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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의 경계, 팔도의 승려들은 들어오지 마세요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B020104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지산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종봉

지산마을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면 그렇게 크지 않은 비석을 발견하게 된다. 비석이 있을 만한 자리가 아닌데도 비석이 있어서 상당히 생소하고 엉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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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승지금지석(八道僧之禁地石)

비석의 명문은 ‘팔도승지금지석(八道僧之禁地石)’이다.

비석에 대한 관리도 잘 되어 있지 않고 비석 앞에 세워져 있는 조그만 푯말에 통도사 소유라고만 되어 있다. 비문의 글귀만 해석해 보면 팔도의 승려가 들어오는 것을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비석의 소유가 통도사로 되어 있기 때문에 팔도승려가 통도사 경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통도사가 매우 부유한 사찰이므로 통도사 승려가 아닌 승려가 막무가내로 들어와서 저지르는 많은 나쁜 일을 미리 막아보고자 하는 의지가 담긴 사찰이 아닌가 한다.

마을 사람들은 오히려 거꾸로 해석하여 대원군 시절에 억불정책에 의하여 통도사를 비롯한 팔도의 승려들이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라고 하고 있다. 학자들은 선조 때 숭유억불 정책이 매우 심하게 시행되어 통도사까지 영향을 미치자 통도사에서 이를 방어하기 위하여 팔도의 승려를 대상으로 통도사 경내에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고 한다.

통도사가 스스로 사찰을 보호하기 위하여 내린 조치인 것이다. 들어오지 못하는 주체가 누구든 간에 이 비석이 담 또는 경계의 의미인 것은 확실하다.

본래 승(스님)과 속(속세)은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는 항상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고려시대 후기에 이르면 고려 인구의 3분의 1이 승려라고 하는 통계가 있다. 아무리 그 사회가 불교를 국교로 하고 있더라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승려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국가의 역을 피하기 위하여 백성들이 사찰로 많이 들어갔다. 사찰로 들어간 대부분의 백성들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승려가 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았을 것이다.

그들이 수행을 하고 경전을 읽는다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이들 대부분은 승려의 행색을 하고 속세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 속세에서 생활하는 승려는 자연히 마을에 많은 피해를 입혔을 것이다.

가사를 입고 무턱대로 어느 집에든 들어가서 숙식을 해결하거나 돈을 요구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조선시대에도 죽 그대로 일어났을 것이기 때문에 대원군이 국가쇄신을 외치고 승려들이 더 이상 속세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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