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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고을과 마을을 이어주던 나루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A010205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낙동강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기혁

용당리 당곡마을가야진사가 있는 곳은 신라시대 눌지마립간이 가야를 정벌할 때 왕래하던 나루터였다. 일명 옥지연(玉池淵)이라고 하는 낙동강은 강원도 황지(黃池)에서 발원하여 경북·대구·경남과 부산을 거쳐 남해로 흘러드는 1300리 길로 영남의 젖줄로서의 구실을 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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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로 이용되었던 낙동강

고려시대 송나라 사신인 서긍의 저서 『고려도경』에 의하면 수레 두 대가 지나다닐 수 없을 정도로 길이 좁았다고 하고 있다. 이것은 육로가 그만큼 발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우리나라는 강이 국토의 곳곳에 이르기까지 발달되어있었으므로 강을 이용하여 사람과 물건을 실어 날랐다.

그 중 낙동강은 물길이 길어 김해(金海) 하구에서 상주 낙동(洛東)까지 크고 작은 배로 운송이 가능했으며, 특히 일명 소금배라고 하는 큰 돛을 단 황포돛배로 한꺼번에 많은 물류와 사람을 싣고 낙동강의 곳곳을 지나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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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배

낙동강의 하류 거의 끝 지점인 용당리 나루터는 조선시대 인근의 김해 불암창(佛巖倉)이 있어 도내의 세곡, 특히 남부 연해안 지방의 세곡을 수도 한양에까지 운반하는 데 이용하였다. 본래 고려시대만 해도 이곳에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세곡 창고가 없었다. 그러나 고려 말 공양왕 때에 불암창이 설치되는 것으로 보아 용당의 나루터가 국가 세곡 운반로로서 한몫을 담당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낙동강을 더욱 적극적으로 이용하게 된다. 17세기 이후 상업이 발달하여 각 지역마다 장시가 들어서고 이곳을 중심으로 보부상이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였다. 조선시대의 도로 사정도 이전보다 많이 나아지지는 않았던 듯하다.

당시의 육로는 기껏 잔등에 짐을 실은 소나 말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산길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국가적인 확장사업이 행해지지 않아 지역마다 노폭이 다르고, 노면도 황토·모래·자갈·암석 등으로 수레의 이용은 요원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9세기 후반에도 개선되지 않아 낙동강 유역에서 수레가 다닐 수 있는 길은 거의 없어 물길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낙동강 유역의 유통경제 발달은 물길의 의존도가 절대적이었다. 당시 낙동강의 수운을 통해 남해안에서 실려 온 소금·미역·김·어물 등 각종 해산물과 은·동·단목(丹木)·소목(蘇木: 염료의 재료) 등의 일본에서 수입된 물품은 황포돛배를 통해 각지의 나루터에서 내려져 내륙의 장시로 운반되었다. 또 낙동강 상류지역에서 생산되는 곡물·직물·약재 등의 물품이 하류지역으로 운송되어 물량의 유통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개항 이후인 1890년에는 부산에 설립된 기선회사(汽船會社)가 종래의 나무로 만든 판선(板船)을 대신하여 서양식 소륜선(小輪船)을 구입하여 낙동강 상류지역까지 진출하여 각종 상품을 운송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개설된 경부철도로 인해 낙동강의 수로는 점차 그 중요성이 약화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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