 펼쳤다. 양산청년회는 1920년대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강연회, 토론회, 야학 등 문화 운동을 펼친 대표적인 사회 운동 단체이다.

[설립목적]

경상남도 양산 지역의 청년과 대중을 대상으로 지·덕·체(智·德·體)를 갖춘 경제적·문화적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창립되었다.

[변천]

1920년 7월 15일 양산군 공립보통학교에서 200여 명의 내외 빈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임원진은 회장 김철수(金喆壽), 이사 금석호(琴錫浩), 서무부장 최학선(崔學鮮), 지육(智育)부장 엄주화(嚴柱和), 평의장 최상흡(崔商翕) 외 14명이 피선되었다. 이들 창립위원은 지주 혹은 사업 자본가들로 상당한 수준의 자산가들이었다. 회장을 맡은 김철수는 1913년 부산제2상업학교(부산상업고등학교의 전신)를 졸업한 후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갔다 왔으며, 1919년 2·8 독립선언 대표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2년 10월 21일 정기총회에서 간사장 권득구(權得龜), 체육부 엄주화, 서무부 정진수(鄭鎭壽)·김덕봉(金德峯), 문예부 전병건(全秉健), 사교부 이기주(李基周), 재무부 서상건(徐尙健), 의사장(議事長) 금석호, 의사 최학선 외 3명이 선출되었다. 1923년 4월 22일 정기총회에서는 직제 개편을 통해 회장제를 폐지하고 집행위원제를 선택하였다. 임원진은 집행위원장 금석호, 집행위원 권득구 외 6명이 맡았다.

1925년 4월 25일 의춘주식회사(宜春株式會社) 내에서 김철수의 사회로 제14회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임원진을 개선했는데, 위원장 엄주태, 위원 홍기업(洪基業), 이기주, 전혁(全爀), 문막(文莫), 검사위원 김철수, 정진수 등이었다. 1927년 여름부터 양산 지역의 청년운동은 이전의 문화 운동 중심에서 방향 전환론을 수용하여, 민족적 과제를 최우선시 해야 한다는 흐름 속에서 청년 동맹으로 조직 정비를 하게 된다. 이에 1927년 11월 27일 양산청년동맹이 창립되고, 각 지부가 신설되게 된다. 1928년 1월 18일 양산청년회는 해체되고 양산청년동맹으로 확대·발전하게 된다.

[주요사업과 업무]

1920년대 상반기까지의 주요 사업은 지·덕·체의 삼육(三育) 강화를 통한 전인적 인간 형성이 주된 사업이었다. 이를 위해 청년과 대중을 위한 각종 토론회와 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노동 야학회와 문화 공연 등을 주요 사업으로 추진하였다. 양산청년회는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28년 1월 해체될 때까지 일제의 강압에 대하여 보다 강한 사상적·조직적 대응을 양산 지역에서 펼쳤고, 이를 위해 각종 연대 사업과 여성 문제, 농민 문제, 민족 문제 등에 대한 사업을 수행하였다.

[활동사항]

1920년 7월 18일부터 7월 28일까지 양산 지역 내에서 양산청년회 지육부 주최로 위생·교육·종교 등과 관련한 주제를 가지고 여름 순회 강연을 하였으며, 지역 주민에게 농촌 계몽과 양산청년회 결성을 홍보하였다. 1921년 8월 20일 오후 8시부터 4시간 동안 양산청년회 지육부 주최로 ‘사회를 발전함에는 금전이 학문보다 나음’이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하였고, 동년 9월 30일에는 ‘현대 조선 사회에는 남녀평등이 옳은가 아닌가’라는 주제로 역시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1921년 7월 27일에는 양산청년회의 후원으로 서울 지역의 조선고학생 갈돕회의 ‘유언과 운명’이란 연극을 개최하였으며, 1921년 8월에는 양산청년회 내에 노동 야학회를 개설하여 정규 학교 교육에서 소외된 50여 명에 대한 교육 사업을 펼쳤다. 1921년 10월에는 동래면려청년회와의 야구 경기를, 1922년 1월에는 노동 야학을 위한 소인극을 개최하였다. 1922년 6월에는 구포역 앞에서 영포(齡浦) 소년군과 야구 시합을, 동년 8월에는 김해에서 김해청년회와 축구, 정구 시합 등을 개최하였다.

또한, 1922년 9월에는 양산기독청년당, 양산부인회, 양산소년단, 동아일보 지국 등 5개 조직이 연합하여 황해도 수재민 돕기 의연금 모집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3년 2월 11일에는 양산부인회, 양산소년단, 양산여자소년단 등 4개 단체와 연합으로 물산 장려 운동의 대대적 선전에 앞장섰다.

1925년 3월 18일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이념을 지향한 사상 단체인 신흥동우회가 발기인 대회를 가졌으며, 이후 양산청년회 회원 중에는 신흥동우회의 임원을 겸하는 인사도 있었다. 그 결과, 1926년 3월 13일 정기총회에서는 운동 방침으로 여성과 노동 대중에 대한 계급 의식 고취가 추가되었다.

1927년 2월 일본에 대한 민족 통일 전선체인 신간회 결성 이후 지역 차원에서 ‘전민족적 청년운동’에 대한 방향 전환이 요구되었다. 이에 양산청년회는 1927년 6월 8일 긴급총회에서 이전의 간부들이 총사직하고 김기오(金基午)·전병한(全秉翰)·정진호(鄭進浩)·백룡관(白龍寬)·전이풍(田二豊)·권연구(權淵龜)·김룡호(金龍浩) 등이 신임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양산청년회는 1927년 10월 18일 방향전환론과 전민족적 청년 운동을 목표로 양산청년동맹을 결성하였다. 이후 양산청년동맹은 양산 지역 청년 사회 운동의 본영으로 자리 잡았으며, 양산청년회양산청년동맹으로 확대·발전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 통치에 대응하여 전국적으로 민족 부르주아지 문화 운동이 확산되었다. 양산청년회는 1920년대 양산 지역에서 지역 유지가 중심이 되어 문화 운동을 펼친 대표적인 사회 운동 단체였다. 1920년대 양산 지역에서 사회주의 사상 단체였던 신흥동우회(新興同友會)와는 운동 주체의 성격면에서 비교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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