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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속의 국경마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A010201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낙동강
시대 고대/삼국 시대/가야
집필자 김기혁

낙동강 변에 위치한 용당은 역사가 깊은 지역이다. 용당리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경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신라, 가야 역사로부터 시작된다.

이곳 용당은 당시 황산강(낙동강)을 경계로 동쪽은 신라의 영역이고, 서쪽은 가야의 영역이다. 신라와 가야는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이에 따라 황산강(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신라와 가야의 경계에 있는 용당마을은 두 나라간의 치열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심각한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때로는 신라 편에 가담하기도 하였을 것이고, 때로는 가까운 가야 편에 가담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 시기는 영토의식, 국가의식 등이 그렇게 확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용당마을은 변경인으로 존재하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곳에 있는 마을의 주민들은 깊은 강물에 대해 신성한 의식을 행하였을 것이고, 그러한 의식들이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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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당 마을

이러한 의식 속에서 생겨난 용당의 당곡마을, 신곡마을, 중리마을들은 오늘날까지도 유지되어오고 있다. 현재 당곡마을이 있는 곳은 낙동강 유역 중 수심이 깊은 곳으로 가야진사(伽倻津祠)가 있었으며, 원동면사무소가 이곳에 있었다. 특히 이곳은 집중호우가 내리면 강물이 불어나 홍수로 인해 농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강과 매우 가까이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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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진사(伽倻津祠)

신곡마을은 1979년 7월 1일 당곡마을에서 분리되면서 생긴 마을이다. 주위가 대부분 비가 많이 오면 물에 잠기는 지역이며, 기와를 구워내었던 마을이다.

중리마을은 삼한시대부터 황산강(낙동강) 뱃길을 이용할 수도 있고, 강변을 따라 나 있는 동래-서울간의 국도가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한 지역이었다.

특히 뱃길에는 신라인이 가락국(가야)으로 통행하는 가야진사 나루가 있었고 여기에 작원관이 있었다. 그 작원관은 남쪽 약 50미터 지점에 위치하였었고, 이는 뱃길에서 육로로 통행하는 통행인을 감시하는 감시병이 항상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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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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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원관

그리고 이곳에 주막과 파수병(감시병)의 가족이 사는 마을이 생겨 그 마을 이름을 파수막마을이라 하였다. 이 파수막마을은 중리마을에 속해 있다가 이후에 다시 하주막마을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후 벽지마을(멀리 떨어져있는 마을) 철거대책으로 마을은 없어지고 중리마을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유지되어오고 있는 용당의 마을들은 역사의 산증인이며, 우리 역사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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